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걷기] 솔향기길.. 자원봉사자 120만 명이 만든 최고의 '언택트 길'

글·사진 김영미 여행작가 2021. 4. 14.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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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향기 맡으며 파도소리 들으며.. 보물 같은 길을 걷다
바다를 바라보면서 산책하기 좋은 솔향기길 1코스의 시작지점인 만대항 해안길. 시작지점에는 멋진 데크길이 도보여행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길 위에 서면 언제나 마음이 편안해진다. 새롭게 걷는 길에서 만날 풍광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길을 선택하고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날은 수학여행 떠나는 아이처럼 설레서 잠을 설친다. 길을 걸으며 나를 찾게 되고 살아 있음을 다시금 느낀다.
새롭게 나를 찾기 위해 선택한 길은 태안의 ‘솔향기길’이다. 만대항에서 시작해 아름다운 해안선과 해송 숲을 따라 철썩거리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피톤치드 가득한 솔향기에 젖어드는 1코스는 꾸지나무골 해변까지 약 10km이다. 태안반도의 세월과 풍광이 이어지고 걷는 내내 한적하고 여유로운 걷기 여행에 심취할 수 있다. 솔향기길은 5개의 코스가 있고, 총길이는 51.4km이다.
솔향기길 1코스는 피톤치드 가득한 솔향기에 젖어서 걷는 해송 숲길이 이어진다.
솔향기길 1코스가 만들어진 해안은 2007년 발생한 ‘태안 기름 유출 사고’의 아픔이 있었던 곳이다. 2007년 12월 7일 허베이 스피릿 호와 삼성 중공업 바지선이 충돌하면서 원유가 유출되었고 태안 앞바다는 온통 기름으로 뒤덮였다. 한순간의 실수로 생명이 숨 쉬는 바다가 죽음의 바다로 변했다. 이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 전국에서 120만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모여들었다. 원유가 뒤덮였던 바다는 그들의 노력과 정성으로 소생했고 다시 자연의 색을 되찾았다.
태안군 이원면에서 태어난 차윤천님도 자원봉사자의 일원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기름을 닦았다. 당시 자원봉사자들과 지역주민들이 앙뗑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위험한 곳마다 밧줄을 매어 주고 발디딜 자리를 만들었다.
‘앙뗑이’는 이 지방 고유의 말로 경사가 급한 길을 의미한다. 발을 디뎠던 자리를 연결하다 보니 어떤 구간은 경관이 감탄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 길에 해안산책로를 만들기 시작했고 만대항 선착장에서 꾸지나무골해수욕장까지 해변을 따라 자연을 최대한 살리면서 만들어진 솔향기길 1코스가 되었다. 120만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만든 보은의 길이기도 하다.
용난굴 안쪽에서는 바다를 배경으로 멋진 인생샷을 연출할 수 있다.
만대항에서 중막골까지
물이 빠지면 종패를 매단 굴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있는 만대포구는 고즈넉하다는 표현도 모자랄 만큼 조용하다. 만대포구 앞으로 천혜의 서해바다가 펼쳐진다. 만대항의 해변부터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길이다. 서해안의 뻘을 연상했건만 석화가 다닥다닥 붙은 갯바위가 뒤덮여 있는 바다라니! 예상치 않은 매력적인 풍광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길을 시작하기 전에 바닷가로 내려가 덕지덕지 석화가 붙어 있는 바위들을 곁에서 바라본다. 어디론가 육체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았음에도 바위에 핀 매화처럼 화려하다. 몇몇 현지 분들이 석화를 채취하는 모습도 보인다. 바구니에 가득 담긴 석화는 오늘 저녁엔 어느 식탁 위에 올라가 있을까?
솔향기길은 이름 그대로 소나무 숲길이다. 바다를 바라보면서 산책하기 좋은 길이다. 그 길은 바다와 동행한다. 뭍과 바다의 경계 위에 만들어진 길이다.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의 푸르름이 지루하다 싶을 때 고개만 돌리면 초록의 향기 가득한 해송 숲이다. 세상의 경계선에 서 있다는 아스라함과 긴장감 대신에 설렘이 가득하다. 서해안의 아름다움을 확실하게 느끼며 숲의 기운을 받으며 걷는 코스이니 누구나 이곳을 방문하는 순간, 그 매력에 빠질 것은 분명하다.
숲속 길에서 해변 백사장으로 들어서면 세 개의 바위가 서 있다. 삼형제바위다. 굴 따러 가서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를 기다리던 삼형제 모두 물에 잠겨 바위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보는 장소에 따라 하나로도 보이고 둘이나 셋으로도 보인다. 바위를 중심으로 남쪽 방향인 만대항에서 보면 첫째가 아우 둘을 감싸 숨겨줘 하나로 보이고, 서쪽 방향인 구메에서 보면 첫째가 둘째아우를 감싸 숨기고 막내아우를 드러내어 둘로 보이며, 동쪽의 황금산 앞바다에서 보면 삼형제 모두 드러나 셋으로 보인다. 이곳은 일출을 맞기에도 좋은 장소이다.
