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화되는 이스라엘과 이란의 '그림자 전쟁'

정의길 2021. 4. 14. 16: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정의길의 세계만사]
이란 테헤란에서 13일(현지시각) 한 성직자가 쌍안경으로 라마단의 시작을 알리는 달을 관찰하고 있다. 테헤란/AP 연합뉴스

이스라엘과 이란의 ‘그림자 전쟁’이 격화되고 있다.

이스라엘이 핵을 개발하는 이란을 은밀하게 공격하고, 이란도 이스라엘을 보복 공격하는 ‘선전포고’ 없는 비공개 전쟁이다. 그림자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능력 획득을 저지하는 데서 더 나아가 이란을 지속적으로 고립시키려 하고 있다. 보복공격에 나서는 이란과의 분쟁을 격화시켜, 이란과 국제사회의 이란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 복원 회담을 무산시키려 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이란의 은밀한 상호 보복 공격

지난 11일 이란의 핵시설 나탄즈에서 핵물질을 정제하는 수천대의 원심분리기 등이 파괴되거나 손상됐다. 이란은 이 사건이 이스라엘의 ‘핵 테러’라고 규정했다. 이스라엘은 이를 공식적으로 확인하거나 부인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공영 라디오는 정보 소식통을 인용해,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사이버 작전’이라고 보도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란은 14일 우라늄 농축 순도를 20%에서 60%로 올리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이란이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 시절인 2015년 미국 등 국제사회와 체결한 핵합의에 위배된다. 이란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행정부가 2018년 이 핵합의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하자, 이 합의에서 규정된 우라늄 농축 순도(3.67%)를 초과해 올려왔다.

이스라엘 선박에 대한 공격도 일어났다. 이스라엘 선박들이 이날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연안에서 공격받아 피해를 입었다고 이스라엘과 아랍 언론들이 보도했다. 이스라엘 <채널12> 텔레비전은 익명의 관리를 인용해, “이란 소행”이라고 보도했다.

이스라엘에 대한 이란의 대응 보복은, 사실상 미국에 대한 경고다. 지난 6일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미국의 일방적 탈퇴 이후 처음으로 이란 핵합의 복구 회담이 열렸다. 이란 핵합의 복구를 최우선 외교 사안으로 내건 조 바이든 행정부에게 이란이 압박을 가했다는 분석이다.

이란의 핵개발 이후 이스라엘 공격 시작

이스라엘과 이란의 ‘그림자 전쟁’은 이란의 핵개발이 본격화된 2000년 이후부터 시작됐다.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일방적 공격이었다. 2010년 나탄즈 핵시설의 원심분리기 등이 스턱스넷이라는 웜바이러스를 이용한 해킹 공격으로 무력화된 것이 대표적이다.

그에 앞서 이란의 핵개발 관련자들이 의심스런 상황에서 사망한 사건들이 이어져왔다. 지난해 11월에는 노골적인 테러 공격도 자행됐다. 이란 혁명수비대 중장으로서 이란 핵개발의 주요 인물인 핵과학자 모흐센 파흐리자데가 테헤란 외곽에서 차를 타고 가다가 테러 공격을 받고 살해됐다.

지난 4월에는 홍해 남단에 정박중이던 이란 선박 ‘사비즈’가 선체부착폭탄으로 파손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스라엘은 “이 선박이 예멘 내전에서 이란의 지원을 받는 후티 반군에게 전달되는 무기들을 선적했다”고 주장했다. 미국 언론들은 지난 18개월 동안 이스라엘군이 이란의 석유 및 군수품을 싣고서 시리아로 가던 선박 12척을 공격했다고 보도했다.

물론 이란도 반격했다. 올해 초 오만 해역에서는 이스라엘 화물선 ‘엠브이 헬리오스’가 선체에 큰 구멍이 2개 뚫리는 피해를 입었다. 이스라엘은 이란 혁명수비대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림자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일방적 공세이고, 이란은 일방적인 수세다. 이스라엘은 모사드로 상징되는 뛰어난 첩보 및 공작 능력에다가, 이란의 핵능력을 저지하겠다는 국가적 차원의 단호한 결의와 역량이 있다. 이에 비하면 이란의 능력은 열세인데다, 이스라엘의 도발에 대한 전면적인 대응 수단이 마땅치 않다.

공세 펴는 이스라엘, 이란의 보복이 부를 중동 긴장 고조 노려

이스라엘이 도발을 통해 노리는 것은 이란 핵능력 저지도 있지만, 중동의 불안정을 조성할 이란의 보복 대응 그 자체에 있기도 하다.

이스라엘은 최대 400개의 핵탄두에다 대륙간탄도미사일까지 갖춘 핵무장 국가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란이 초보적인 핵무기를 보유하는 순간 자신들의 핵 억지력도 중화될 것으로 우려한다. 또 이스라엘은 이란의 보복이 불러올 중동의 긴장 고조를 이용해, 이란을 계속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려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이란 핵시설 사고 등이 자신들의 소행임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는 것도 이란의 도발을 부추기는 메시지다. 아비브 코차비 이스라엘군 참모총장은 이번 나탄즈 핵시설 사고에 대해 중동에서 이스라엘군의 행동들은 “적의 눈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그들은 우리를 지켜보면서, 우리의 능력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란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노림수에 빠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란에게도 이스라엘이 부담이 느낄 만한 카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과 접경한 시리아와 레바논에는 이란의 대리 세력들이 포진하고 있다. 레바논의 헤즈볼라, 시리아의 바샤르 아사드 정권은 이스라엘을 교란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헤즈볼라나 아사드 정권 등 시리아 내 친이란 세력이 도발하면, 이스라엘은 국경을 넘어 대응해야 하는데 이는 국제사회로부터 가장 비난받게 될 상황이다. 이스라엘은 이란 대리세력들이 미사일 공격 등을 하면, 이란 본토에도 보복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로서도 큰 부담이고, 중동분쟁의 책임이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된다.

이란 핵합의를 복구하려는 조 바이든 미 행정부에게도 이스라엘의 거듭되는 도발은 이제 미국 대외정책을 흔들려는 수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버락 오바마 전 행정부도 이란과의 핵합의를 노골적으로 사보타주하던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정부와 심각한 불화를 겪었다.

그림자 전쟁이 전면전으로 비화되는 것은 이스라엘과 이란 모두가 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상대방을 압박해 자신에게 유리한 입지를 조성하려는 ‘벼랑끝 전술’은 중동 지역 곳곳에서 충돌을 자아내며, 더 큰 분쟁의 에너지를 축적하고 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