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명률 1위' 멕시코에서 살아내는 방법
1년 전 일기를 들춰본다. 코로나바이러스라니, 처음에 멕시코 사람들은 웃었다. 코로나 맥주가 흔한 나라이다 보니, 사람들은 맥주를 마실 때마다 바이러스 이름을 소환했다. 더러 재빠른 사람들은 가게 이름을 코로나바이러스로 명했고, 빵집들은 코로나바이러스 형체를 모방한 빵을 만들어냈다. 그 시절, 그렇게 멕시코 곳곳에서 코로나바이러스가 희화화되었다.
사실 2020년 1월과 2월 아시아 국가들뿐 아니라 유럽과 미국에서도 코로나바이러스가 심각하게 퍼지고 있었지만 멕시코에서는 아프리카의 에볼라바이러스만큼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미국과 국경을 맞댄 멕시코 북부 지역에선 당연히 감염자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지만 그보다 더 흉흉한 일들이 빈발하는 변방의 소문에 묻혀버렸다.
지난해 2월28일 첫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그간의 느긋하던 분위기가 일순간 사라졌다.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첫 확진자가 발생하자 TV 채널들은 마치 ‘가능하다면 최대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자’고 결심한 듯 방송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공포영화에나 나올 법한 배경음악이 뉴스에 깔렸고 소식을 전하는 앵커들의 목소리에서도 과장된 공포감이 배어 나왔다. 통제가 어려운 전염병인 이상 어쩌면 시민을 공포에 가두는 것만큼 좋은 방역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로부터 닷새 후 내가 사는 주에서도 확진자가 나왔다. 동선 추적과 확진 순서대로 넘버링되는 ‘환자 번호’는 당연히 없었다. 감염자를 병원에 이송하거나 자가격리하는 모든 과정도 방역 당국 대신 가족이 담당했다. 그리고 그 가족들은 평소와 전혀 다름없이 생활했다. 이미 한국 뉴스를 통해 확진자 동선 추적과 역학조사 그리고 순차적 번호를 매겨가며 감염 연결고리를 찾고 밀접접촉자를 격리하는 방역 시스템을 선행학습한 나는 멕시코 뉴스를 들을 때마다 조금씩 ‘멘탈’이 붕괴되어갔다. ‘차라리 한국 뉴스를 보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즈음 직장 동료들의 주 관심사는 마스크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마스크를 구한 사람은 없었다. 일순간 이 세상의 모든 마스크들이 감쪽같이 사라진 듯했다. 주변에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는데, 그 어디에서도 마스크를 구할 수 없었다. 도대체 그 흔하던 마스크가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몹시 궁금했다. 어쩌다 인터넷에서 판매된다는 마스크 한 장 값은 내 하루 임금의 20~30% 수준이었다. 누군가에게는 하루 임금을 훌쩍 넘어서는 돈이었다.
바로 위에 있는 미국에선 마스크 대신 화장지가 자취를 감췄다는데 내가 사는 마을에는 어느 가게에나 화장지가 그득그득 쌓여 있었다. 그때 깨달은 바가 있다. 사재기도 잘사는 나라, 혹은 잘사는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라는 걸. 커다란 쇼핑 카트에 물건을 가득 쟁여 전투를 치르듯 코로나19와의 한판 싸움에 대비하는 것도 먼 나라의 돈 있는 사람들에게나 가능했다. 근근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확진자 숫자는 매우 더디게 증가했다. 3월18일 첫 사망자가 나오기까지 하루 평균 10명이 되지 않았다. 인구 1억3000만명의 나라에서 하루 겨우 열 명이라니, 그렇다고 방역 지침이 철저한 나라도 아니었기에 과연 검사가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의구심이 들었다. 더딘 증가에 사람들은 안도했지만 이미 코로나19와 전면전을 치르고 있던 한국 뉴스에 길들여진 나는 이곳 멕시코에서 혼자 의심병 환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감염은 평등해도 죽음은 불평등했다
3월16일 멕시코와 한국을 잇는 항공기 운항과 우편서비스가 잠정 중단되었다. 한국에 갈 생각은 없었으나, 막상 항공기 운항과 더불어 우편서비스까지 중단되니 고립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바로 그날 우리 마을이 봉쇄되었다. 소속이 어딘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중무장한 채 마을 입구를 차단하고 출입을 통제했다. 그렇게 나는 멕시코 어느 시골의 소읍에 갇혔다.
