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극으로 표출되는 비극의 아이러니

장재진 2021. 4. 1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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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상상하기 힘든 비극을 다루되, 관객이 비탄에 빠져 한없이 침잠하게 두지 않는다.

원작보다 더욱 풍성한 극의 메시지와 더불어 예술성을 한 단계 끌어올린 지점은 비극과 희극이 절묘하게 교차하는 연출의 힘이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을 국립극단은 무대 위에서 실연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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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다음달 9일까지 명동예술극장 공연
국립극단의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에서 정영(오른쪽)이 조씨고아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려 주지만 처음에 조씨고아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갈등한다. 원작과 달리 각색된 설정이다. 국립극단 제공

감히 상상하기 힘든 비극을 다루되, 관객이 비탄에 빠져 한없이 침잠하게 두지 않는다. 눈물 나도록 절절하면서도 헛웃음이 터져나올 만큼 뜬금 없는 해학이 무대를 채운다. 국립극단의 대표작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하 조씨고아)'은 비극을 표현하는 방법론에 관한 이야기다.

극 줄거리는 명쾌하다. 도안고라는 원수로 인해 일족 300명이 몰살당한 조씨고아가 복수에 성공하는 구조. 하지만 주인공은 조씨고아가 아니다. 자신의 아이를 희생하면서까지 조씨고아를 보호하고, 20년간 원수의 밑에서 와신상담하는 시골 의사 정영(하성광 분)이다. '조씨고아'는 정영의 시각에서 펼쳐지는 삶의 기구함을 무대화했다.

20년에 걸친 복수를 끝마친 정영이 희생된 자들을 만나는 장면에서 삶의 허망함을 느낄 수 있다. 국립극단 제공

'조씨고아'는 중국 원나라 시대에 활동했던 작가 기군상이 쓴 고전 잡극이 원작이다. 구두로 전승돼 온 이야기였던 탓에 다양한 형태의 '조씨고아' 이야기가 존재한다. 통쾌한 복수를 중심으로 권선징악적인 유교 사상에 주목했던 중국 현지 공연들과 달리, 고선웅이 각색, 연출한 국립극단의 '조씨고아'는 복수 그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대신 복수 이후의 허망함을 통해 카르페디엠(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적 가치를 역설한다. 막이 내려가기 전 묵자(극 진행을 돕는 배우)의 독백이 대표적이다. "이 세상은 꼭두각시의 무대… 금방이구나 인생은, 그저 좋게만 사시다 가시기를."

원작보다 더욱 풍성한 극의 메시지와 더불어 예술성을 한 단계 끌어올린 지점은 비극과 희극이 절묘하게 교차하는 연출의 힘이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을 국립극단은 무대 위에서 실연해 냈다.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주체인 도안고는 어딘지 모르게 어리숙하고, 근엄해야 할 황제는 권위라고는 없는 풍자 대상으로 전락한다. 결정적으로 분노에 차 올라야 할 조씨고아마저 바보같은 연기로 관객을 헷갈리게 만든다. 곳곳에 등장하는 익살스런 대사들은 분명 재미가 있지만, 서사의 성격을 감안하면 괴리감이 든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을 돋보이게 만드는 요소는 해학적 연출이다. 배우들은 극중에서 개(왼쪽)나 말 등 동물을 연기하며 웃음을 선사한다. 국립극단 제공

이런 설정들은 얽히고 설켜 궁극적으로 비극성을 심화하는 연료가 된다. 고 연출은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유태인 귀도(로베르토 베니니)가 나치에 의해 수용소로 끌려가는 순간 아들을 향해 짓는 우스꽝스런 표정과 몸짓을 예로 들며 "더 없이 비극적인 순간 나타나는 희극적 표현을 통해 아이러니를 강하게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실제로 '조씨고아'에서도 정영은 자신의 갓난아이를 내동댕이 쳐서 죽인 도안고 앞에서 활짝 웃는다.

국립극단이 지난해 창단 70주년을 맞아 실시한 관객 설문조사에서 이구동성으로 '보고 싶은 연극 1위'에 오른 작품이다. 성원에 힘 입어 지난해 6월 무대에 올랐으나 코로나19 탓에 8회 공연에 그치고 조기 폐막했다. 올해는 다음달 9일 까지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다.

장재진 기자 blan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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