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뮬리치 조기퇴근'에도 버텨낸 성남의 질식수비..놀라운 9경기 4실점
[스포츠조선 윤진만 기자]지난 10일 탄천종합운동장. '직관'한 홈팀 성남 FC팬뿐 아니라 TV로 시청한 축구팬 모두 뮬리치(26·성남)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2m3에 어울리지 않은(?) 빠른 발로 K리그 데뷔 이래 첫 멀티골을 터뜨린 뒤 유니폼 상의를 벗는 세리머니로 경고누적 퇴장을 당하는 '촌극'을 벌였기 때문이다.
성남은 뮬리치가 후반 9분 '조기퇴근'한 뒤 남은 36여분을 한 명 모자란 상태로 뛰었다. 뮬리치가 미안한 마음에 라커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조마조마하게 지켜본 광주 FC전에서 놀랍게도 2대0 스코어를 지켜냈다. 후반 29분 펠리페(광주)의 득점이 비디오판독시스템(VAR)에 따른 오프사이드 반칙으로 취소된 것 외에는 위협적인 기회도 내주지 않았다. 3경기 만의 승리로 4승 3무 2패 승점 15점을 기록한 성남은 같은 라운드에서 나란히 패한 FC 서울(12점)과 수원 삼성(12점)을 끌어내리고 3위로 2계단 점프했다. 시즌 전 유력한 강등후보로 뽑힌 성남의 그야말로 놀라운 반전이다. 성남은 지난해 개막 이후 같은 9경기에선 2승 3무 4패 승점 9점을 따내며 8위에 머물렀던 걸 기억하면 더더욱 그렇다.
김남일 감독 체제로 출범한 지난시즌 초반 9경기에서 8골을 헌납한 성남은 올해 9경기에서 그 절반인 4골만을 내주고 있다. 9라운드 현재 12개팀 중 최소실점이다. 경기당 평균 0.44실점으로, 2경기를 치르면 1골도 허용하지 않은 셈이다. 이는 2013년 스플릿 라운드 출범 이후 9라운드 기준 최소실점 타이 기록이기도 하다. 지금껏 2팀만이 4실점 선방했다. 2018년과 2020년 우승팀인 전북 현대, 그리고 2014년 성남이다. 프로축구 통산 9라운드 기준 역대 최소실점 기록을 보유한 팀도 성남이다. 1993년 당시 전신인 성남 일화 이름을 달고 9경기에서 단 1골을 내주는 '질식수비'를 펼쳤다. 성남은 1993년 우승을 시작으로 내리 3연패했다.
김남일 감독 부임 2년차를 맞이한 올해 성남의 스리백 전술은 더욱 견고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수비는 개개인 능력보단 동료와의 호흡이 중요한 포지션이다. 센터백 트리오 마상훈 안영규 이창용 등은 소위 '국대급 레벨'은 아니지만, 같이 뭉칠 때 시너지 효과를 낸다. 이들은 최근 2경기에서 세징야(대구)와 펠리페(광주)를 꽁꽁 묶었다. 새롭게 합류한 리차드는 입대한 연제운의 공백을 완벽하게 메워주고 있다. '수비적으론 더 안정적'이란 평가까지 나온다. 여기에 '맏형' 김영광이 뒤를 든든하게 골문을 지키며 질식수비를 완성한다. 내년이면 한국나이 마흔이 되는 김영광은 9라운드 기준 가장 높은 84%의 선방률을 기록하는 등 제3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한 K리그 관계자는 "김영광은 예전에 같은 팀 수비수들도 벌벌 떨 정도로 무서운 선배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올해는 인자한 맏형다운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팀을 잘 이끌고 있다"고 귀띔했다.