고국과의 차단으로 인한 고립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태평양 너머에 있는 한국은 고사하고 당장 마을을 들고 나는 것이 큰일이었다. 당장 출퇴근이 문제였다. 다행히(?) 이틀 후인 3월18일에는 내가 사는 주 전체에 비상령이 내려지고 유치원부터 대학교에 이르는 모든 교육기관이 임시 방학에 들어갔다. 연구실에서 챙겨야 할 것들이 있었지만 나는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없었고, 학교 건물 역시 봉쇄되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긴박한 날들이었지만 그런 상황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딱히 없으니 오히려 마음은 편안한, 이상한 날들이었다.
그리고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이 사태의 끝을 알 수는 없다. 다만 그동안의 상황은 상상 밖으로 전개되었다. 그 와중에 내 삶 역시 예상 밖으로 흘러갔다. 1년에 대여섯 달을 밖에서 보내던 내가 마을 안에 갇혀버렸다. 초기에는 마을이 봉쇄되는 바람에 당연히 나가거나 들어올 수 없었지만, 이후로는 감염자와 사망자가 폭증하면서 선뜻 마을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점점 나갈 필요 자체가 사라져버렸다. 여전히 마을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있는 지금은, 필요가 사라진 건지 의지가 사라진 건지 잘 모르겠다.
내가 사는 마을과 주변 배후지엔 모두 2만7000명 정도 되는 인구가 산다. 2021년 3월 말 현재까지 누적 확진자가 320명 기록되었고 그중 46명은 사망했다. 전체 인구 대비 감염률이 1.2%이고 감염자 대비 치명률은 14%다. 검사자 대비 확진율은 50%를 넘어섰다. 확진된 사람들도 호흡곤란이 오지 않으면 병원에 갈 수 없었으며 병원에 간 사람들은 두 명 중 한 명이 사망했다. 물론 공식 수치일 뿐, 비공식적으로는 이보다 더 나쁘면 나빴지 좋지는 않을 것이다.
멕시코 전역에서 2020년 3월18일 한 명이었던 사망자는 1년 뒤 23만3000명을 기록했다. 누적 확진자는 220만명이다. 대통령을 비롯해 각 부처 장관들과 각 주 주지사들 태반이 감염되었다. 한때 세계 최고 갑부로 등극했던 멕시코 기업인 카를로스 슬림도 이를 피하지 못했다. 권력을 가진 자나 돈을 가진 자들의 감염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그 둘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적이 놀라워했고 한편 안도했다. 그런 뉴스들이 전해질 때면 평생 돈과 ‘백’을 가지지 못했던 우리 마을 사람들도 묘한 위로를 받는 듯했다.
다만 죽음은 달랐다. 같이 코로나19에 감염되어도 돈이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살아남고 돈이 없는 사람들은 대부분 죽었다. 지난해 12월 전국적으로 산소가 동나 대란이 일고 당장 산소를 구해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빈 산소통을 들고 거리 곳곳을 헤매고 다닐 때, 어떻게라도 산소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살았고 산소를 구하지 못한 사람은 죽었다. 엄청난 돈을 주고라도 사설 병원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살아남았지만 호흡곤란이 와서야 공공병원에 간 사람들 상당수는 걸어서 병원을 나오지 못했다. 같은 감염자라도 죽음은 돈도 ‘백’도 없는 사람들부터 집어삼켰다.
죽음뿐이겠는가. 멕시코에서는 지난해 3월20일을 기점으로 전국의 모든 교육기관이 폐쇄되었다. 6월이 되어서야 학기가 재개되고 급히 비대면 수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인프라와 플랫폼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교사나 학생이나 주먹구구식일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이 안 되는데 비대면 수업이라니! 지난해 9월 이후에는 연방 교육국이 공중파 채널들과 합의하여 총 4개의 방송사에서 교육용 방송을 송출하고 있지만 난시청 지역이거나 집 안에 TV가 없다면 수업 청취 자체가 불가능하다. 가족 중에 학생이 있지만 집 안에 TV가 없는 가구수가 100만을 넘어선다.
설령 수업을 받을 수 있다 해도 숙제 제출이나 시험, 그리고 수업 외 활동에 대한 참여에는 한계가 분명하다. 멕시코 초등학생들의 경우 35%만이 적절한 수준의 인터넷과 컴퓨터를 갖춘 것으로 조사된다. 나머지 65%는 비대면 수업 방식에서 완전한 참여가 불가능하다. 결국 그들은 점점 기울어지는 교육이라는 판에서 불리한 쪽으로 밀리게 되고, 이 상황이 계속된다면 어느 순간 판 밖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규모 실업 역시 심각하다. 지난해 4월과 5월, 강도 높은 자택 격리가 시행되면서 일시적으로 일자리 1250만 개가 사라졌다. 이후 900만 개 일자리는 복구되었으나 나머지 350만 개는 여전히 누군가의 실업으로 기록되어 그들의 삶을 옥죄고 있다. 그들의 자녀라면 학업 포기에 더욱 쉽게 노출된다. 교육비가 비싸서가 아니라 나이가 어려도 당장 스스로 하루 먹을 것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멕시코 학생 10명 중 1명이 코로나19가 직간접 원인이 되어 학업을 중단했다.
