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LGES-SKI, 2조 원 배터리 합의의 이면.."이제라도 외양간 고치자"
'꿈보다 해몽'…미국의 정치적 압력에 백기?
LG에너지솔루션 김종현 사장과 SK이노베이션 김준 사장은 "한미 양국 전기차 배터리 산업의 발전을 위해 건전한 경쟁과 우호적인 협력을 하기로 했다"며, "특히 미국 바이든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배터리 공급망 강화 및 이를 통한 친환경 정책에 공동으로 노력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분쟁 합의에 대해 "미국 자동차산업의 노동자들에게 중대한 승리"라고 밝혔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도 "배터리 자동차 규모의 상당한 증가는 대통령의 '더 나은 재건' 계획에 중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여부를 검토한 캐서린 타이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도 "여러 이해당사자의 중대한 관여에 따라 '미국 일자리 계획'에 반영된 클린 에너지 기술의 성장과 혁신을 밀어붙이는 더 강력한 위치에 서게 됐다"는 성명을 냈다.
국내에선 꿈도 못 꿀 천문학적 합의금…'디스커버리'의 힘?
SK이노베이션은 지난 2020년 2월14일 ITC가 광범위한 증거 삭제와 증거 제출 명령 위반을 이유로 조기 패소 판결을 내리자 ITC에 재심의를 요청했다. 그리고 1년 뒤인 지난 2월10일 ITC가 조기 판정(Initial Determination)을 그대로 인정하고 SK이노베이션에 10년 동안의 제한적 수입 배제명령(Limited Exclusion Order)과 미국 내 수입 유통 금지명령(Cease and Desist Order)을 내리자 강력히 반발하며 바이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요청했다.
SK이노베이션은 ITC의 최종 판정(Final Determination)에 대한 입장문에서 "ITC가 LG에너지솔루션의 영업비밀 침해 주장에 대한 실체적인 검증이 없이 소송 절차적인 흠결을 근거로 결정하였는데, 그 결정은 여러 문제들을 야기할 것으로 우려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치열한 여론전까지 펼치면서 제시했던 합의금은 당초 SK가 4천억 원, LG가 3조 원 정도로 알려졌다. 2조 원의 합의금은 SK이노베이션은 1조 6천억 원, LG에너지솔루션은 1조 원을 양보한 금액인 셈이다. 그렇다면 왜 두 회사는 조 단위의 거액을 양보하면서 영업비밀과 특허 분쟁을 마무리하기로 한 것일까?
우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급성장하고 있는 미국의 전기차 시장을 잃을 수 없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세계 자동차 시장의 중심인 미국에서 도태될 경우 자칫 세계 시장에서 설 땅을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다. 이번 싸움으로 유럽 등 다른 지역의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서도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우려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시한 이었던 지난주 미국무역대표부(USTR) 캐서린 타이 대표는 LG에너지솔루션 김종현 사장 및 SK이노베이션 김준 사장과 두 번에 걸쳐 3자 화상회의를 가진 것으로 전해졌다. 친환경 전기차 공급 확대와 일자리 창출을 표방하고 있는 바이든 정부의 강력한 압박에 두 회사가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SK이노베이션이 당초 주장보다 5배 규모의 배상에 응하도록 한 것은 무엇보다 미국의 강력한 영업비밀 보호제도와 디스커버리(Discovery: 증거개시) 제도였다는 진단이 힘을 얻고 있다.
영업비밀(Trade Secret)은 경제적 가치를 가진 비밀 정보로 특허(Patent)와 달리 등록과 공개가 필요없지만, 한 번 노출되면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만큼 영업비밀 침해는 절도나 사기, 갈취 행위로 규정돼 민사적 손해배상은 물론 형사적인 범죄로 처벌한다. 해외로의 영업비밀 유출은 국가 핵심 기술의 유출로 스파이 행위로 처벌한다.
2014년 버지니아 연방법원은 듀폰(Dupont)의 초강력 케블라(kevlar) 섬유 제조 영업비밀을 침해한 우리나라의 코오롱인터스트리에 형사 벌금 8천500만 달러와 민사 배상 2억 7천500만 달러를 선고하기도 했다. 항소심 판결 이후 양사의 최종 합의금은 1심의 9억 2천만 달러보다 크게 줄었지만, 듀폰의 전직 임원이 코오롱으로 이직하면서 30년 이상 된 케블라 섬유의 영업비밀을 빼낸 데 대한 배상 판결로 당시로서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큰 규모였다.
