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일기자의 여행>뛰어났지만 기구했던 '조선 숨은 3걸'.. 책장 넘기듯 옛 사람을 따라 걷다

박경일 기자 2021. 4. 15.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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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봉 능선에서 바라본 대둔산의 경관. 암봉 아래 흰 건물이 대둔산 케이블카 상부 정류장이다. 전북 완주의 대둔산군립공원 입구에서 케이블카를 타면 단숨에 여기까지 올라가서 곧바로 기기묘묘한 암봉과 협곡으로 들어설 수 있다.
방탄소년단(BTS)이 화보촬영을 한 뒤로 전북 완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행지가 된 아원고택. 숙소 겸 카페 겸 복합문화공간이다.
전북 완주 상관면의 정여립 공원에 세워진 정여립 조형물. 주먹 쥔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린 모습이다. 정여립 공원은 생가터로 추정되는 자리에 조성했다.

■ 전북 완주 ‘호젓한 산책’

공화주의 부르짖은 최초의 혁명가 정여립의 생가터

추사와 견줄 정도였지만 초야에 묻혀 지낸 이삼만의 묘

피나는 수련 끝에 판소리 새 기법 만든 권삼득의 생가

옛 인물들의 흐릿한 발자취를 돌아보는 이야기 여행

아원고택 등 BTS 뮤비 촬영장소로 관심집중

호수·편백숲·절집·가톨릭 성지서 예술촌·카페까지…

다양한 여행자들에게 두루 만족감을 주는 여행지

‘전주의 근교’에서 ‘신흥 관광도시’로 자리매김

여행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그림 보듯 하는 여행’.

다른 하나는 ‘책 읽듯 하는 여행’입니다.

둘 중 어느 게 더 낫다고 할 수 없습니다.

취향의 문제인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같은 사람이 똑같은 곳을 여행해도 어떤 때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위안을 얻을 때도 있고, 다른 때는 유적과 새겨진 이야기에

감명을 받을 때도 있으니 말입니다.

여행도, 음식과 같아서 편식은 좋지 않습니다.

이른바 ‘인생 사진’ 한 장을 위해, 맛있는 음식 한 그릇을 위해

천 리를 마다하지 않는 세태 속에서 책 읽듯 하는 여행을 이야기하는 까닭입니다.

차분하게 하는 여행이 충분히 즐거운 건, 이즈음에는 어디서나 봄꽃은 피고,

신록이 배경으로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책 읽듯 하는 호젓한 여행이야말로

‘거리 두기’에 딱 맞는 동선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좋은 여행지’ 전북 완주

전북 완주는 근래 가장 주목받고 있는 여행지다. 방탄소년단(BTS)이 아원고택과 위봉산성 등에서 뮤직비디오와 화보를 촬영한 게 이목을 끈 계기가 됐다. 완주는 실제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여행지다. 우선 가진 것이 다양하다. 기암으로 이뤄진 명산과 수변 풍경이 뛰어난 호수, 울창한 편백숲도 있다. 내력 깊은 절집도, 가톨릭 성지도 있다. 책 마을과 예술촌, 미술관 등 복합 문화공간도 곳곳에 있다. 수목원이나 휴양림도 좋다. 이름난 식당이나 근사한 카페는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다. 여행자들에게 뜻밖의 만족감을 주는 로컬푸드 직매장도 곳곳에 있다. 연령대와 상관없이 다양한 목적의 여행자를 두루 만족하게 해주는 곳. 완주는 한마디로 ‘좋은 여행지’다.

완주가 가진 충실한 관광 콘텐츠와 인프라는 대도시 전주에 힘입은 바 크다. 완주는 전주를 포위하듯 감싸고 있다. 그러니 완주와 전주는 생활권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깝다. 이름난 관광도시를 이웃으로 두고 있다는 건, 사실 중소도시 성장에는 치명적 약점이다. 관광 대도시 곁에서 중소도시는 좀처럼 존재감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관광객들이 모조리 도시로 빨려 들어간다.

하지만 완주의 경우는 좀 다르다. 관광지로 이름난 전주를 이웃으로 두고 있음에도 존재감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 이유는 이렇다. 전주는 내로라하는 관광지이긴 하지만, 다양성 면에서는 거의 낙제점에 가깝다. 딱 한 곳 ‘한옥마을’을 빼면 알려진 곳이 거의 없다. 이렇다 할 자연관광지도, 이름난 사찰도 없다. 이런 틈을 완주가 메웠다. 다양성을 무기로 삼은 완주가, 전주와 가까이 있으면서도 좋은 여행지가 된 비결이다.