올해 3월 마지막 주, 코로나19 감염으로 인한 하루 평균 사망자 수는 520명이었다. 불과 한두 달 전까지만 해도 하루 평균 사망자가 1200~1300명에 이르렀으니 지금은 오히려 희망을 가질 만한 시기인지도 모르겠다. 멕시코에서도 백신접종을 시작했으니, 올해가 가기 전에 ‘정상 생활’로 돌아갈 가능성도 있다.
나는 마을 밖으로 나갈 것이고, 1년 넘게 닫힌 학교 문도 열릴 것이다. 마스크가 사라지고 어쩌면 만날 때마다 서로가 끌어안고 양 볼에 뽀뽀하는 인사법이 부활할 수도 있겠다. 지난한 코로나19 시절을 견뎌오면서 크고 작은 상처가 한두 개쯤 없는 사람이 드물겠지만, 막상 정상적인 시절이 도래한다면 그동안의 고난을 깡그리 잊게 될지도 모른다.
정부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은 사람들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한마디쯤 할 수 있는 어떤 공통 이야깃거리를 가지게 될 수도 있다. 각자가 코로나19의 시절을 보낸 곳에서 겪었던 1년 혹은 2년, 결코 바라지 않는 바이나 어쩌면 3년 혹은 4년간의 에피소드 하나쯤은 아무리 대화의 기술이 없는 사람이라도 툭 던져놓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겪은 코로나19 시절이란, 결국 아주 작은 행정구역에 불과한 우리 마을로 한정될 것이다. 초창기에는 정보가 없어서 더러는 페스트, 더러는 말라리아일 것이라고 의견이 분분했던 코로나19에 마을 사람들이 감염되었고 그중 일부는 사망했다. 많은 가게가 닫혔고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그토록 좋아하는 파티도 사라졌다. 부활절, 어머니의 날, 독립기념일, 마을 축제, 죽은 자의 날, 그리고 무엇보다 1년간 모은 돈을 다 써야 직성이 풀리는 성탄절 축제도 사라져버렸다.
확진자에 대한 보건 당국의 ‘넘버링’이 없었으니 확진자가 발생할 때마다 사람들은 어디 사는 아무개의 이름을 대며 신에게 기도했다. 우리 마을에선 코로나19 감염 사실이 딱히 숨겨야 할 비밀이 아니었다. 어쩌다 감기에 걸리듯, 어쩌다 코로나19에 감염된 것일 뿐이었다. 기피 대상이 아니라 마을이 힘을 합해 도와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어쩌면 이름 대신 환자 번호를 쓸 필요가 애당초 없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감염 순서와 경로를 추적할 역량과 기술도 없었을 것이다.
여전히 마을의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학교 문은 굵은 쇠사슬에 묶여 꽁꽁 닫혀 있다. 집에 갇힌 학생들 가운데 일부는 어찌어찌 컴퓨터와 인터넷에 능한 ‘부모 찬스’ 혹은 ‘형과 누나 찬스’를 써가며 비대면 수업을 따라가는 듯하다. 더 많은 학생들은 ‘유급을 맞게 되면 유급을 맞으리라’ 하는 심정으로 그럭저럭 맘 편히 생활하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유급이 학교생활 중 일상의 한 단면으로 존재하는 나라에서의 여유인지도 모르겠다. 이 나라 사람들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비정상적이면 비정상적인 대로 살아간다. 그 누구도 모든 상황이 ‘반드시’ 정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지난 1년간 멕시코 사람들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불편함이 많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 앞에서 화를 내는 사람은 드물었다. 심지어 정부나 보건 당국의 어설픈 대처에 대해서도 너그럽게 ‘누군들 잘하고 싶지 않겠는가’라며 오히려 측은지심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정부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기 때문에 실망도 크지 않았다. 두려움과 실망과 분노 대신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들을 찾아 나섰다. 마을이 봉쇄되고 그 안에 있던 학교와 교회와 헬스장이 닫히면서 어른과 아이들은 자연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더 많이 웃었다. 서로의 불안과 아픔을 보듬으면서.
그러니 언젠가 내가 겪은 코로나19 시절을 이야기할 기회가 온다면, 지극히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정상적인 삶을 살아내고자 했던 이곳, 멕시코 중서부 작은 시골 마을 사람들의 삶의 내공에 대해 말하고 싶다.
림수진 (멕시코 콜리마 주립대학 교수)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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