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동자동의 붉은 깃발 / 조문영

한겨레 2021. 4. 14.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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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조문영ㅣ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오세훈 서울시장은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지난달 말에 용산참사의 책임을 철거민들의 “과도한 그리고 부주의한 폭력행위” 탓으로 돌리는 발언을 해 공분을 샀다. 남일당 건물에서 십여년 동안 중국집을 운영하던 평범한 세입자가 2009년 1월 사건 당시 망루에 올랐다가 유죄 선고를 받고, 출소 이후 지속적인 트라우마를 호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게 최근 일이다. 용산참사 유가족과 생존 철거민은 “얼마나 더 죽으라고 등 떠미는” 거냐며 울분을 토했지만, 오세훈 후보는 서울 시민의 압도적인 지지로 시장에 당선됐다. 당시 그는 임차인의 권익을 보장하지 못한 점에 대해 잘못을 인정했는데 문맥이 잘렸다며 상당히 억울해했다. 서울시장으로서 주어진 약 1년의 임기야말로 ‘오해’를 풀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다.

무엇보다 나는, “임차인의 권익을 보장”하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시장이 바뀌면 어떻게 되겠냐”며 쪽방촌 주민들을 협박해온 건물주들에게 “당신들이 나를 잘못 봤소”라고 일갈해주길 바란다. 지난 2월5일 정부가 서울역 인근 동자동 쪽방촌 일대를 공공주택지구로 지정한 이후 동자동은 ‘소유주 혁명’의 거점이 됐다. 건물마다 붉은 깃발이 나부낀다. “제2의 용산참사 피바람 각오하라!”는 펼침막이 여관 건물을 뒤덮었다. 용산구청 항의시위에서는 “가난하고 힘없다고 재산 뺏는 변창흠 사퇴하라!”는 팻말까지 등장했다. 이 “힘없는” 유산자 집단은 코로나19에도 부동산 개발업자와 변호사를 대거 초청하여 총회를 열고, 정부의 공공개발에 대응하기 위해 ‘서울역 동자동 주민대책위원회’를 설립했다. 이들 중 실제 동자동에 머무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용산참사”도, “가난”도, “주민”도 (박완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두 “도둑맞았다”.

동자동 일대는 서울시가 규제를 대폭 완화했음에도 수익성 문제로 오랫동안 개발에 진척이 없었다. 그럼에도 소유주들은 쪽방 주민을 위한 주택까지 포함한 민간재개발을 추진 중이었는데 정부의 기습 발표로 물거품이 됐다며, “이 나라가 사유재산제와 민주주의 제도가 살아 있는 나라임을 입증”하겠다고 항전 의지를 밝힌다. 소수가 움켜쥔 권력에 맞서 투쟁해온 역사가 곧 민주주의인데, 어쩌다 이 나라의 시간은 계속 거꾸로 갈까. 거두절미하고, 쪽방촌 정비지구 내 편입되는 토지 소유자에게는 법에 따라 현 토지용도, 거래 사례 등을 고려하여 보상이 지급될 예정이다. 공공개발사업 토지 수용 및 보상 절차에 문제가 있다면 향후 정부에 이의를 제기하고, 개발 수익을 극대화하지 않고는 못 참겠다면 공공주택특별법의 테두리 안에서 정부와 협상을 전개하면 될 일이다.

다급한 소유주들은 난데없이 쪽방촌 주민들을 들쑤시고 다닌다. “우리가 반대하는데 개발이 될 것 같냐”며 협박을 일삼는가 하면, “저희 부모님 세대부터 지켜온 이 땅에서 강제로 내쫓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며, “집다운 집, 질 좋은 집을 지어드리겠다”는 호소문을 붙이기도 한다. 12일 동자동 사랑방 주민협동회 사무실에서 활동가, 쪽방 주민들과 얘기를 나눴다. 쫓기고 쫓기다 이곳에 닿은 주민들은 “민간개발 어떻게 돌아가는지 뻔히 아는데”라며 건물주들의 ‘호소’에 일침을 둔다. 비싼 임대료를 꼬박꼬박 챙기면서 얼굴 한번 내민 적 없던 자들, “쥐와 바퀴벌레가 우글대는” 건물 관리를 사실상 정부나 주민조직에 떠넘겼던 자들, 개발에 대해 단 한번도 의견을 구한 적 없던 자들이 “절충”과 “상생”을 들먹이는 현실에 분개한다. 하지만 쪽방 주민들도 불안하다. 소유주들이 말끝마다 “시장이 바뀌면”, “정권이 바뀌면” 운운하니 이러다 정부가 방향을 틀면 어쩌나 걱정이다. 무엇보다 그간의 재개발 흑역사가 증명하듯, 소유주들이 세입자들을 회유하고 이간질해 뿔뿔이 흩어놓을까 걱정이다.

김정호 주민협동회 이사장은 정부의 공공주택사업 결정을 “꿈같은 발표”였다고 말한다. “이게 사그라지면 대한민국이 사그라지는 거예요. 이게 되면 나라가 발전하는 거예요.” 하지만 건물주들은 “동자동이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진다”고 절규하고, 부동산 커뮤니티에선 “동자동이 뚫리면 서울이 다 뚫린다”며 경계 태세니 그야말로 웃픈 현실이다. 돌아오는 버스 창밖에 “서민의 고통과 청년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는 오세훈 시장의 당선 감사 펼침막이 보인다. 서민의 고통을 이해하는 시장님, 대체 어느 말이 맞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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