순서는 이렇다. 처음 완주를 찾은 건 전주 사람들이었다. 완주는 둥글게 반원의 환형으로 전주를 감싸고 있다. 전주 시민들에게 완주는 ‘가장 가까운 시골’이다. 근사한 카페가 하나둘 들어서고, 매력적인 음식점과 펜션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비유해보자면 전주 사람들에게 완주는, 서울 사람들에게 양수리나 양평 정도의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완주에 도시 사람들의 취향과 욕망에 맞는 공간이 하나둘 생겨나게 된 건 당연했다. 이런 공간이 입소문 나면서 전주 사람의 뒤를 따라 전주를 찾은 여행자들이 하나둘 완주로 건너가기 시작했다. 여행자들에게 ‘전주 여행의 확장판’ 목적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제, 다양한 관광지와 도시 취향의 세련된 공간을 갖게 되면서 완주는 전주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

# 정여립, 불온의 이름을 호명하다

이야기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완주에는 뜻밖에 실타래처럼 풀려나오는 인물의 자취가 곳곳에 있다. 그중 가장 극적인 인물이 바로 정여립이다. 정여립이 태어난 생가터가 완주 상관면 월암리에 있다. 근래 그 자리에 ‘정여립 공원’이 조성됐다. 생가 자리를 놓고 이론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야말로 정여립을 기리는 거의 유일한 자취다. 아, 그런데 정여립이 누구냐고?

최악의 피바람을 불러온 ‘기축옥사’의 도화선이 된 ‘정여립의 난’ 주모자 정여립은 최초의 공화주의자이자 혁명가였다. 그는 ‘천하는 공물(公物)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겠는가’며 군주주의를 부정했으며 ‘백성에게 해가 되는 임금은 죽여도 좋고, 인의가 부족한 지아비는 버려도 된다’며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느냐)을 펼쳤다.

왕조시대의 시선으로 보면, 그의 사상은 급진적이고 불온하기 짝이 없었다. 정여립에게는 역모의 혐의가 씌워졌고, 아들과 함께 몇 날 며칠을 관군에게 쫓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죽은 정여립의 시신을 다시 찢어 죽인 조정은 역모 가담자를 찾겠다며 대대적인 탄압을 자행했다. 그게 바로 조선 시대 이른바 ‘3대 사화’의 희생자를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사망자를 낸 기축옥사였다.

정여립 사건은 서인들이 정치적 반대파 동인을 탄압하는 올가미가 됐다. 눈엣가시 같은 정적을 골라내 정여립과 만났다거나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이유로 목을 벴다. 함께 웃는 걸 봤다고 죽이고, 9촌 사이라고 죽였다. 이렇게 죽은 선비가 자그마치 1000명이 넘었고,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은 금기시됐다. 죽음조차 수습되지 못해 정여립은 묘가 없다. 족보에서조차 파이고 생전의 흔적까지 모두 지워졌다. 그가 태어난 집 자리를 숯불로 지지고 물길을 끌어들여 깊은 소(沼)를 만들었다. 역적의 태 자리에서 자란 풀을 소나 말이 먹고 반역을 일으키는 병마로 길러질 수 있으니 아예 후환을 없애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사라진 자취를 더듬고 뒤져서 생가터를 기념하는 공원이 만들어진 건,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기축옥사 최악의 가해자였던 송강 정철의 흔적은 전국 곳곳에 관광자원이 됐는데도, 정작 조작됐다는 피해자였던 정여립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를 기억하는 손바닥만 한 공간조차 없으니 말이다. 철판을 오려 불끈 쥔 주먹을 치켜든 정여립의 모습을 새겨놓은 정여립 공원은, 시대를 앞서갔던 혁명적 공화주의자를 기리는 유일한 장소다. 그게 그곳에 가봐야 하는 이유다. 정여립 조형물과 정자 하나, 우물 하나. 그리고 여덟 개의 안내판이 공원의 전부지만 말이다. 여기는 주소가 있어야 찾을 수 있다. 완주군 상관면 신리 391-3.

# 온몸으로 밀고 나아가다…이삼만과 권삼득

서울의 추사 김정희, 평안도의 눌인 조광진과 함께 ‘조선 후기의 3대 명필’로 일컬어지는 창암 이삼만. 그의 묘가 완주 구이면 야산 자락에 있다. 이삼만은 평생 관직이 없이 벼루 두 개를 구멍 낼 정도로 서예 연마에만 힘써 끝내 일가를 이룬 인물이다. ‘삼만(三晩)’이란 이름은 ‘세 가지(三)’가 ‘늦었다(晩)’는 뜻을 담아 바꾼 이름인데, 집이 가난해 글공부가 늦었고, 벗을 사귀는 게 늦어 사회진출이 늦었으며, 장가를 늦게 들어 자손이 늦었다는 의미다.

