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제작 똑같은데 왜 작가만 프리랜서인가"

손가영 기자 2021. 4. 14.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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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협한 노동자성 판단 기준 질타, "'일하는 사람=근로자' 추정해야" 제언… 판정 확장 가능성엔 기대

[미디어오늘 손가영 기자]

지난달 방송작가 노동자성을 인정한 중앙노동위원회 판정을 평가하는 토론회에서 “이제 노동자성 입증 책임은 사용자에게 지워야 한다“는 법·제도 체계의 전환이 촉구됐다. 사용자가 우월한 지위로 노동자성을 부정할 근거를 용이하게 만드는 사례가 만연한데다 '일하는 사람' 누구나 사용자에 의존해 통제받으며 일한다고 보는 게 지금 사회·경제적 구조에 부합한다는 지적이다.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지부장 김한별)는 14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방송작가도 노동자다”란 제목의 토론회를 열고 지난달 3월19일 중노위 판정의 의미와 남은 과제를 다뤘다. 이 사건 노동자측 대리인 김유경 노무사(돌꽃노동법률사무소)와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이 관련 주제를 발제했다. 권오성 성신여대 교수, 김경민 고용노동부 근로감독기획과 사무관, 김우석 방송통신위원회 지상파방송정책과장, 김한별 지부장이 토론에 참여했다.

김 노무사는 판정 의미로 “'작가=프리랜서 창작자'란 도식을 타파했다”고 밝혔다. 초심(서울지방노동위원회)은 작가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된 선례가 없다거나 '원고 작성 자체는 작가의 창작 결과물'이라는 고정관념에 기댄 반면 중노위는 작가의 근로 실질을 숙고했다는 지적이다.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지부장 김한별)는 14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방송작가도 노동자다”란 제목의 토론회를 열었다. 사진=방송작가지부

중노위는 심리 과정에서 과거 MBC 시사프로그램 '뉴스 후' 제작 PD들이 노동자성을 인정받은 2014년 대법 판례를 주요하게 따졌다. 당시 MBC는 제작 PD들이 '프리랜서로서 방송사와 위임 계약에 따른 협업관계를 맺었을 뿐'이라고 밝혔으나 대법원은 “업무 과정을 보건대 (방송사 관여는) 결과물에 대한 사전적 요구, 사후적 평가나 건의 수준을 넘어 일상적이고 지속적이었다”며 PD들 손을 들어줬다. 중노위원은 “이 판례가 방송작가에게 적용될 수 '없는' 이유”를 MBC 측에 여러 차례 물었다.

김 노무사는 이에 “직종 불문 '방송에 종사하는 자'들에겐 공통으로 적용될 수 있는 업종의 특수성이 있으며, 이는 사용자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부정할 수 없는 노동자성 인정의 가장 강력한 징표라는 점을 재확인했다”며 “'프로그램 제작'이라는 목표를 위해 단순 '협력' 이 아닌 '협업'을 통해 노동력을 제공하는 다양한 직종의 '무늬만 프리랜서들'에게 이번 판정 근거들이 적용될 수 있는 길도 열어줬다”고 평했다.

김한별 지부장은 작가 노동에 대해 “모든 TV 프로그램은 방송사 정규직의 승인이 이뤄지고 난 뒤에야 송출되며, 당연히 이 과정에서 정규직의 지시를 받는다”며 “이 과정은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이는 방송작가가 제작 현장에서 자유로운 창작을 하는 게 아니라 정규직 지휘 아래 업무를 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나아가 “커피 대접 등 출연자 의전, 주차 등록, 출연료 정산 내역 정리까지 PD 일을 대신하기도 하는데 이런 방송 제작의 세밀한 부분에서 작가가 해야 할 일인지, PD의 일인지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업무가 많다”고 덧붙였다.