붉은색 수인등표 등대가 있는 장안여. 장안여는 섬돌 모양으로 길게 뻗어 물에 잠기고 드러나기 때문에 주민들과 항해하는 선원들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다, 만대리 해안으로부터 150m 정도 바다 깊숙이 뻗어 있다. 가로림만으로 들어오는 항로 근방에 있어 항해의 유속이 빠르게 흐르고 안개가 자주 껴서 크고 작은 해안 사고가 발행하는 곳이다. 보기에는 참 멋진 장소인데 대형사고도 발생하는 지역이라니 수인등표 등대의 중요함이 느껴진다.
가마봉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여섬의 낙조가 장관이다.
그윽한 솔향기에 취해 흙길을 걷다 보면 철썩 때리는 파도 소리에 잠깐씩 놀라기도 한다.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지는 흙길은 마치 양탄자처럼 푹신하다. 기암절벽을 이룬 리아스식 해안 곁에 이런 멋진 흙길이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절벽 위 흙길을 걸으며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움을 느낀다. 바다와 숲의 청량감이 코로나로 우울한 마음을 위로해 준다. 수인등대 지나서 숲길 아래로 떨어지는 절벽 해안에는 낚시하는 이들이 더러 눈에 뜨인다. 높고 커다란 파도가 들이칠 때마다 내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붉은앙뗑이, 새막금쉼터를 지나 당봉전망대이다. 옛날엔 이곳에 넓은 바위가 있어 바위에 제사상을 차려놓고 풍어제를 지냈다고 한다. 회목쟁이를 지나 가마봉전망대에 도착한다. 가마봉은 썰물일 때 배를 타고 파도가 넘실대는 갯바위를 바라보면 갯바위 모양이 가마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낚시인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날씨가 맑은 날은 인천대교까지 보이기도 한다. 솔향기길 최고의 전망대인 가마봉전망대에는 눈길을 끄는 곡괭이를 든 사람의 조형물이 있다. 그는 다름 아닌 솔향기길 산파 역할을 해낸 차윤천님이다. 가파른 비탈과 언덕에 길을 내어 지역주민과 자원봉사자들이 바다로 용이하게 접근하도록 도와주었고 그후 3년여에 걸쳐 길을 다듬어 지금의 솔향기길이 탄생되었다.
가마봉전망대에서 멀리 동그란 모양의 여섬이 보인다. 여섬은 하루에 두 번, 썰물 때만 약 200m의 길로 육지와 연결되는 작은 섬이다. 지도에는 꽤갈섬으로 표기되어 있다. 서해바다 쪽으로 이원방조제가 축조되면서 제방 안에 있는 섬은 모두 육지가 되고 단 하나 남아 있는 섬이다. 옛날 선인들이 지명을 지을 때 이 섬이 유일하게 하나만 남게 될 것을 예견하고 남을 여餘자를 붙여서 여餘섬이라 지은 것 같다. 해질 무렵 붉게 물들어가는 바다의 낙조가 장관인 여섬 부근은 어족이 풍부하고 갯바위 낚시터로도 유명하다. 낮아도 산은 산이다. 오르내리막을 반복하면서 몸이 데워지고 나니 여섬전망대에 도착한다.
여섬에서 낙조를 만날 의도는 전혀 없었는데 우연을 가장한 필연처럼 낙조가 시작되고 있다. 빨리 가는 것보다는 천천히 즐기고 가야 할 길이다. 여섬전망대에서 수평선 아래로 떨어지는 햇님과 여섬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며 낙조의 행복에 퐁당 빠진다. 햇님을 향한 마지막 작별인사는 남겨두고 부지런히 중막골로 발길을 옮긴다.
중막골엔 낙조와 어울리는 카페가 있다. 낙조와 커피. 이름만으로도 기분 좋은 설렘이다. 바다로 들어가는 햇님과 오렌지빛이 스며드는 바다, 새콤한 바다내음을 벗 삼아 따스한 커피를 즐긴다. 온전한 행복에 취한다. 내 삶도 오렌지빛이 된다.
당봉전망대에는 솔향기길 산파 역할을 해낸 차윤천님 조형물이 있다.
코스도 짧고 어렵지 않아서 반나절이면 충분히 걸을 줄 알았는데 그만 생각지 않은 여섬의 낙조 덕분에 오늘은 이곳에서 하루를 지내야만 한다. 길 위에 서면 모든 계획은 어디까지나 예정일뿐이다. 다행히 중막골에는 팬션단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나 같은 도보여행객에겐 펜션은 조금 사치스런 숙소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로 문의를 했다. 역시나 부담스런 비용이다. 만대항까지 조금 더 걷기로 한다. 카페단지에서 임도길을 거쳐서 만대항까지는 걸어서 넉넉하게 잡아 1시간. 조금 더 걸으니 저녁도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이고 민박찾기도 조금 수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임도길에서 만대항으로 걷는 길은 솔향기 염전을 지난다. 1코스 시작지점인 만대항으로 오면서 보았던 염전과 갯벌 사이에 만들어진 좁은 둑길이 바로 곁에 있다. ‘솔향기길을 끝내고 저 길을 걸어야지~’ 생각했었는데 마침 그 길을 걷는다. 이미 해는 지고 온 세상이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지만 랜턴 없이 걸을 만큼 바닷길은 환하다. 만대항으로 걷는 바다와 염전 사이를 걷는 길은 한적하고 감성이 가득한 산책길이다 .
