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 노동 수기] 계약직을 전전하다 일용직 노동자가 되었다 (하) / 박미리

한겨레 2021. 4. 14.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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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
대학 졸업 후 10년 동안 단 한번도 정직원으로 일하지 못했다. 계약직이라도 꾸준히 일하다 보면 경력이 되고 10년 뒤면 뭐라도 되어 있을 줄 알았다. 싱글 여성으로서 나름 부족함 없이 잘 살았는데 한순간에 무너진 기분이다.

박미리ㅣ사회복지대학원 석사과정

대학 졸업 후 10년 동안 단 한번도 정직원으로 일하지 못했다. 계약직이라도 꾸준히 일하다 보면 경력이 되고 10년 뒤면 뭐라도 되어 있을 줄 알았다. 싱글 여성으로서 나름 부족함 없이 잘 살았는데 한순간에 무너진 기분이다.

둘째 날 긴장을 덜 했더니 좀 낫다. 답답해도 사온 마스크를 꼭 하고 긴팔을 입어서 피부가 긁히지 않도록 주의했다. 벌써 베테랑이 된 기분이었다. 전날보다 적은 물량에, 쉬는 시간 먹는 초콜릿은 꿀맛이다.

하지만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3일 연속을 일하니 또 한계가 온다. 마침 목요일 물량이 줄어들 예정이라는 반장님 말씀에 쉴 수 있었다. 하루 더 쉬고 싶지만 월~일요일 사이 딱 한번만 쉬어야 한다. 1주에 6일을 일해야 주휴수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꿈같은 휴일이다. 백수일 땐 매일 지옥이었는데 일하고 하루 쉬니 1분1초가 소중하고 기분이 좋다.

금요일 다시 출근했다. 신입이 많다 보니 트럭 안 정리가 잘 안되나 보다. 반장이 우리를 소환하는 소리가 들린다. 종종걸음으로 가고 있는데 앞서가던 사람이 뒤돌아보면서 황당해한다. 나만 빠르게 그러나 걷고 있었다. 다들 반장의 확성기를 타고 부르는 소리에 내달린다. ‘어떻게 현장에서 뛸 수가 있지?’ 다른 건설 현장 경험이 있던 나는 너무나 놀랐다. ‘안전제일!’ 현장에선 뛰지 않는 게 첫 번째인데 기본적인 안전교육도 없으니 엉망이다.

일용직 노동자는 임금 차이만 나는 게 아니라 기본적인 교육을 받을 권리도 없어서 당연한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것 같다. 인간다운 삶과 일용직 노동자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

잡생각은 더 할 틈도 없이 기계처럼 몸을 움직인다. 금요일과 토요일이 가장 물량이 많은 날이라고 한다. 그래서 연장근무도 잦다고 한다. 15분 연장해도 다 임금으로 계산해 준다니 좋았다. 미리 겁을 준 대로 양은 엄청나다. 특히 무거운 조립형 나무 서랍장을 싼 박스와 세탁기, 뭔지 모를 묵직한 쇳덩이도 온다. 쓰나미처럼 들이닥치는 음료수캔 박스들과 1.5ℓ 물 6개 팩 정도는 어느새 익숙해져 있었다.

쉬는 시간 동료들과 조금 친해졌다. 어느 동료는 일 시작한 지 6개월째 13㎏이 빠졌다고 했다. 평균적으로 5㎏은 다들 빠지는 것 같다. 약을 먹어도 안 빠지던 살이 여기서 일 시작하고 빠진다고 했다. 살만 빠진 게 아니라 근육도 생기고 몸매 라인이 예뻐졌다고 그들은 말했다. 요요 올까 봐 못 그만두겠다는 농담까지.

하지만 원래 극한직업이라 여자는 안 받았다. 2018년 10월부터 채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힘이 세지는 않지만 손이 빠르기도 하고 물건 정리는 남자보다 더 잘한다고 한다. 무엇보다 일용직의 탄력적 근무시간이 매력이다 보니 지금은 남자보다 여자 직원이 더 많다. 어느 아기 엄마는 새벽에 잠깐 일하는 것이니 애만 아빠가 유치원에 보내면 돼서 시작했다고 했고 갑자기 아이 때문에 못 가게 되더라도 마음 편하게 근무 취소할 수 있는 게 장점이라고 한다.

다음날 토요일, 그렇게 말하던 아기 엄마가 출근을 못 했다. 탄력 근무는 좋지만 그래도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1주 6일 근무를 채우지 못하면 주휴수당이 날아가게 된다. 다른 복리후생이 따로 있는 게 아닌데 그것마저 챙기지 못하는 걸 보면 내가 다 안타깝고 속상하다.

택배업무를 시작한 지 7일차, 일요일이 되었다. 계속 일하고 싶었지만 친구한테 더 신세를 질 수 없어 그만두기로 했다(버스가 안 다니는 이른 새벽에 출근해야 해 필자는 친구 집에서 잤다).

일하고 난 다음주 화요일, 2019년 6월18일. 올해 처음 번 임금, 37만7800원. 얼마 만에 번 돈인지, 모바일 앱의 빨간색 입금액을 정말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2010년 첫 직장에서 연봉이 2500만원이었는데, 그땐 그게 이렇게 큰 돈인 줄 몰랐다. 최저시급 4110원일 땐 못 느꼈는데 최저시급 8350원이 된 2019년, 그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아 쥐고 10년 만에 깨닫는다.

대학 졸업 후 10년 동안 단 한번도 정직원으로 일하지 못했다. 계약직이라도 꾸준히 일하다 보면 경력이 되고 10년 뒤면 뭐라도 되어 있을 줄 알았다. 일찍 결혼이라도 했으면 나았을까? 이렇게 불안하진 않았을 것만 같다. 부모님 말씀을 들었어야 했는데, 죄송하고 막막하다. 서른네살까지 싱글 여성으로서 나름 부족함 없이 잘 살았는데 한순간에 무너진 기분이다. 억척같이 돈이라도 모아놨으면 이렇게 좌절했을까. 이제 와 후회해봐야 소용이 없다. 오늘도 모집자는 1명인데 지원자는 414명인 입사 지원 페이지를 열고 기업의 열람일을 확인한다. 영원히 미열람으로 남을 것만 같다.

※이번 노동수기(상·하편)는 택배 아르바이트를 했던 여성이 보내왔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를 통해서다. 숱한 노동세계의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처지, 취재만으로는 닿을 수 없는 그 세계를 노동 당사자의 글로 공유하고자 한다. (자신의 비정규직 경험을 새긴 ‘노동일기’는 14매 또는 28매 분량으로 opinion@hani.co.kr로 투고해주시면 선별 게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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