김 지부장은 “기자의 기사 작성과 피디의 프로그램 편집, 방송작가의 원고 작성은 콘텐츠 제작 측면에서 전혀 다를 바가 없지만 기자와 피디는 정규직, 작가는 프리랜서로 당연히 간주된다”고도 꼬집었다. 김 지부장은 이와 관련 '기자 역시 업무에 대한 독립성과 자율성을 일정 부분 보장받지만 언론사와 상급자의 지휘 권한에 종속돼 있다'는 한 취재기자의 지적을 예로 들었다.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지부장 김한별)는 14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방송작가도 노동자다”란 제목의 토론회를 열었다. 사진=방송작가지부
▲토론회에 참석한 김한별 방송작가지부장. 사진=방송작가지부

작가=프리랜서? 기자·PD는 자유롭나

김 노무사는 “방송사에 종속돼 일한 사실이 명백함에도 작가가 이를 입증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며 노동자성 증명 책임의 전환을 남은 과제로 지적했다. 한 예로 방송사는 노동자성 입증 기준이 되는 계속성(근속 수준)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이 사건 작가들은 같은 프로그램에 10년 근속했는데 MBC 측은 '업무 숙련도와 전문성이 높아 사용자가 수정을 지시할 일이 거의 없었다'는 근거로 삼았다.

이와 관련 권오성 교수는 “현재 타인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통제와 경제적 의존으로 특징 지어지는 관계 속에서 일한다”고 단언했다. 일하는 사람에게 '노동자임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현재 법 관행은 “이들이 기본적으로 근로자가 아니라는 가정을 전제로 하는데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 일반화되기 전에 타당했을 뿐 지금은 아니”라며 “대부분의 생산활동이 기업에 의해 이뤄지는 지금 상황에서 '일하는 사람의 규범적 기본값이 근로자가 아니라는 18세기적 가정'은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권 교수는 “일하는 사람의 규범적 기본값을 '근로자'라고 추정하고, 이를 깨뜨리고 싶은 당사자에게 반증 책임을 부담하는 것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 일상화된 지금 사회경제적 구조에 부합한다”고 설명했다. 그 방법 중 하나로 2006년 국제노동기구(ILO)의 고용관계 권고 11항을 들었다. 11항은 노동자성 판단과 관련해 “하나 이상의 (고용 관계가 존재한다는) 지표가 있을 경우 고용 관계가 존재한다고 법적으로 추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권 교수는 “위 '추정 조항' 도입에 관한 입법을 적극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나아가 지금 근로기준법상으로도 노동자가 사용·종속 관계를 입증해야 한다는 해석은 도출되지 않는다고도 주장했다.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했다'는 객관적 사실만 입증하면 되는데, 이 근로 제공 요건에 사용·종속 관계까지 입증해야 한다고 해석하는 건 지금 법 관행일 뿐이라는 지적이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은 “방송작가 노동 과정 인터뷰 내용을 보면 사실상 전일제로 종속돼 일하는 이들이 많았다”며 “이들이 프리랜서라면 방송업에 프리랜서가 아닐 업무는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김 부소장은 방송작가 노동문제 개선 방향으로 10가지 세부과제를 제안했다. 고용 문제에 있어선 △사실상 노동자로 일하는 작가들의 노동자성을 검토하고 △프로그램이 일방적으로 종료될 시 남은 계약 기간이나 업무 부여 방식을 개선하고 △표준계약서 체결을 의무화해야 한다고 짚었다. 노동환경 개선과 관련해선 △노동가치가 반영된 원고료·기획료·재방료 산정, △경력증명서 발급 방식 개선, △최소한의 휴식·휴게 시간을 보장하는 제작환경 조성 등을 지적했다. 이를 위해 주요 방송사와 유관 정부부처,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초기업 단위의 노사정 협의체'를 구성해 구체적인 이행 방안을 짜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와 관련 방송통신위원회는 비정규직 처우개선의 일환으로 모든 지상파 방송국에게 매년 4월 계약직·파견직·프리랜서 등 비정규직 인력 현황을 제출케 했다. 김우석 방통위 지상파방송정책과장은 “4월 비정규직 인력 현황 제출을 앞두고 지난 2~3월 간 언론노조 등에 자문을 구해 실질적인 실태 조사가 이뤄질 수 있게끔 제출 양식을 정했다”며 “방통위는 사실사 방송사업 인·허가권을 가진 기관으로 정책적 수단밖에 없지만, 현황 파악 등을 통해 점진적으로 방송사가 노동 환경을 개선할 수 있게끔 유도해낼 것”이라고 밝혔다.

김경민 고용노동부 사무관은 이번 판정에 “실제 중노위 조사 과정에서 방송업계의 특징을 충분히 고려해 판정한 것 같다. 작가가 일부 재량권을 갖고 있어도 PD의 상당한 지휘·감독 있었다는게 핵심 징표가 됐다”며 “사실상 근무 시간, 장소를 방송사가 정한 사실과 장기간 근무한 계속성 등도 인정됐다. 관련 판례에 충실한 판정이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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