이번 LG에너지솔루션이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ITC에 제기한 전기차 배터리 소송에서 ITC의 행정판사(ALJ)는 SK이노베이션이 증거를 제대로 제출하지 않고 증거 인멸을 했다는 LG에너지솔루션의 주장을 받아들여 SK측에 삭제한 컴퓨터 파일을 복구하라는 포렌식을 명령했다. 포렌식 결과 광범위하고 전사적인 LG그룹 관련 파일의 삭제 사실이 드러났고, ITC는 SK이노베이션이 행정판사의 증거 제시명령에 따르지 않는다고 판단해 제재조치(Sanction)로 조기 패소 판결(Default Judgement)을 내렸다.
ITC는 재심의 이후 내린 최종 판정에서도 증거 인멸행위를 이유로 제재를 결정한 예비판정을 그대로 유지했다. 다만 타사(LG에너지솔루션)의 영업비밀을 이용해 제조한 SK이노베이션의 전기차 배터리에 대해 10년 동안의 수입 배제명령과 미국 내 유통 금지명령을 내리면서도 이미 계약이 이뤄진 포드자동차의 F150 전기차용 배터리는 4년, 미국 폭스파겐의 MEB 플랫폼용 배터리에 대해서는 2년의 유예기간을 부여했다.
SK이노베이션은 LG에너지솔루션이 삭제한 이메일이 영업비밀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지 못했다고 주장했지만, ITC는 LG에너지솔루션이 설득력 있게 영업비밀이 침해당했다는 사실을 밝혔고, 영업비밀 침해가 없었다는 입증 책임은 SK이노베이션에 있다고 판단했다.
미국의 디스커버리 제도에서는 소송이 예견되면 관련한 증거의 삭제나 변경은 금지된다(Litigation Hold). 증거 개시(Discovery) 절차를 통해 소송과 관련이 있는 거의 모든 자료를 상대방에게 제출하여야 하며, 이를 위반하거나 증거 삭제 행위가 드러날 경우 판사가 이를 제재해 조기 패소 판결을 내리거나 거짓말을 하는 쪽의 주장을 듣지 않고 상대 측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하기도 한다. 디스커버리 과정에서 대부분 관련 사실이 밝혀지고 승패의 윤곽이 드러나는 만큼 디스커버리가 마무리되면 90% 정도의 소송이 배심원이나 판사의 판결을 거치지 않고 당사자 간 합의를 통해 마무리된다.
SK이노베이션은 이번 소송의 디스커버리 과정에서 "증거를 숨기거나 삭제하지 않았고, 관련 증거를 보존할 의무가 없다"는 주장을 폈지만 ITC 행정판사는 인정하지 않았다. LG에너지솔루션은 2019년 4월8일 자사 직원 채용과 영업비밀 침해를 중단하라는 경고장을 SK이노베이션에 보냈고, 4월29일 ITC에 소송을 제기했다. SK이노베이션은 4월 9일 경고장을 받았을 당시 미국에서의 소송을 예상할 수 없었고, 한국법은 미국법과 달리 문서를 보존할 의무를 포함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난 2월10일 ITC의 최종 판정 이후 SK이노베이션은 ITC의 결정대로라면 미국에서의 배터리사업을 접을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을 밝히며 조 바이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전방위로 압박했다. 지식재산업계의 한 관계자는 "ITC가 SK의 이런 행동에 대해 상당히 불쾌해 한 것 같다"며, "캐서린 타이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와의 화상회의에서 영업비밀 침해를 그냥 덮고 갈 수 없다는 ITC의 의지를 확인한 것이 협상에 응하도록 한 결정적인 이유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LG의 부실한 특허 공격도 한 몫…영업비밀로는 기술 보호 한계"
기술은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오고 기술 개발도 발명도 모두 사람이 한다. 그래서 회사는 소속 연구원이 이직하지 않도록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인사 기법을 사용한다고 해도 직업 선택의 자유를 막을 수 없다.
회사의 중요 기술 개발에 참여한 연구원이 경쟁사로 이직하면 그 연구원의 머릿속에 든 기술 정보는 어쩔 수 없다. 자신의 머릿속에 든 기술 정보를 이용하여 이직한 회사에서 후속 개발을 계속하여 더 좋은 기술을 내 놓을 수 있다. 아무리 영업비밀을 잘 관리하고 보호한다고 해도 이런 현상까지 막을 방법은 없다. 영업비밀의 침해는 영업비밀을 가진 자로부터 탈취하거나 취득한 영업비밀을 사용한 경우에만 처벌할 수 있다.