창암 이삼만은 추사 김정희와 여러모로 대비된다. 둘 다 내로라하는 명필이지만, 환경과 삶은 전혀 달랐다. 추사가 이른바 ‘금수저’ 집안의 유복한 천재였다면, 창암은 초야에 묻힌 가난한 명필이었다. 추사와 창암은 딱 한 번 만났다. 추사가 제주로 유배 가는 길에 전주에 들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창암은 제자들을 이끌고 그를 찾아갔다. 이때 창암의 나이가 일흔하나. 추사의 나이는 열여섯 살 아래인 쉰다섯이었다. 창암은 나이는 한참 아래지만 당대 최고의 대가로 인정받는 추사에게 글씨를 보여주고 품평을 받고자 했다. 창암의 글씨를 본 추사의 간략한 평이 이랬다. “노인장께선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 모욕에 가까운 평가였다.

9년의 유배생활 속에서 교만과 독선을 벗고 한결 사유가 깊어진 추사는, 유배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창암을 만나기 위해 전주를 다시 찾았다. 창암은 3년 전에 세상을 뜬 뒤였다. 추사는 창암의 묘비 글씨와 묘문을 남겼다고 전한다. “여기 한 생을 글씨를 위해 살다간 어질고 위대한 서가(書家)가 누워있으니 후생들아 감히 이 무덤을 훼손하지 말지어다.”

추사가 묘문으로 써서 당부한 창암의 묘가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 1047-17에 있다. 자주 엉뚱한 곳에다가 좌표를 찍는 네이버 지도가, 어쩐 일인지 이삼만 묘는 정확한 위치로 데려다준다. 아, 그리고 지금 이삼만 묘 앞의 묘비 글씨는 추사의 것이 아니다. 추사가 썼다던 묘비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

# 목숨을 걸고 거둔 성인의 시신

창암 이삼만 못잖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명창 권삼득의 생가와 묘도 완주 용진면에 있다. 권삼득은 300년 전에 살았던 판소리계의 거장 중 거장. 그의 본명은 ‘삼득’이 아니라 ‘정’이었는데, ‘삼득(三得)’은 사람 소리와 새소리, 짐승 소리 등 세 가지(三) 소리를 모두 터득(得)했다고 해서 붙여진 예명이었다.

판소리 수련을 위한 초인적 노력과 그가 이룬 성취나 영향력만으로도 매력적인 인물이지만, 권삼득이 특히 더 감동적인 건 유교 사회의 철저한 신분체제 속에서 양반 출신으로 천민예술 판소리에 뛰어들어 당대 최고의 명창 자리까지 올랐다는 점이다. 양반의 신분으로 저잣거리에서 소리를 하는 광대가 되고자 했던 그를, 가족들은 가문의 수치로 여겼다. 그의 이름을 호적에서 팠고, 심지어 그를 죽이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열정은 꺾이지 않았다. 피나는 수련 끝에 어전 명창 자리까지 오른 그의 빛나는 성취는 그래서 더 감동적이다.

권삼득의 묘는 찾기 쉽다. 작은 절집 작영사(완주군 권삼득길 67)를 찾으면 경내에 권삼득 묘로 이어지는 나무 덱과 안내판이 있다. 권삼득 묘 아래에는 ‘소리굴’이라 부르는 작은 동굴이 있는데, 매미 형상을 한 지세의 입(口) 자리로 거기서 소리가 들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번에는 완주에서 다 못 따라간 인물 이야기. 완주에는 대표적인 천주교성지 천호성지가 있다. 꼭 천주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고요하고 차분한 분위기만으로도 충분히 사람들의 발길을 불러모으는 곳이다. 천호성지는 기해박해를 전후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들어온 이들이 신앙공동체를 이뤘던 곳이다. 이곳에는 병인년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네 명의 성인과 열한 명의 순교자가 묻혀있다.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서 그랬을까. 천호성지에서 마음을 붙잡은 인물은 참수당한 성인의 시신을 목숨을 걸고 손수 거뒀다는 말단공무원(향리) 오사현과 그의 아들 오순보였다. 이들 부자는 천주교 신자도 아니었다. 오사현은 천주교 신자들의 교우촌 인근에 살았다. 향리 신분으로 천주교 신자를 보면 마땅히 관아에 신고해야 했지만, 그는 선한 이웃이었던 신자들을 고발하지 않았다. 신자들이 붙잡혀갔을 때도 전주 감영까지 올라가 구명운동을 펼쳤다. 신자들이 참수를 당하자 오사현은 아들 순보와 함께 형장으로 달려가 순교자들의 잘린 머리와 몸을 맞추었고, 나흘 뒤에 마포 여섯 필과 부들자리 열 개, 일꾼 열두 명을 사서 형장으로 가서 장사를 지내줬다. 종교가 없이도 그는 위험을 무릅쓰며 도리를 지켰다.

