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주폭 방지법

김태훈 논설위원 2021. 4. 15.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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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도시국가 스파르타 시민들은 연회장에서 노예에게 만취하도록 술을 줬다. 평소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니였다. 취하면 얼마나 추해지는지 보고 비웃기 위해서였다. 시민들은 포도주를 물에 희석해 마셨다. 로마에선 음주의 목적을 네 단계로 나눴다. 첫 잔은 갈증을 풀기 위해, 둘째 잔은 영양을 얻기 위해, 셋째 잔은 유쾌해지기 위해 마신다. 넷째 잔은 발광(發狂)하기 위해 마신다. 넉 잔 이상은 마시지 말라는 얘기다.

▶이 기준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발광하기 위해 마시는 나라다. 소주 기준으로 1인당 연간 15병을 마신다. 마트에서 파는 소주 360㎖ 한 병 가격이 대개 1500원을 넘지 않는다. 단돈 1달러로 만취가 가능한 나라다. 너도나도 부담 없이 술을 마신다. 술 마시는 성인이 600만명을 넘나든다. 다음 날 술 냄새 풍기며 출근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영국 속담에 ‘주신(酒神) 바쿠스는 군신(軍神) 마르스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다’는 말이 있다. 전쟁 나서 죽는 사람보다 술로 인해 죽는 사람이 더 많다는 얘기다. 음주로 인한 사회·경제적 피해가 연간 10조원에 육박하는 우리나라가 여기에 해당한다. 엽기적 범죄와 성적 일탈 현장에 늘 빈 소주병이 나뒹군다. 대검찰청이 2018년 살인·강도·강간·절도·방화 사범을 조사했더니 술 취해 저지른 범죄가 전체의 34%를 넘었다. 공무집행방해자의 71%가 주폭(酒暴)이라는 조사도 있다.

▶2012년 조선일보와 경찰이 손잡고 주폭 퇴치 캠페인을 벌였다. 100일간 관련 사범 300명을 구속했더니 살인 31%, 강도 37%, 강간 6%가 줄었다. 사람들은 세상이 달라졌다고 했다. 서울경찰청장으로 당시 주폭과의 전쟁을 지휘했던 김용판 의원이 ‘주폭 퇴치법’ 발의를 추진하고 있다. 주폭과의 전쟁 이후 술에 취해 저지른 범죄의 형량을 줄여주지 말자는 사회적 공감대도 형성됐다. 이번 법안은 거기서 더 나아가 술 마시고 범죄를 저지르면 반드시 처벌한다는 내용이다. 상습범 가중처벌 조항도 뒀다.

▶지금도 술에 취해 행패 부리다가 경찰에 신고된 사람의 76%가 훈방된다. 서구권에선 상상할 수 없는 관대한 처분이다. 미국에선 마개를 딴 술병을 들고 거리를 배회하는 것 자체가 경범죄에 해당한다. 길거리에서 취한 상태로 있으면 수갑을 차고 체포된다. 우리도 술에 너그러운 사회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 이번 법안에 국가의 음주 범죄 예방 노력을 의무 조항으로 둔 것도 그런 취지다. 주폭이란 말 자체가 없어지는 사회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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