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환의 지식카페>큐피드 화살에 섞여든 죽음.. 사랑은 자신마저 파괴하는 잔혹한 열정

기자 2021. 4. 14.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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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형 작가

■ 김태환의 이야기철학 - ⑫ 통제할 수 없는 사랑

농부의 딸에게 청혼하고 싶어서 기꺼이 이빨·발톱 뽑은 사자… 생존까지 포기하게 만드는 마법의 감정

세상이 정한 경계에 가로막히면 삶보다 죽음 쪽으로 다가서… 수많은 신화·문학 속의 비극적 로맨스 낳아

사자가 농부의 딸을 보고 사랑에 빠져 청혼했다. 농부는 야수에게 딸을 내줄 수도 없고 야수를 거절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한 가지 꾀를 냈다. 그는 사자에게 당신은 사윗감으로 적격이지만 딸이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무서워해서 이빨과 발톱을 제거하기 전까지는 청혼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둘러댄 것이다. 사자는 그 말을 듣고 이빨과 발톱을 뽑고 농부를 다시 찾아왔고, 농부는 사자를 여유 있게 몽둥이로 때려 쫓아버렸다.

이솝우화에서 열정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솝우화는 기본적으로 삶의 지혜를 담은 이야기고, 충동적인 정열보다는 이성에 입각한 사리분별을 더 중시한다. 기분 내키는 대로 즐기며 노래하는 베짱이보다 장래를 바라보고 땀을 흘리는 개미를 더 높이 평가하는 것이 이솝우화다. 그렇다고 해서 이솝우화에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스코틀랜드의 번역가이자 지도제작자인 존 오길비(John Ogilby·1600∼1676)가 번역 편찬한 ‘이솝우화’에는 ‘큐피드와 죽음’이라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사랑의 신인 큐피드는 더운 여름날 지친 몸을 이끌고 서늘한 동굴에 찾아들었다가 그만 화살통을 바닥에 쏟았다. 그런데 그 동굴은 죽음의 신 거처였고, 큐피드가 쏟아진 화살을 주워 담았을 때 그의 화살통에는 죽음의 화살들이 섞여 들어갔다. 반대로 동굴에는 죽음의 화살 사이에 큐피드가 흘린 사랑의 화살이 남겨졌다. 그래서 간혹 사랑에 빠져야 할 생기 넘치는 젊은이들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고, 죽을 때가 다 된 노인들이 사랑에 빠지는 일이 벌어지게 됐다.

사랑에 빠지는 것이 큐피드의 화살에 맞았기 때문이라는 신화적 상상은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 전적으로 수동적인 입장에 있는 인간의 딱한 사정을 반영한다. 인간은 물론 사랑하는 대상을 얻기 위해 의지를 가지고 주체적으로 노력할 수는 있다. 그러나 사랑의 감정 자체는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인간을 급습하고 사로잡고 꼼짝달싹 못 하게 한다. 사랑이 언제 어디에서 올지 예상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다. 원한다고 큐피드의 화살을 자청해서 맞을 수도 없고, 사랑에 감염되지 않게 해주는 백신도 없다. 누가 사랑의 노예가 될지는 큐피드의 기분에 달려 있다. 장 라신의 비극 ‘페드르’에서 왕비 페드르는 의붓아들 이폴리트를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저주하고, 자신을 사랑의 포로로 만든 사랑의 여신 비너스에게 원망의 말을 퍼붓는다. 그런 이성적인 정신이 있는데도 페드르는 결국 이폴리트에게 가망 없는 사랑을 고백하며 파국을 자초한다.