팀에서 전술을 담당하는 정경호 코치가 워낙 틀을 잘 만들어놔 수비수 중 누구 하나가 빠져도 수비 조직력이 흐트러지 않는 것은 성남의 큰 장점이다. 성남이 12팀을 통틀어 가장 많은 3번의 퇴장 변수 속에서도 최다 클린시트(5회)를 기록 중인 이유일 것이다. 성남은 수비지역 내 클리어링이 155개로 1위, 수비지역 내 태클(성공)이 27개로 3위를 달린다. 수비지역 내 파울이 31회로 가장 많다. 김 감독은 취임 때 부드러운 '빠다볼(버터볼)'을 지향한다고 말했지만, 수비수들은 거침없이 '빠따(방망이)'를 휘두르고 있다. 그렇다고 성남이 텐백 전술과 같은 '안티풋볼'을 추구하는 건 아니다. 9경기 중 4경기에서 점유율 우위를 점했다. 1라운드 제주, 4라운드 수원 FC, 6라운드 포항 스틸러스, 8라운드 대구전 등이다. 울산에서 임대한 중앙 미드필더 이규성이 중원에서 공을 빠르고 안정적으로 운반하고 있다.
성남은 9경기에서 평균 1골에 못 미치는 7골만을 넣었다. 수원 FC(6골)에 이은 최소득점 2위다. 뮬리치가 팀 득점의 절반이 넘는 4골을 기록 중인 것만 봐도 공격이 시원시원하게 풀리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성남 전술상에서 공격수들의 이같은 침묵은 어느정도 이해해줘야 하는 부분이 있다. '공격은 최선의 수비'라고 하는 축구계 정설과는 살짝 다른 의미지만, 성남의 수비는 공격수부터 시작된다. 전방에 위치한 선수들까지 압박에 가담한다. 거의 모든 팀이 지향하는 바이지만, 실현되는 게 쉽지 않다. 그런데 성남은 9라운드까지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압박의 강도를 어느정도는 유지했다. 성남은 공격지역 내 파울이 50개로 1위다. 상대팀 입장에선 김영광, 아니 스리백 근처에 다가가기 전부터 까다로운 여러 장애물과 마주해야 한다. 제주, 서울, 강원, 울산, 포항 모두 이러한 성남 전술에 고전했다.
숫자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팀 내부적으론 김남일 2년차를 맞은 올해 응집력이 생겼다고 분석한다. 지난해 동계 때 김 감독과 정 코치는 새로운 빌드업 축구를 팀에 주입하기 위해 애썼다. 체력훈련보단 전술훈련에 집중했다. 시즌 초반 반짝하던 성남은 시간이 흐를수록 힘이 빠졌다. 시즌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극적으로 잔류했다. 평소 코치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려고 노력한다는 김 감독은 작년 과오를 발판 삼아 이번 동계때는 체력훈련의 강도를 높였다. 새롭게 느껴진 전술은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지난시즌 잔류를 위해 싸우면서 선수단 내에 '원팀 정신'이 생긴 것 같다고 선수들은 이야기한다. 가끔 개인 성향을 지닌 외국인 선수가 팀 분위기를 흐트러뜨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성남이 이번에 영입한 리차드, 뮬리치, 부쉬는 성격이 원만하고 한국 음식도 가리지 않고 잘 먹는 등 기대 이상으로 빠르게 적응했다. 리차드와 뮬리치는 동계 때부터 실력으로 동료들의 인정을 받았다. '축구에서 경기력은 결국 분위기'라고 한다. 성남은 1명이 모자란 상태에서도 실점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앞으로 성남의 저실점 행보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당장 18일에는 전주로 떠나 '끝판왕' 전북을 상대해야 한다. 진정한 시험대다. 전북은 9경기에서 22골을 넣는 화공(화끈한 공격)을 자랑한다. 22골 중 20골을 상대 박스 안에서 해결할 정도로 골 집중력이 '어나 더 레벨'이다. 지난해 전북과의 두 번의 리그 맞대결에서 1승 1무를 기록한 성남이 일류첸코를 앞세운 전북을 또 한번 잠재운다면 남은 시즌 운영에 더욱 탄력을 받을 수 있다. 탄천에서 고생 꽤나 했던 홍명보 울산 감독은 21일 첫 현대가 더비를 앞두고 후배 김남일이 그렇게 해주길 내심 바랄 것이다.
윤진만 기자 yoonjinman@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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