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모로 잡힌 'SBS 사장 임명동의제'
2017년 노사 간 '10·13합의'로
사장 등 책임자 임명동의제 도입
사측 단협해지 통보에 극한 대립
방송사 소유·경영 분리의 상징인 SBS 사장 임명동의제가 노사관계 개선의 볼모가 됐다. SBS 사측이 “정상적인 노사관계를 확립하겠다”며 임명동의제 폐지를 요구한 데 이어 해당 조항을 명시한 단체협약까지 해지하겠다고 통고해서다. 사측 대응에 비판이 잇따른 가운데 극한으로 치달은 노사 대립 상황에 우려가 커지고 있다.
SBS 사측이 임명동의제 폐기 요구를 공식화한 건 지난 1월이다. ‘임명동의제의 근간인 ‘10·13 합의(2017년)’를 노조가 일방적으로 파기했기 때문에’ 이 제도를 유지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사측은 2019년 3월 이후 다시 불거진 노사 대립상황에서 노조가 대주주·경영진을 비판하며 이들을 고발한 것이 합의를 무효화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노사는 임명동의제 폐지·개정을 두고 지난 2달여간 11차례 협상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결국 사측은 지난 2일 “(임명동의제) 조항 하나 때문에” 이 제도를 명시한 단체협약의 해지를 통고했다고 밝혔다.
법률상 단협 해지 통보 후 유예기간 6개월이 있어 노사가 협의할 시간은 남아있다. 사측은 “(노사가 6개월 안에 합의하지 못해) 무단협 상태가 되더라도 임금과 복지는 전혀 영향 없다”고 했다. 그러나 불확실한 전망 속에서 구성원들은 불안감을 내비치고 있다. SBS의 한 주니어 기자는 “지난 1월 임명동의제 폐지 요구 땐 ‘회사가 너무 막나간다’ 정도였는데 단협까지 해지하겠다고 하니 저희 연차들은 부글부글 끓고 있다”며 “이번 일은 그나마 사측에 우호적이었던 여론까지 뒤집고 있다. 더 안 좋았던 시절로 돌아갈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SBS 노조는 단협이 직원들의 인사, 고용, 임금, 휴가, 복지 등을 규정하는 만큼 사측의 행태와 실제 단협이 해지될 상황에 우려를 표했다. 전국언론노조 SBS본부는 지난 12일 발행한 노보에서 “단협이 해지되면 사측의 구두 약속만 남게 된다. SBS 31년 역사, 초유의 상황”이라며 “아무리 노조가 미워도, 임명동의제가 싫어도, 감히 단협 해지를 논할 수는 없다. 사측이 수틀릴 때 노동 조건이 위태로워져도 될 만큼 우리는 그렇게 하찮은 존재였던가”라고 반문했다.
주요 언론사에서 단협 해지가 거론된 건 지난 2011년 MBC 이후 두 번째다. MBC는 2019년 새 단협을 체결할 때까지 무단협 상태였다. 그 사이 MBC는 두 번의 파업을 겪었고, 방송 경쟁력은 곤두박질쳤다. 방송기자연합회는 지난 7일 “SBS 노사가 합의해 시행해 온 사장 임명동의제는 전국 모든 방송 종사자들이 부러워할만한 제도였다”며 “무엇보다 2011년 사측의 일방적인 단체협약 해지 통보로 시작한 MBC 사태의 말로가 어떠했는지 잊지 않고 있다. 대화와 협의를 외면한 채 파국으로 치달을 경우 조직과 구성원이 치러야할 희생과 대가는 실로 상상하지 못할 만큼 크다”고 우려했다.
소유·경영 분리와 공정방송 보장의 상징이었던 SBS 임명동의제가 위태로운 이 상황은 다른 언론사들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한 민영방송사 노조 관계자는 “민영언론사에선 대주주의 영향력을 견제하는 것이 핵심 과제”라며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제도화하기 위한 장치가 무산되면 언론사가 일반기업과 다를 게 뭐가 있나. 선구적이었던 SBS의 임명동의제가 무효화하는 것을 보면 우리 언론이 후퇴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기자협회는 지난 9일 성명을 통해 “사측 행위는 방송사로서의 위상과 역할을 포기하고 사기업으로 전락하려는 것과 다름 아니다”라며 단협 해지 철회를 촉구했다.
이번 단협 해지 사태에 방송통신위원회의 역할론도 떠올랐다. SBS 노사는 지난 2017년 방통위 재허가 심사를 앞두고 소유·경영 분리 원칙을 재정립하고, 공공성과 신뢰성 점수를 높이기 위해 임명동의제 도입을 약속한 ‘10·13 합의’를 체결했다. 합의문 9항은 ‘위 합의문은 2017년도 방통위 재허가 심사위원회에 제출해 성실한 이행을 사회적으로 약속하고 보증한다’이다.
언론개혁시민연대는 7일 논평을 내어 “방통위는 재허가 조건 및 권고사항의 이행여부를 관리해야 할 감독 책임을 진다”며 “특히 임명동의제는 방통위가 그간 모든 민영방송 심사에서 제1의 원칙으로 강조해 온 소유·경영의 분리 원칙을 실현하는 데 핵심기능을 하는 제도적 장치로 감독의 필요성이 매우 큰 사안이다. 방통위는 서둘러 사태 파악에 나서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방통위 관계자는 “현재로선 (유예기간 내에) 노사 협의가 진전되길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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