우화 ‘큐피드와 죽음’은 인간이 사랑 앞에서 겪는 혼란이 큐피드의 장난 때문만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큐피드가 사랑의 화살을 흘리고 대신 죽음의 화살이 큐피드의 화살통에 들어오는 바람에 사랑은 큐피드조차 제대로 관리할 수 없는 일이 됐다. 꽃다운 나이에 사랑의 화살이 아니라 죽음의 화살에 맞아 쓰러지고, 고목에 꽃이 피듯 죽음에 가까이 간 노인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큐피드가 뜻밖에 죽음의 화살을 쏘고 죽음의 신이 뜻밖에 사랑의 화살을 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랑과 죽음을 관장하는 신들 스스로 혼란에 빠져버렸으니, 사랑도 죽음도 더욱 예측할 수 없게 됐다. 신들이 빠진 혼란의 후과를 감당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이성적으로 설명될 수 없고 법칙에 따른 계산이나 예측도 허용하지 않는 사랑의 특징은 사회 질서의 근간이 되는 모든 경계에 대해 파괴적인 경향으로 나타난다. 모자 관계에서 모든 남자의 첫사랑이 시작되고 근친상간의 금지가 모든 사회 질서의 기초라는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이론은 바로 사랑과 사회적, 도덕적 규범 사이의 근본적 갈등에 대한 인식을 표현한다. 그런데 이솝우화에서는 자연적 경계마저 무색하게 만드는 사랑의 마력에 관한 이야기들이 발견된다. 그중 하나는 잘생긴 젊은 청년을 사랑하게 된 족제비 이야기다. 사랑에 빠진 족제비는 아프로디테에게 여자가 되게 해달라고 빌었고 여신은 그 족제비의 슬픈 사랑을 가엾게 여겨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시킨다. 청년도 그녀에게 반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는 행복한 결말에 이르는 듯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한다. 아프로디테는 족제비가 겉모습과 함께 진짜 본성도 바뀌었는지 궁금해 침실에 쥐를 한 마리 보낸다. 족제비는 쥐를 보자 그만 모든 걸 잊어버린 채 먹잇감을 향해 달려들고, 이에 화가 난 아프로디테는 여자를 다시 족제비로 되돌려 버린다. 이 이야기는 웅녀가 된 곰의 이야기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웅녀가 소원에 따라 사람이 된 뒤에 그 결과로 환웅의 아내가 되는 데 반해, 이솝우화의 족제비는 사랑하기에 여자가 되고자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쥐를 잡는 것을 참지 못해서 사랑을 성취하는 데 실패한다는 대목에서는 쑥과 마늘만 먹다가 고기 맛을 잊지 못해 사람이 되지 못한 호랑이의 모습도 어른거린다. 또한 족제비의 변신담은 왕자를 사랑해 사람이 됐으나 결국 물거품으로 사라지고 마는 인어공주 이야기의 희극적 버전으로도 읽을 수 있다.

종간장벽을 뛰어넘은 사랑에 관한 또 한 편의 이솝우화가 바로 농부의 딸을 사랑한 사자의 이야기다. 농부는 무서운 사자를 쫓아버리기 위해 사자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 조건을 제시한다. 이빨과 발톱을 뽑는다는 것은 사자로서는 자살행위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벙어리가 되는 것을 감수한 인어공주처럼, 사자는 기꺼이 이빨과 발톱을 뽑고 청혼하기 위해 다시 농부의 집을 찾아온다. 사자의 희생은 인어공주보다 더 막대하다. 인어공주는 벙어리가 되는 대가로 인간의 신체를 얻었으나, 사자는 오직 사랑에 대한 기대만으로 스스로 생존 능력이 없는 불구자가 됐기 때문이다. 사자가 몽둥이로 두들겨 맞고 쫓겨날 때, 우리는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진짜 중요한 것을 내버리고 신세를 망친 자의 어리석음을 비웃을 수도 있겠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솝우화라는 장르 전체가 이성적 현명함을 강조하며 무모하고 어리석은 욕망을 경고하는 경향이 지배적인 까닭에, 사랑에 빠져서 신세를 망치는 사자의 우화에 대해서도 그런 독법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을 위해 이빨과 발톱을 뽑아버리는 사자의 모습을 상상하면 그저 웃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된다. 그것은 지독한 사랑이다. 사랑을 위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 자신의 본질마저 파괴해 버리는(맹수에게 이빨과 발톱을 빼면 무엇이 남는가?), 그야말로 ‘미친 사랑(amour fou)’이다. 게다가 그런 사랑에 빠진 것이 큐피드의 농간이나 실수라면 어떻게 사자의 불행을 그 자신의 탓으로 돌릴 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이 이야기는 첫인상과 달리 전혀 희극적이지 않다. 희극이란 기본적으로 그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잘못으로 골탕을 먹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농부의 딸을 사랑한 사자의 우화는 오히려 사랑에 빠져 강한 힘을 잃어버리고 몰락하는 비극적 영웅의 이야기와도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데릴라를 사랑한 삼손이 그런 인물이다. 삼손은 블레셋인들에게 매수된 데릴라의 집요한 질문을 못 이기고 그만 자신의 초인적 힘이 긴 머리카락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려준다. 데릴라는 중대한 비밀을 알아낸 뒤 삼손이 잠든 사이에 블레셋인들을 불러들인다. 삼손은 적에게 머리카락과 눈을 잃어버리고 포로가 된다. 삼손이 힘을 잃은 것은 그저 방심한 탓이다. 데릴라의 거듭된 질문에 질려서 생각 없이 비밀을 털어놓은 삼손과 비교하면 사자의 우화가 사랑 이야기로는 더 비장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사자는 사랑에 취한 끝에 부주의로 이빨과 발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농부의 딸을 안심시키기 위해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를 제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몽둥이에 맞고 쫓겨난 사자는 어떻게 됐을까? 사자는 필시 굶어 죽었을 것이다.

