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갑질' 고덕동 아파트에 화난 택배기사들 "정문 앞에 둘테니 찾아가세요"

김민정 기자 2021. 4. 14.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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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상 탑차로 배송하는 건 지속 불가능하다. 무릎을 꿇고 물건을 나르다가 무릎에 굳은살이 생길 정도다. 오늘부터 단지 입구까지만 배송하겠다."

14일 오후 서울 지하철 5호선 상일동역 1번 출구 앞에 800여개의 택배 박스 더미가 쌓였다. 전국택배노동조합(택배노조)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택배 노동자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오늘부터 물품을 아파트 단지 앞까지만 배송하고 찾아오는 입주민 고객들에게 전달하겠다"고 밝혔다.

서울 강동구 고덕동의 A아파트 입주민들이 택배 차량의 지상도로 진입을 금지한 데 반발해 택배노조가 집 앞 배송을 하지 않겠다고 재차 선언했다. 총 5000가구 규모의 신축 대단지인 이 아파트 입주민들은 단지 입구까지 나와 배송물품을 찾아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전국택배노동조합 관계자들이 14일 단지 내 택배 차량 진입이 제한된 서울 강동구 고덕동의 아파트 단지 앞에 택배를 내려놓고 있다. /김민정 기자

택배노조는 이날 회견에서 "택배 차량의 진입 제한은 노동자에게 더 힘든 노동과 비용을 강요하는 것"이라며 "입주자대표회의는 지금이라도 책임을 지고 대화에 나서라"고 주장했다. 노조는 "지금의 갈등은 입주자회의가 실질적 당사자인 택배 노동자와 대화·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통보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강조했다.

A아파트는 이달 1일부터 택배 차량의 단지 내 지상도로 이용을 막고 손수레로 각 세대까지 배송하거나 제한 높이 2.3m인 지하주차장에 출입할 수 있는 저상차량을 이용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저상차량을 이용하지 않는 택배기사들은 아파트 정문에서 손수레를 이용해 택배 상자를 싣고 각 세대까지 배송해야 했다. 택배기사들은 저상차량을 이용한다고 해도 화물칸 높이가 낮아 안에서 물건을 나르려면 반복적으로 몸을 숙인 채로 작업을 해야 해 신체적 부담이 커진다며 강하게 반발해왔다.

택배기사들이 기자회견을 열기 전, A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는 "우리 단지는 지상으로 차량이 통행할 수 없도록 건축됐다"며 "택배회사에도 이같은 이유로 지난해 3월부터 수차례 지상운행을 자제하고 저상차량을 배차해 배송하도록 협조를 구했다"고 주장했다. 또 "아파트 입구에 택배를 쌓아두고 입주민들에게 찾아가라는 방식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택배노조는 이같은 입주자대표회의의 주장을 반박했다. 택배노조는 "이미 타 지역에서 저상차량을 이용해 배송한 기사들이 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이직하는 사태가 속출했다"며 "저상차량을 이용한 지하배송은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고 강조했다.

서울 강동구 고덕동의 아파트 단지 앞에서 전국택배노동조합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저상탑차에 물건을 싣고 나를 경우 몸을 숙인 채로 오르내려야 한다. /김민정 기자

입주자대표회의와 택배기사들간의 갈등으로 불편이 가중되면서 아파트 주민들의 의견도 엇갈리고 있다.

택배노조가 아파트 입구에 택배 수백개를 쌓아두자 아파트 입주민 장명섭(53)씨는 "택배기사가 단지 안에서 시속 10km 이하로 다니겠다고 주장해도 사고가 안 난다는 보장은 없다"면서 "이 아파트가 지어지기 전 모델하우스에 갔을 때부터 ‘차 안 다니는 아파트’라고 설명해 입주한 것"이라고 말했다.

어린 손녀와 함께 아파트 입구를 나오던 신모(64)씨는 "딸이 직장을 다니니 손녀 육아용품은 대부분 택배로 주문하는데, 입구와 거리가 먼 아파트 동이어서 물건을 다 가지고 가기도 힘들 것"이라며 "이 동네 주민 대다수가 아이들을 키우는 젊은 부부라서 아이의 안전을 생각하는 입장도 이해가 간다"고 말했다.

반면 아파트의 결정이 택배기사에게 부당한 처사라는 의견도 있었다. 이모(30)씨는 "아파트 지하주차장이 여러 동과 연결돼 지하로 배송한다고 해도 어려움이 클 것 같다"면서 "아이들이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가 있을 시간 동안 배송을 하는 식으로 지상으로 다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전국택배노동조합택배 관계자는 14일 서울 강동구 고덕동의 한 아파트 앞에서 고객에게 배송할 택배 물품을 단지 앞에 내려놓은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민정 기자

일각에서는 갈등이 해결되지 못하고 반복되는 이유는 주민들의 이기심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주민과 다른 방문자는 차량을 이용할 수 있으면서 택배기사만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이기적인 행동"이라며 "입주민과 택배기사가 적정선에서 합의하지 못하고 택배기사를 이 문제에서 배제한다면 주민이 불편함을 감수하는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병훈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도 "이해관계만 따질 것이 아니라 택배기사들의 노동을 보장하고 인정하는 주민들의 공감대가 필요하다"면서 "주민 다수가 택배기사들의 아파트 단지 내 출입을 꺼린다면 아파트 측에서 택배함을 아파트 동 앞에 설치하는 식으로 일정 장소에서 택배 물건을 찾아가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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