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플렉스의 원조, 구멍가게엔 "아실아실한 삶"이 있었다

강윤주 2021. 4. 15.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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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성군 황룡면 홍길동 테마파크 뒤편에 55년째 자리를 지키던 '아치실 가게' 앞마당은 동네 주민들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들르던 참새 방앗간이었다. 2020년 가을 다시 찾았을 때 가게는 문을 닫고 없어졌다. 책과함께 제공

“이런 상회는 또 그런 맛이 있잖아요.”

강원 화천의 시골 동네 구멍가게를 맡아 꾸려가는 tvN 예능 '어쩌다 사장'에 아르바이트생으로 출연한 배우 남주혁은 돈이 부족한 꼬마 손님에게 초콜릿을 공짜로 준 사연을 당당히 고백하며 이렇게 말한다. 대형마트나 편의점에서는 '영업 손실'로 처리될 큰 일이지만, 사장 역할을 맡은 조인성은 "그런 맛"에 공감하며 잘했다고 다독인다.

산책 나온 어르신들 드시라고 커피 자판기 위에 동전을 쌓아놓고, 꼭 물건을 사지 않아도 잠시 앉아 쉴 수 있고,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동네 이웃들과 술 한잔 기울일 수 있는 곳. '구멍가게 이야기'는 돈보다 정이 넘치는 "그런 맛"이 있는 동네 구멍가게의 추억을 소환한 책이다.

두 저자는 "삶의 공간으로서의 구멍가게를 심층적으로 다뤄보고 싶어” 직접 발품을 팔았다. 2011년 11월부터 2014년 6월까지 전남 지역 22개 시군을 돌아다니며 찾은 구멍가게만 100여 곳. 그 중에서 30년 이상 동네 터줏대감을 지킨 가게 58곳을 추려 주인과 단골손님을 인터뷰했다. 저자들의 건강 문제로 한동안 중단됐던 작업은 2018년 가을 우연히 찾은 가게들이 빠르게 사라져가는 걸 보고 놀라 다시 시작됐다.

전남 담양군 무정면에 위치한 '영천리 구판장'은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모여 앉을 수 있도록 가게 중앙에 큰 탁자를 들여놨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곳에서 동네 돌아가는 사정을 전해 듣는데 그 때문인지 죽산 마을 이름을 따 '죽산일보'란 애칭까지 붙었을 정도였다. 영천리 구판장도 이제는 운영하지 않는다. 책과함께 제공

책이 전한 구멍가게는 단순히 물건만 파는 경제적 공간을 뛰어넘는다. 외출이 어려운 노인들에게 우체국 공과금 심부름과 택배업체를 이어주는 운송대행사, ‘마을 주민’이란 거 하나 믿고 외상은 물론 돈까지 빌려주는 은행, 버스표 판매는 물론 대합실 역할까지 하는 공용 정류장, 엄마 잔소리를 피해 군것질에 나선 아이들의 놀이터, 안주가 무상 그리고 무한 리필되는 인심 후한 술집, 마을공동체 소식을 제일 많이 빨리 공유할 수 있는 사랑방, 공동체의 전통과 농사 비결을 전수해주는 배움터 등 끝도 없다. 마을 네트워크의 중심인 구멍가게는 멀티플렉스의 원조였던 셈.

구멍가게 이전에도 마을 중심의 소규모 상점은 있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당시 농촌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정부 차원에서 추진된 ‘구판장’과 ‘부녀회슈퍼’다. 하지만 톱 다운 방식은 먹히지 않았다. 경제 논리로만 접근하고 생활 공동체에 뿌리내리지 못한 한계였다. 반면 구멍가게는 끝까지 살아남아 80년대 중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구멍가게의 역할처럼 책은 장르를 넘나든다. 구멍가게의 흥망성쇠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인문서인 동시에 구멍가게를 지켜온 사람들의 고단한 생애를 풀어놓은 구술사 책 같기도 하다. 출판사는 '구멍가게 현지 답사보고서'라고 소개했지만, '구멍가게 인간극장 시리즈'라고 수정해도 될 만큼 삶의 무게와 그걸 함께 이겨내는 따뜻한 사람들의 온기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피어오른다. 그 덕에 얻을 수 있는 힐링은 이 책의 진짜 미덕이다.

구멍가게는 멀티플렉스의 원조였다. 버스 시간표(왼쪽 위)를 알려주는 대합실인 동시에 아이들의 놀이터(오른쪽 위아래), 인심 후한 술집이기도 했다. 장사가 잘 되던 시절 주인들은 가게와 연결된 방문 창호지를 찢어 손님의 동태를 살피기도 했다(왼쪽 아래). 책과함께 제공

저자들은 특히 구멍가게가 버텨온 일등공신으로 관계 중심의 커뮤니티를 지향하는 가게 주인 아주머니(주로 여성들이 많았다)들에 주목한다. 사람이 모이는 곳인 만큼 별의별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주인은 ‘무거운 입’으로 중립을 지켜야만 했다. ‘손님들과 절대로 말을 섞지 않는다, 누구의 편을 들지 않는다, 누구의 말을 옮기지 않는다’는 철칙으로 거름장치 역할을 자처했다. 돈 몇 푼보다는 동네 사람들의 마음을 중히 여겼다. 외상을 떼어먹거나 술 취해 주정 부리는 진상 손님, 크고 작은 좀도둑까지 이 모든 일을 없던 일처럼 ‘용인’하면서 말이다.

마을 네트워크의 중심에 서 있지만 누구보다 경계인이 돼야 했던 주인들은 "곽(관) 속에 들어도 큰소리 하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속으로는 피멍이 들었다. 책은 이들의 목소리를 절절하게 담아내며 구멍가게가 단순히 아름다운 서정이 아닌 핍진한 생활의 현장이었다는 점을 잊지 않고 짚어준다.

'구멍가게 이야기'. 박혜진·심우장 지음. 책과함께 발행·488쪽·2만8,000원

“살아온 날을 생각하믄 참말로 아실아실해” ‘화림리 구멍가게’의 주인 할머니의 말은 직각으로 굽은 할머니의 허리만큼이나 굴곡졌던 할머니의 삶을 말해준다.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홀로 아이들을 키워낸 할머니에게 그 아슬아슬한 인생을 붙잡아준 건 '50년지기' 구멍가게였다.

출간 소식을 알리고자 1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화림리 구멍가게 할머니는 기억을 잃은 아이가 됐고, 주인 잃은 가게는 버려진 상태가 됐다. 여기뿐이 아니다. 인터뷰에 응했던 58곳 중 절반 가까운 24곳이 문을 닫았다. 구멍가게도, 그걸 꾸려가던 고단했던 한 사람의 인생도 점점 사라지는 것들이 많아지고 있다. 옛 추억에 잠겨 키득키득 웃다가 어느 순간 가슴 한켠이 먹먹해지는 책이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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