다시 ‘큐피드와 죽음’의 우화를 생각해보자. 큐피드가 죽음의 동굴에 이끌려 들어가고 그 결과로 사랑의 화살과 죽음의 화살을 분간할 수 없게 됐다는 우화는 사랑과 죽음이 위험스럽게 가까이 있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사랑이 세상의 경계와 극적으로 충돌하는 순간, 사랑은 늘 죽음에 가깝게 다가간다. 사자는 농부의 반대로 사랑이 가로막히자 자기 파괴로 대응한다. 인간의 성애에 관한 프로이트 이론의 기초를 이루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모델에서도 사랑과 죽음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살의, 근친상간과 부친살해의 모티브로 구성돼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훗날 이를 인간의 근본적인 두 충동, 에로스(성 충동)와 타나토스(죽음 충동)에 대한 이론으로 발전시킨다.

세상의 경계를 알지 못하는 사랑이라는 테마는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으로 끝나는 많은 비극적 로맨스를 낳았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떠올리겠지만, 이 비극은 고대의 신화적 원형을 가공한 것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담에 나오는 ‘피라무스와 티스베’ 이야기가 그것이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원수같이 척을 지고 사는 두 집안의 아들과 딸인 피라무스와 티스베는 누구도 떼어놓을 수 없는 연인 사이가 된다. 당연히 부모의 반대에 부딪힌 두 사람은 밤에 만나 함께 도주하기로 한다. 약속 장소에 먼저 나타난 티스베는 방금 먹이를 잡아먹고 주둥이에 피칠을 한 암사자를 보고 무서워 달아나고, 약속장소에서 암사자가 찢어버린 티스베의 베일을 발견한 피라무스는 그녀가 죽었다고 믿고는 칼로 자결한다. 죽어가는 피라무스 옆에서 티스베 역시 그 칼로 최후를 맞이한다. 이 이야기에서 사자는 이솝우화에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랑과 죽음을 결합시킨다. 사자는 오해를 일으켜 두 연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장본인일 뿐 아니라, 그 주둥이에 묻은 강렬한 진홍의 피는 잔혹한 살해와 사랑의 열정을 동시에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피의 이중적 상징성은 이 변신담의 핵심적 내용에도 반영돼 있다. 피라무스가 죽어가며 흘린 피가 하얀 뽕나무 열매를 짙게 물들였고 신들은 두 남녀의 금지된 사랑에 대한 추억으로 그 흔적을 남겼기에 오디가 오늘날에도 검붉은 빛을 띠게 됐다는 것이다.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 용어설명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 장차 태어날 아들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경고를 받은 라이오스 왕은 여왕이 아들을 낳자 산에 버려 죽게 하라고 명령한다. 지나가던 양치기에게 발견돼 목숨을 구한 아기는 청년 오이디푸스로 성장하고 갈림길에서 우연히 만난 라이오스와 다투다 그가 아버지인 것을 모르고 죽이게 된다. 이 신화는 향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모티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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