중국 소수민족 정책의 '공포', 한국 다문화 정책에 묻다

서울앤 2021. 4. 15.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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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만난 '우리' ⑤ 중국 투르판에서 경험한 '문화 모자이크 공동체'의 해방감과 한계

[서울&] [길 위에서 만난 ‘우리’] 신장위구르자치구 투르판 1일 투어

카자흐, 티베트, 위구르인과 어울린

‘한족 없는 승합차’ 여행에 해방감 느껴

그러나 ‘차 안 도청장치’ 가능성 듣고는

‘민족 동화 강요 느낌’ 공포로 다가오며

‘우리 민족은 개방적인가’ 자문하게 돼

투르판 화염산. <서유기>에 나오는 그 화염산이다. 불이 날 듯 뜨겁다

2017년의 뜨거운 여름,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뙤약볕. 분리독립 움직임으로 유명한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성도인 우루무치에서 투르판으로 향했다. 우루무치역은 테러 위협으로 분위기가 어수선했고, 위구르인과 중국 한족으로 붐볐다. 택시를 타고 투르판으로 향했다. 택시로 이동한 이 지역은 타클라마칸사막의 북쪽이고 고비사막의 서쪽, 톈산(천산)산맥의 남쪽이다. 그래서 실크로드의 천산남로라고 부르기도 하고 사막북로로 부르기도 한다.

투르판 시내에 도착하니 우루무치와 달리 거의 위구르인만 눈에 띄었고, 한족은 잘 보이지 않았다. 중심가인 가오창루에 있는 호텔에 짐을 푼 뒤, 다음날 투르판 1일 투어에 나섰다.

투르판 포도밭과 베제클리크 석굴 사원, 화염산, 이 지역 옛 지하수로인 카레즈를 소개하는 박물관 등을 둘러본 그 1일 투어에는 티베트 청년과 카자흐인이 함께했다. 나왕 도르지라는 이름의 그 티베트 청년은 시짱자치구 라싸 출신이다. 베이징민족대학 박사과정에 있고,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홀로 배낭여행 중이었다. 카자흐인은 신장위구르자치구의 북쪽 끝에 있는 이리하싸커(카자흐)자치주에서 왔다. 지방 공무원인데 휴가를 내고 역시 나홀로 여행 중이었다.

포도굴 관광지. 투르판은 포도로 유명하다.
투르판의 포도 저장소.

우리를 태울 승합차가 도착했다. 운전하는 이는 위구르인이었다. 이렇게 해서 투르판에서 카자흐인, 티베트인, 위구르인 그리고 한국인이 함께 차를 타고 이동했다. 중국 안 여행이었지만, 한족이 전혀 없는 작은 승합차. 나는 좁은 차 안이었지만, 왠지 해방감을 느꼈다.

1일 투어 승합차 내부 모습. 앞 유리 쪽에 옛 소련기와 중국기가 교차해 놓여 있다. 위구르인 기사와 카자흐인, 티베트 청년과 함께 타고 가는 중이다.

중국어를 하지 못하는 위구르인과 카자흐인은 서로 소통을 잘한다. 위구르어와 카자흐어는 같은 튀르크 계통 언어이기에 소통이 되는 것일까? 아니면 카자흐인이 위구르어를 잘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카자흐인과 티베트인은 중국어로 대화했다. 나와 티베트 청년은 짧은 영어와 중국어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4명의 대화는 이렇게 위구르어, 카자흐어, 중국어, 영어로 이어졌다.

한족이 없는 탓인지, 필자가 대화 중 티베트 청년에게 말했다. “티베트는 중국과 문화가 다르고, 이에 많은 사람이 저항하다 희생됐다. 티베트가 중국에서 독립해 그들만의 문화공동체를 유지하며 평화롭게 살기를 원한다. 위구르도 마찬가지다.” 이 말을 들은 티베트 청년이 카자흐인을 통해 위구르 기사에게도 내 말을 전했다. 위구르인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 위구르 기사는 차량 앞 유리에 옛 소련 국기와 중국 국기를 교차해 걸어놓았다.