특허는 다르다. 이직회사에서 개발한 기술 (a+b+c)이 전직 회사에서 특허로 보호받고 있는 기술(a+b)을 이용한 것이라면 특허 침해로 제소해 배상을 받을 수 있다. 핵심 연구원의 이직에 따른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사건처럼 SK가 미국 조지아 공장을 완공하고 제3자로부터 부품을 조달하여 미국에서 제조하게 된다면 현실적으로 이를 막을 방법이 없다. 미국 조지아 공장은 아직 건설을 계획 중이고 LG의 영업비밀을 취득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SK미국 법인의 제조행위나 제조품이 LG의 특허권의 보호 범위 안에 있다면 특허 침해를 주장할 수 있다. 우연히 동일한 발명을 했다고 하더라도 먼저 출원하여 특허를 받은 자에게 우선권이 있다. SK미국법인으로 LG에너지솔루션의 연구원이 입사하여 자신의 머릿속에 든 정보를 이용하여 제조 공정을 개발한다고 해도 이를 영업비밀 침해로 막을 수 없지만 특허로는 보호받을 수는 있다.
기업은 영업비밀의 보호만으로 사업을 보호받을 수 없다. 특허의 보호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 영원히 비밀로 유지할 수 있는 기술은 거의 없다. 시장에서 호평을 받는 기술일수록 그 비밀은 곧 깨지게 되어 있다. 특허는 출원 후 20년간 배타적인 권리가 보장된다.
"경찰에서 부르면 한강에 휴대폰 던지는 나라…소 잃었으면 외양간 고치자"
미국에서의 지식재산권 분쟁에 밝은 A 변호사는 "2조 원의 합의금은 향후 배터리 시장 전망을 감안하면 합리적인 규모라고 생각한다. 양측 모두 윈윈할 수 있는 합의로 판단한다"면서 "SK로서는 ITC의 결정으로 미주 배터리사업에 대해 제한을 받는 것이 제일 어려운 부분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B 변호사는 "이번 소송을 계기로 SK이노베이션은 내부 법무와 컴플라이언스(compliance: 준법 감시)에 신경을 써야할 것이다. ITC의 변호사들이 증거 파기(spoliation)에 대해 한심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한국기업을 어떻게 봤을까 걱정된다.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지식재산을 전공한 C 교수는 "이번 합의는 SK가 전기차 배터리사업에 사활을 걸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으로 본다. 이번 사안은 특허 문제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영업비밀 문제였다. 국내 기업들은 컴플라이언스를 강조하면서도 타사의 영업비밀을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인식이 많이 부족하다. 국내 법제도에서는 영업비밀 침해 입증이 어렵고, 설령 입증되더라도 침해자에게는 득이 실보다 크다는 판단이 있다. 그러나 글로벌 경쟁 시대에는 회사 차원의 위험 관리(risk management)는 물론 평판(reputation) 유지를 위해서라도 자사의 영업비밀뿐 아니라 타사의 영업비밀도 중요하다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D 변리사는 "삼성에서 미국 마이크로소프트로 이직을 했더니 삼성에 근무하면서 알게 된 영업비밀은 말하려 하지 마라. 법적 문제가 된다. 당신을 채용한 것은 영업비밀을 탈취하려 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역량을 보고 뽑은 것이다."라고 했다며, "국내 기업과 외국 기업의 영업비밀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고 말했다.
E 변리사는 "독일과 영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그 나라에 맞게 변형한 디스커버리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특허법 132조에서 자료 제출 명령 제도를 도입하고, 영업비밀이라도 판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자료 제출을 명령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판사들의 관련 제도에 대한 인식이 낮고, 자료 제출을 하지 않아도 제재를 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증거 제출 요구와 제출 증거에 대한 진위 판단을 사실에 입각해서 하기보다는 재판부의 재량으로 결정한다"고 말했다.
지식재산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번 사안은 한국 기업이 외국에 가서 망신을 당한 경우다. 한국은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는 제출할 필요도 없고 폐기해도 되는 나라다. 우리나라에서는 재판장에게 거짓말을 하고 자료 제출을 거부해도 적극적으로 확인하거나 제재도 하지 않는다. 한국 기업들의 우물 안 개구리 식 처신은 해외에서 통하지 않는다. 작년에 한국에도 미국식 디스커버리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가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 한다'는 핀잔을 들었다. 우리나라가 과연 이렇게 가도 되나 의문이 든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있지만, 이제라도 외양간을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김용철 기자ycki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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