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죽음을 넘어선 헌신과 사랑

최윤필 2021. 4. 15.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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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도르 슈트라우스(Isidor Straus, 1845.2.6~ 1912.4.15)는 뉴욕 메이시(Macy) 백화점을 경영한 독일 출신 유대인 사업가다.

동생과 함께 백화점 지하에 도자기, 그릇 매장을 열어 큰 성공을 거둔 뒤 당시 세계 최대 백화점이던 메이시를 인수하기까지의 성공담도 주목할 만하지만, 보건과 교육 등 서민 복지에 헌신한 자선가로서의 삶도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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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 이시도르- 이다 슈트라우스 부부의 사랑
뉴욕 브롱크스 우드론 공동묘지의 이시도르-이다 슈트라우스 부부의 묘. 위키피디아

이시도르 슈트라우스(Isidor Straus, 1845.2.6~ 1912.4.15)는 뉴욕 메이시(Macy) 백화점을 경영한 독일 출신 유대인 사업가다. 동생과 함께 백화점 지하에 도자기, 그릇 매장을 열어 큰 성공을 거둔 뒤 당시 세계 최대 백화점이던 메이시를 인수하기까지의 성공담도 주목할 만하지만, 보건과 교육 등 서민 복지에 헌신한 자선가로서의 삶도 돋보였다. 이시도르는 1894년 뉴욕 연방 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정치를 시작하는가 했지만, 1년 잔여 임기만 채우고 재선 출마를 포기, 교육·복지사업에 몰두했다. 그 많은 일들을 그는 1871년 결혼한 아내 이다 슈트라우스(Ida Straus, 1849~1912)와 함께 이루었다. 부부는 각별한 금실을 과시하며 7남매를 두고 해로했다.

1912년 유럽 여행을 함께 한 그들 부부가 돌아오는 배를 평소처럼 독일 여객선 대신 타이타닉호를 예약한 것은, 첫 출항하는 그 배의 명성이 워낙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출항 나흘째인 4월 14일 밤 11시 40분, 배는 빙산과 충돌해 빠르게 침몰했다. 부부는 각각 하인들의 안내를 받아 제8호 구명보트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이시도르는 그 경황없는 와중에 배에 남은 한 젊은이에게 자기 자리를 양보하며 '젊은이가 살아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아내 이다도 '당신이 그러겠다면 나도'라며 함께 구명선에서 내렸다. 이다는 자신의 모피 코트까지 벗어 하녀에게 주며 "이제 내겐 필요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 하녀 등 살아남은 승객들은 기우는 배 갑판 위에서 의연히 손잡고 서 있던 노부부의 마지막 모습을, 저 일화와 함께 증언했다.

이다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유족은 사고 해역의 물을 담아 뉴욕 브롱크스의 부부 묘역에 함께 묻으며 구약 아가서의 '솔로몬의 노래' 한 구절을 묘비에 새겼다. "아무리 큰 물도 사랑은 끌 수 없고, (...) 사랑을 잠기게 하지 못하리니"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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