필자가 계속 위구르와 티베트에 대한 중국 정부의 대응에 강하게 비판을 이어가자, 티베트 청년이 나에게 조용히 말했다.

“이 차를 저 위구르인이 운전하지만, 이 차 소유자는 저 위구르인이 아니에요. 조심해야 합니다.”

‘왜?’라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티베트 청년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이 차는 중국 공안이 통제하는 차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 차 안 어딘가에 녹음장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정부에 대해 함부로 비판하면 안 됩니다.”

카자흐인(왼쪽부터), 티베트 청년 그리고 필자.

이 말을 듣고 위구르인이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한 이유를 알았다. 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도청을 우려해 함부로 말도 못한다니. 마치 1980년대 한국의 억압적 정치 상황으로 갑자기 돌아온 느낌이었다.

그때 이미 나는 많은 말을 했고 중국 공안이 싫어할 만한 말만 했다. 갑자기 ‘작은 공포’가 몰려왔다. 그 뒤 나는 정치적인 얘기를 제외하고 티베트 문화와 카자흐 등에 관한 얘기를 주로 했다. 중국에서 공안에 잡혀서 좋지 않은 일을 당하지 않으려고 다른 얘기로 돌린 내가 비겁한 느낌도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만이 문제가 아니라 여기 있는 사람 모두 문제가 될 수 있다는 티베트 청년의 말이 귓가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뒤 티베트 청년, 카자흐인과 77개의 석굴 사원이 남아 있는 베제클리크 사원 등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특히 카자흐인은 필자와 둘만 있는 시간에 한국의 기술과 경제력에 탄복하며 많은 관심을 보였다. 난 카자흐인이 과거 고구려와 친했던 돌궐의 후예라는 얘기를 하며 친밀감을 표시했다. 그와 나는 손과 발을 사용해가며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아마도 약간의 베이징어를 내가 알기도 했지만, 소통하려는 의지가 서로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집단, 즉 부족, 인종, 민족 등이 함께 살 수 있을까? 독일의 여성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1871~ 1919)는 공산주의자이면서도 민족과 민족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는 계급주의 이념으로 민족 문제를 침범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이상과는 다르다.

다양한 집단이 섞여 살면서, 인종의 용광로를 자랑하는 미국도 더는 ‘용광로’라는 표현을 자랑스럽게 쓰지 못한다. 용광로라는 표현이 힘이 있는 지배적 집단이 그렇지 않은 소수 집단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강요하면서 만들어낸 ‘문화동화주의’이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도 베이징어와 중화주의를 앞세워 50개 넘는 소수 집단 공동체에 동화주의를 강요하고 있다.

소수의 집단 공동체들이 각기 자신의 문화 정체성과 언어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집단 공동체들이 섞여 살아갈 수는 없을까? 완벽하지는 않지만, 캐나다 정부가 추진해온 다민족 문화정책 등을 우리는 ‘문화의 모자이크 모델’이라고 한다. 투르판 1일 투어 모임은 위구르인, 티베트인, 카자흐인, 한국인이라는 서로 다른 네 집단에 소속된 이들이 어울린 ‘문화의 모자이크 모델’이었다. 그러나 그 승합차 안에서도 중화주의라는 중국식 용광로 정책의 지배적 힘이 ‘묘한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강한 민족의 민족주의는 배타적인 민족주의로 흐르기 쉽고, 억압당하는 민족주의는 저항적 민족주의일 수밖에 없다. 우리 역사에서 우리는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는 저항적 민족주의의 정당한 사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세계적인 경제 강국이 됐다. 우리에게도 이제 저항적 민족주의뿐만 아니라 개방적 민족주의와 다원주의, 그리고 다문화주의가 필요한 시점이 된 것 같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불합리한 처우, 결혼 이민 여성의 아픔 등을 담은 뉴스가 넘쳐나는 현실 속에, 4년 전 그 ‘묘한 공포’가 필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모자이크 문화 모델’을 잘 만들어가고 있는가?’

가오창의 옛성 앞 기념 동상. <서유기>에 나오는 현장 스님이 모델이다.

글·사진 장운 자발적 우리 흔적 답사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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