솔향기길 1코스에는 바다를 조망하며 쉬어갈 수 있는 전망대 겸 쉼터가 곳곳에 있다.
바위조각공원과 용난굴
만대항 근처의 민박에서 하루 묵고 어제 탈출했던 중막골로 들어선다. 목표했던 길을 다 걷지 못하고 다시 이 길로 들어서지만 멋진 길을 나누어 걷는 기쁨이 크다.
바다의 철썩거림이 예사롭지 않다. 서해안에서 동해안의 파도소리를 듣다니? 동해안 파도가 서해안으로 놀러와서인지 시원스럽게 철썩거리는 파도소리가 더 정겹다. 예상치 않았던 벗을 만나는 기쁨이랄까?
중막골의 카페단지를 지나니 무인카페가 있다. 솔향기길의 도보여행객들을 위한 쉼터이다. 음료가 들어 있는 냉장고에서 자유롭게 음료를 구입할 수 있다. 솔향기길에서 이런 쉼터를 자주 만났으면 좋겠지만 1코스에서는 이곳에만 있어서 조금 아쉽다.
무인카페를 지나 꾸지나무골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 바닷가의 바위들 모습이 심상치 않다. 사람들 손길이 거의 닿지 않아서 거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참으로 다양하다. 돌조각 공원이다. 부처바위, 곰바위, 뱀똬리바위, 손바닥바위, 거북바위 등 다양한 모습을 가진 바위들에 반해서 조심스레 바위 위에 올라 서해안을 조망한다. 멀리 보이는 태안화력발전소에서는 하얀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고 발아래에는 부서지는 파도의 거품이 바위를 삼킬 것만 같다.
돌조각정원이 펼쳐진 바닷가에는 ‘용이 나와 승천한 굴’이라는 용난굴이 있다. 간조 시에만 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용난굴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높이도 폭도 좁아진다. 꽤 깊숙해서 랜턴이 있으면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을 터인데. 하필이면 휴대폰의 플래시에만 의지해야 한다. 안으로 18m쯤 들어가면 두 개의 굴로 나뉜다. 두 마리 용이 한 굴씩 자리를 잡고 하늘로 오르기 위해 도를 닦았는데 한 마리 용이 굴에 용의 발과 꼬리비늘을 남기고 먼저 하늘로 승천했다. 또 다른 용은 승천길이 막혀서 승천하지 못하고 굴속에서 몸부림치다가 동굴 벽에 핏자국을 남기고 동굴 앞에서 망부석이 되어 용난굴을 지키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낙조 시에는 안쪽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멋진 풍경이 연출된다. ‘어제 용난굴까지 왔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이곳의 바위들이 워낙 험해서 어두울 때 걷는 것은 조금 위험할 수도 있겠다 싶다. 모든 것을 다 가지려고 하는 것은 욕심일 뿐.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것이 최선이다.
간조 시에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용난굴. 용난굴 앞은 다양한 모습의 바위들이 가득한 돌조각공원이 펼쳐진다.
용난굴을 지나오니 해와송이 있다. 서서 자라는 소나무와 달리 누워 있는 소나무. 언뜻 보면 편안해 보이기도 하지만 밀물 때면 바닷물에 잠긴다고 하니 참으로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고사 직전의 이 소나무를 발견한 차윤천님이 8년간 정성으로 가꾸었고 이제는 솔향기길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해와송의 생명력이 놀랍다.
6.25 전쟁 당시 파놓은 작전용 참호를 지나니 와랑창이다. 와랑창에는 바위 틈새로 깊은 굴이 있는데 파도가 조금만 쳐도 ‘와랑와랑’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서 와랑창이라 부른다. 근거 있는 이야기인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와랑창이 온양온천까지 뚫려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리골을 지나서 꾸지나무골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 도투매기란 곳에 참 멋진 집이 하나 있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언덕 위의 집. 정원이 참 예쁘고 정성스럽게 가꾸어져 있다. 도투매기 앞바다는 그 집의 프라이비트 비치이다. 어찌 보면 좀 외로울 것도 같지만 집중해서 뭔가 해야 할 때는 참 좋은 곳이겠다. 이런 곳에서 가끔 머물고 싶다.
드디어 1코스 끝인 꾸지나무골 해수욕장의 백사장이 보인다. 유유자적 걸어서 전혀 피로하지 않고 시원한 바다, 멋진 바위, 황홀한 낙조를 즐겼던 이틀간의 솔향기길 1코스의 끝이다.
“오늘도 수고 많았어!”라고 토닥토닥 나를 칭찬한다. 길은 여기서 끝났지만 앞으로 걸어갈 길은 또 어디일지 궁금해진다.

본 기사는 월간산 4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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