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창경원 벚꽃놀이, 꽃 아닌 사람구경일세

2021. 4. 14.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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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지난 3월 24일부터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1922년 관측이 시작된 이래 가장 빠른 벚꽃 개화다. 서울의 벚꽃 개화 여부는 종로구 서울기상관측소에 있는 왕벚나무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올해는 2∼3월 평균기온이 평년보다 높고 강수량이 많아 일찍 피었다. 벚꽃 구경은 100여년 전 우리의 가장 큰 꽃놀이였다. 그 시절 꽃구경을 한번 따라가 보자.

1913년 5월 3일자 매일신보에는 '이강공(李堈公) 전하 관앵(觀櫻)'이란 제목으로 "5월 3일 이강공 전하께서는 관앵차로 우이동에 출왕(出往)한다더라"는 짤막한 기사가 보인다. 그 시절 벚꽃 구경을 '관앵(觀櫻)대회'라 불렸다. 민간 뿐 아니라 이처럼 왕실에서도 벚꽃 구경을 다닌 기사가 자주 나온다. 이강공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義親王) 이강을 말한다.

이후 벚꽃놀이는 3·1운동 이후 부임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 의해 전국적 놀이로 확산됐다. 사이토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통해 조선이 근대화·문명화하였다는 점을 선전하고자 벚꽃놀이를 권장했다. 매일신보사 등 언론기관과 관변단체들이 주도했다. 당시의 벚꽃놀이 명소는 서울의 우이동, 노량진 봉산(鳳山)유원, 창경원(현재의 창경궁), 경기도의 수원, 개성, 월미도 등이었다. 후에 청주, 마산, 동래 등 전국에서 벚꽃놀이가 성행했다.

이 중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수원관앵대회가 유명했다. 1920년 첫 개최되어 1923년까지 계속됐다. 매일신보사는 1920년 4월 25일을 수원관앵대회 날로 정한 후 총독부 철도국과 협의하여 임시열차를 편성해 관관객을 실어날랐다. 사람들이 도착하면 불꽃놀이 등 환영행사도 열었다. 코스는 수원 도착 후 권업모범장으로 이동하여 벚꽃을 감상한 후 서호로 이동하여 자유시간을 갖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창경원 '밤 벚꽃놀이'도 장안의 화제였다. 일제는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바꿔 1909년 11월 개장했다. 창경궁 건물을 허물고 곳곳에 벚꽃 2000주를 심었다. 창경원 밤 벚꽃은 장안의 명물이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1936년 창경원 밤 벚꽃 관람객은 84만명에 달했다.

1920년대 각 언론매체들은 이같은 벚꽃놀이를 주요 기사로 다루었다. 다음은 1920년 4월 26일자 조선일보에 게재된 '꽃 지는 공일날, 한양의 봄 작별, 꽃 있는 곳에 물밀 듯'이란 기사다. "우이동 가는 임시 관앵열차 인원은 남대문에서 670명, 용산에서 350여명, 왕십리와 청량리에서 각 60명 합하여 거의 1200명 가량인데, 단체로는 상업은행도 참가하였으며, 창동역에서 우이동까지 가는 사이에는 거의 길이 안 보일 만치 사람이 답지(遝至)했다. 장충단에도 사람이 한없이 모여들어 일대의 넓은 천지는 거의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더욱이 유민회에서는 40여명의 기생을 데려다가 고운 춤과 아리따운 노래를 부르게 하였으므로 한층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창경원만 하더라도 오후 3시까지의 입장자가 거의 1만명이 넘어 원내는 자못 꽃빛과 웃음으로 가득찼다. 탑골공원에는 항상 정오면 수십명씩 앉아있었는데, 다만 두 서너명의 청년 학생들이 지는 벚꽃 아래서 대수책(代數冊)을 들여다 본다."

1922년 4월 20일자 동아일보는 몇 곳의 꽃놀이를 소개하고 있다. "4월 26일은 송림산 수도저수지 근처에서 인천부청 관앵회가 있고, 27일 월미도에는 조선 매일신문 주최의 관앵대회가 있으며, 5월 11일에는 용산철도국 주최의 가족 관앵대회가 월미도에서 열릴 터이며, 그 외에 조선신문 지국 주최의 야앵(夜櫻)대회가 10일간 동공원(東公園)에서 열린다."

같은 달 28일자 동아일보에 '공주 산성공원 앵화 야경' 기사가 있다. "충남 공주 산성공원의 꽃들이 지난 15, 16일 양일간에 만개되어 그곳 전기회사가 수백 개의 전등을 앵화 가지에 가설했고, 양일 밤에는 군중이 수천에 달한 성황을 이루었더라."

봄 벚꽃놀이의 절정은 봉산유원의 관앵대회였다. 1921년 4월 19일자 매일신보에 잘 소개되어 있다. "지난 17일 아침 조선 기생 10여명, 일본 기생 60여명이 유흥을 준비하고, 사원 30여명이 운전해 아침 9시부터 수십 대의 자동차가 독자들을 행사장인 노량진 봉산유원으로 향하였는데, 신용산까지 전차로 와서 한강철교를 건너는 광경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수만명 군중으로 장관을 이루었다."

관앵대회는 학교에서도 행해졌다. 1921년 4월 28일자 매일신보에 '교정(校庭)에서의 관앵회'라는 기사가 게재되어 있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부속 보통학교에서는, 그 학교 뜰의 앵화가 만개함을 기회로 지난 26일 아동의 부형모제(父兄母弟)를 초대하여 관앵회를 개최하였는데, 아침부터 구름같이 모여드는 사람이 이미 정한 오전 10시가 됨에 무려 천여명에 이르렀는데, 10세 내외의 앵모(櫻貌; 벚꽃 모양)같은 소녀들의 아름다운 창가(唱歌)와 그 외 여러가지 기묘한 재주와 모든 기술적 물품을 구경한 후 오후 1시 되어 폐회하였다더라."

1920년 4월 11일자 동아일보에는 벚꽃놀이 기차 요금을 깎아주는 기사가 눈에 보인다. "양춘가절(陽春佳節; 따뜻하고 좋은 봄철)이 돌아오니 춥지도 덥지도 아니한 때가 되니까, 새로 지은 봄옷을 차리고 우이동이나 월미도로 꽃구경 가는 사람이 날로 늘어간다. 만철 경성관리국에서는 꽃구경 가는 손님의 편의를 돕기 위하여 임시열차를 운전할 터인데, 우이동으로 가는 부분을 소개하건대, 꽃 피는 기간(약 10일간)에는 할인 왕복권을 발매한다고 하더라."

세월이 흐르면 아름다운 꽃도 지는 법, 1942년 4월 23일자 신한민보에 벚꽃에 관한 한편의 시가 실려있다. "태극기에 떨어진 앵화/태양이 넘어가고 동풍에 우는 앵화 떨어져/태극기에 의지를 하려니까/인자한 동방선녀가 말 없이 웃더라."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보궐선거가 끝났다. 여야, 그리고 모든 국민의 마음에서 모두 꽃이 활짝 피어야 비로소 개화(開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 마음 속에 '행복의 꽃'이 개화했다고 생각되는 날이 꼭 오기를, 지는 벚꽃을 보면서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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