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비론 아닌 '세대교체론'이 마크롱 중도정치의 핵심
"그의 형식이 아닌 정신 배워야" 지적도
(시사저널=천영준 시사저널 칼럼니스트)
4·7 보선이 마무리되면서 '제3지대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과연 거대 야당 중심의 통합이 중도 껴안기에 유리할까, 아니면 별도의 제3지대 정당이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일까. 2030세대는 단순히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싫어 '2번'에 표를 던졌을까, 아니면 보수 야당이 나름의 장점과 매력이 있어 가보지 않은 길을 선택한 것일까. 쉽게 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2017년 프랑스에서 화두가 됐던 '마크롱 현상'이 실체화되는 과정을 보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공교롭게도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내년에 자신의 연임을 묻는 시험대에 서게 된다. 중도 정치가 정말로 실체가 있는지 성적으로 점검하는 무대가 되는 것이다.
마크롱은 사회당 정부의 경제산업부 장관이었음에도 2016년 9월 과감하게 탈당 카드를 꺼내든다. 그 배경에는 두 갈래의 해석이 있다. 첫째로 마크롱 본인이 사회당의 정체된 분위기를 견딜 수 없어 장외 세력과 공조해 뛰쳐나갔다는 주장, 둘째로 자크 아탈리처럼 사회당의 정신적 원로들이 더 이상 좌파의 옷으로는 정권 창출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마크롱을 부추겨 '중도 세력'을 가시화했다는 주장이다.
올랑드 대통령 시절 사회당은 법인세 인상, 부자 증세 등 철 지난 좌파 정책만 구사하다 대중의 인기를 잃었다. 구조화된 불평등, 민족주의, 극우정당 출현과 같은 기(寄)현상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결국 올랑드 본인이 재선 포기를 선언했다. 우파 정당인 공화당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사르코지 정부의 부패 이미지를 그대로 떠안았기 때문이다. 2017년 대선에 공화당 후보로 나선 프랑수아 피용은 사르코지 정권 시절 총리를 지낸 사람이다. 한마디로 좌파도, 우파도 모두 적폐인 상황이었다.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자유주의자다"
사회당을 뛰쳐나온 마크롱은 '앙 마르슈(En Marche·전진)'라는 제3지대 신당을 창당했다. 이때 내놓은 슬로건이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다"였다. 하지만 더 중요한 방점은 뒷문장에 있다. "나는 자유주의자다."
마크롱은 기존 진영논리에 얽매이지 않는 대신 정책적으로는 확고한 자유시장주의 노선을 어필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제3지대 실험을 기계적 중도로 평가해서는 곤란하다. 정치적으로 넘어야 할 고비도 많았다. 창당 당시에는 마크롱의 지지율이 10%대에 불과했다. 사회당과 대척점에 있던 공화당의 알랭 쥐페 전 총리가 30%대 중반, 극우 성향의 국민전선 마린 르펜 후보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었다. 2016년 11월 공화당 경선에서 프랑수아 피용 전 총리가 최종 후보로 선출되면서 피용의 지지율이 선두가 되었다. 그런데 르펜의 지지율도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어쩌면 2017년 대선은 우파 정당과 극우파 정당 간의 교묘한 힘겨루기 구도로 전개될 위험이 있었다.
마크롱의 기회는 2017년 2월에 찾아왔다. 피용이 의원으로 재직하면서 부인을 보좌진으로 허위 채용했다는 사실이 폭로된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가족의 보좌진 채용은 위법 사항이 아니다. 하지만 1986년부터 2013년까지 피용의 부인 페넬로페가 사무실에 출근도 하지 않고 68만 유로(당시 기준 약 9억2000만원)를 보좌관 월급으로 가져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정국은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피용은 총리가 된 이후에도 같은 당 마크 줄랑 의원을 이용해 '보좌진 급여 상납'을 실현했다. 아주 엽기적인 뇌물이었다.