죽음으로 종교를 지킨 순교자의 죽음은 성지에 조성된 묘역에 남아 믿음을 증거하고 있지만 그들의 죽음을 거둔 오사현과 오순보의 자취는 없다. 훗날 천주교에 귀의했다는 이야기만이 다만 흐릿하게 전해질 뿐이다.

# 대둔산을 보는 자리, 옥계천을 보는 시간

보는 여행이 아니라, 읽는 여행을 제안했지만 봄날, 신록이 물드는 완주에서 여기를 보고 가지 않을 수 없다. 완주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보는 곳’ 몇 곳 얘기를 해보자.

완주에는 ‘호남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대둔산이 있다. 계절이 딱 맞기도 하거니와, 서울이나 수도권에서 출발하면 완주 땅으로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곳이니, 굳이 따로 작정하지 않아도 들고 날 때 자연스럽게 지나게 된다.

대둔산의 상징과도 같은 게 금강구름다리와 삼선계단이다. 금강구름다리는 바위와 바위 사이의 아찔한 협곡을 건너는 다리이고, 삼선계단은 급한 경사의 철계단이다. 기암과 벼랑의 아찔함으로 꼽을 때 둘째가라면 서운할 경관이다. 대둔산에는 산 아래에서 불과 5분 만에 7분 능선까지 데려다주는 케이블카가 있지만 그렇다 해도 협곡 사이로 이어지는 가파른 경사의 산행은 쉽지 않다.

산을 즐기려면 산행이 답이지만, ‘보고 읽는 여행’의 즐거움도 못지않다. 대둔산 아래에 뒤로 멀리 물러나 대둔산의 경관을 두루마리 그림처럼 보는 자리가 있다. 대둔산의 병풍 같은 암봉을, 수묵담채로 그린 한 폭의 그림으로 마주하는 자리다. 그 자리가 바로 기당천 물길을 끼고 있는 천변의 ‘한둔정원’이다. 둘레길을 조성하면서 꾸민 정원이라는데, 주변에 공사가 이뤄지고 있는 데다 근래에 손을 보지 않아 정원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할 지경이다. 정원에는 작은 정자가 하나 있는데, 거기 앉아서 보는 공룡능선을 닮은 대둔산의 파노라마 경관이 말 그대로 ‘백만 불짜리’다. 먹을 찍어 그린 듯한 이런 풍경은 ‘본다’는 표현보다는 ‘읽는다’는 쪽이 더 적절하게 느껴진다. 정원을 찾아가려면 내비게이션이나 포털사이트 지도에 대둔산 아래 산북리 ‘심포니교회’를 찍고 가서 거기서 물길을 끼고 300m쯤 걸어 올라가면 된다.

대둔산에서 나와 완주읍 쪽으로 방향을 잡아 국도를 달리다가 옥계천 물길로 내려서면 광두소마을이 있다. 대둔산 못잖은 기암으로 이름난 천등산 아래 옥계천 맑은 물을 끼고 들어 앉은 마을은, 오래전 시골 마을의 누추하되 평화로운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마을의 빈터에는 노랑괴불주머니가 무더기로 꽃밭을 이뤘다. 이런 풍경이 새삼스러운 건 이곳이 머잖아 수몰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을 아래 옥계천 하류 쪽에서는 저수량 650만t의 댐 공사가 한창이다. 수몰을 앞둔 광두소마을 스물아홉 가구 중 이제 남은 건 열 가구 남짓. 댐 공사가 끝나고 물을 가두기 시작하면 남은 주민들도 도리없이 떠나야 한다. 그때가 되면 옥계천의 물길과 광두소마을도 물속에 잠기겠다. 곧 사라질 풍경이어서, 그래서 이야기로만 남게 될 공간이어서…. 그게 지금 그곳에 가야 하는 이유다.

■ 완주 봉동의 국수 맛

완주 봉동은 생강 산지로 이름난 곳이지만, 봉동시장은 생강보다 국수로 더 알려졌다. 봉동시장의 음식점은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국수를 파는 집이고, 다른 하나는 국수를 팔지 않는 집이다. 그럴 정도로 시장에 국숫집이 많다는 얘기다. 할머니 국수, 우리국수, 장터국수, 시장통할멈국수, 아줌마국수…. 멸치 국물에 말아내는 잔치국수가 주종이다. ‘할머니국수’와 ‘우리국수’가 가장 인기 있다.

완주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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