분노한 프랑스 국민은 피용을 1차 대선 투표에서 탈락시켰다(마크롱 24.01%, 르펜 21.3%, 피용 20%). 그리고 신예 후보인 마크롱과 르펜을 결선에 올렸다. 여기서부터 신화와 같은 드라마가 펼쳐진다. 민족주의 극우파의 등장을 용납할 수 없었던 사회당의 올랑드 대통령과 제1야당인 공화당이 마크롱에 대해 보태기 전략을 펼쳤기 때문이다. 결선투표에서 마크롱은 66.1%를 얻으며 압도적인 당선 기록을 갖게 됐다. 다시 말해 2017년 프랑스 대선은 국민이 제3지대를 선택했다기보다 우파보다 덜 부패하고 좌파보다는 유능한, 선명한 자유주의 정당(어찌 보면 새로운 우파로 볼 수 있는)을 택하는 과정이었다. 또 피용의 비리가 드러나 전통 우파 정당이 완전히 따돌림당하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던 대역전극이기도 했다.
젊은 인재 등용과 철저한 민심 조사 주효
마크롱의 선거 스태프는 대부분 1970~80년대생들로 채워졌다. 싱크탱크와 홍보 경험이 있었던 이스마엘 이믈리앙(1987년생), 항공엔진 기업 근무 경험이 있었던 세드릭 오(1982년생), 마케팅 전문가 출신 스타니슬라스 게리니(1982년생)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마크롱이 정치 세대교체 비전을 주장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또 2008년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선후보팀이 썼던 방식을 이용해 소규모 비밀 후원 모임을 여러 개 가동하고, 마크롱이 직접 후원자들과 접촉하게 했다(총 후원금 규모 170억원). 다만 개인당 후원금은 법에 저촉되지 않도록 했다.
또 앙 마르슈라는 정당 플랫폼을 이용해 '그랑드 마르슈'라는 국민 설문조사 캠페인을 진행했다. 프랑스는 엄격한 개인정보법 때문에 유권자 성향을 분석할 수 있는 데이터를 미국처럼 자유롭게 구매할 수 없다. 따라서 조사원이 유권자를 대상으로 일대일 면담을 통해 자료를 얻어내야 한다. 마크롱의 선거팀은 5000명의 자원봉사자를 모아 10만 명의 전국 유권자에게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그중 2만5000명에게는 심층 면담 결과를 이끌어냈다. 차기 정권이 반드시 해내야 할 숙제와 관련된 조사였다. ①대중이 정치에 바라는 점 ②프랑스에서 잘 안되는 일 ③프랑스 정치에 바라는 일 ④2015년 경험했던 것 중 최고의 사건과 최악의 사건 ⑤주변에서 관심 갖고 있는 사안 등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졌다.
88%의 프랑스 국민은 테러·실업 등으로 삶의 활기를 잃고 있다고 답했다. 마크롱은 나폴레옹이나 드골과 같은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또 프랑스인들이 가장 중시하는 주제가 가족과 사회보장, 가치는 연대와 도덕성, 프랑스 정치에서 가장 저조한 분야는 교육과 정치라는 점을 파악했다. 앙 마르슈는 학교 현장에 대한 유능한 인력 투입과 선택의 자율성 보장, 깨끗한 정당 운영 등을 공약화했다.
마크롱의 중도 노선은 좌파와 우파 사이에서 기계적 균형감을 갖추려는 정치행보가 아니었다. 외적으로 만들어진 환경이 핵심 성공요인이다. 공화당 피용의 부패 스캔들이 전통 보수 세력과 마크롱 사이의 명료한 차별화 포인트를 만들어냈다. 또 마크롱의 젊은 스태프는 철저한 민심 조사를 통해 공무원 17만 명 감축과 과감한 복지 구조조정을 공약화했다. 그 결과 경제적 자유주의 노선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프랑스의 고질적인 사회주의 정책병(病)을 사회당 정부의 장관이 뛰쳐나와 극복한다는 드라마가 국민에게 감동을 줬다. 공자가 말한 대로 어정쩡한 중립이 아닌 민심을 파고드는 전략, 도리(道)에 적중(中)하는 방식의 중도 노선이 키(key)인 것이다. 따라서 제3노선을 고민하는 정치인들은 마크롱의 형식이 아니라 정신을 연구하고, 진영정치에 또 다른 동력을 공급하기 위한 현실적 방안을 고민해야만 한다는 지적을 귀담아들을 만하다. 중도 정당이라는 형식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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