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에 끌려다니다 길 잃어.. 韓·美정상 만나도 돌파구 요원 [한반도 인사이트]

원재연 2021. 4. 14. 08:0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면초가' 文정부 대북정책
文 선거 패배로 구심력 급격하게 약화
美·中간 패권 경쟁 심화로 변수 많아져
北도 文정부 중재자 역할 기대 접은 듯
최근 미사일 도발하며 말폭탄 쏟아내
올림픽 불참으로 '도쿄구상'도 물거품
美, 北에 제재 풀어줄 명분 찾기 어려워
바이든 정책, 北 기대 못 미칠 가능성 커
韓·美간의 '北 비핵화' 시각차도 걸림돌
전문가들 "文, 트럼프때의 정책 또 꺼내
이벤트성보다 동맹 측면 조율 더 중요"
미국 뉴욕타임스는 최근 더불어민주당의 4·7 재보선 참패로 “문재인 대통령의 트레이드 마크인 남북 대화가 너덜너덜해졌다”고 지적했다. 선거 패배로 문 대통령의 구심력이 약해지면서 대북정책에도 빨간불이 켜졌다는 것이다. 여당이 받아든 재보선 성적표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실현을 업적으로 남기고 싶은 문 대통령에게는 곤혹스러운 결과이다. 가뜩이나 미국과 북한 양쪽의 냉담한 반응에 부닥쳐 표류하는 대북정책의 동력을 되살리기가 더 어려워진 탓이다.
 
정상 간 ‘톱다운 방식’에 기대를 걸고 북·미 사이에서 중재 의지를 밝혀 온 문재인정부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는 형편이다. 지난 1월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 출범 이후 미·중 패권경쟁이 날로 심화하는 외교적 변수를 고려할 때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다. 문재인정부에는 시간도 많지 않다. 임기는 1년 남짓 남았지만 올 하반기에는 정국이 내년 대선 국면으로 전환할 것이어서 실제로 일할 수 있는 시간은 몇개월에 불과하다.

◆미사일 발사에 도쿄올림픽 불참까지 선언한 북한

북한은 문재인정부의 중재자 역할에 대한 기대를 접은 기류다. 최근 다시 미사일 도발에 나서고 문 대통령에게는 말폭탄을 쏟아냈다. 7월 개막하는 도쿄올림픽 불참을 선언하며 올림픽을 남북, 북·미 대화 재개의 전기로 삼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재추진하려던 문 대통령의 ‘도쿄 구상’도 무산시켰다.

이런 분위기는 지난달 16일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노동신문을 통해 담화를 냈을 때부터 감지됐다. 김여정은 담화에서 한·미 연합훈련을 문제 삼아 “3년 전의 따뜻한 봄날은 다시 돌아오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남북군사합의 파기 등 후속조치도 예고했다. 한·미 연합훈련이 끝날 무렵에 담화를 낸 건 미국의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과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의 방한을 겨냥한 것이었다. 25일에는 단거리 탄도미사일 2발을 동해상으로 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이튿날 “국방과학원이 3월 25일 새로 개발한 신형전술유도탄 시험발사를 진행했다”며 탄도미사일 발사를 공식 확인했다. 김여정은 30일에도 담화를 내고 문 대통령을 겨냥해 ‘미국산 앵무새’ ‘철면피’라는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북한이 지난 3월 25일 새로 개발한 신형전술유도탄 시험발사를 진행했다며 탄도미사일 발사를 공식 확인했다. 이번 신형전술유도탄은 탄두 중량을 2.5t으로 개량한 무기체계이며, 2기 시험발사가 성공적으로 이뤄졌다고 자평했다고 조선중앙TV가 지난달 26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지난 6일에는 도쿄올림픽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한·미·일과 만나도 실익이 없다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조만간 모습을 드러낼 바이든 행정부의 새로운 대북정책에 대북제재 완화 등 북한이 원하는 내용이 포함될지를 예의주시하겠다는 생각인 듯하다.

◆北 SLBM 도발 나서면 文정부 입지 더 축소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북한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특별히 새로운 내용은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미국이 북한에 양보하려면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을 찾기 매우 어렵다”면서 “최고치로 나온다면 싱가포르 합의를 존중한다는 정도이지, 대북제재 문제를 임기 초반에 건드리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도 지난 7일 브리핑에서 “비핵화를 향한 길로 인도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북한과의 일정한 형태의 외교를 고려할 준비가 돼 있다”면서도 “물론 우리는 계속해서 제재를 시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문제는 미국 정부의 대북정책 내용이 북한 정권에 실망스러울 것으로 예상되면서 북한이 강경하게 나올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군사적 긴장을 조성해 바이든 행정부에 압박을 가할 소지가 큰 것이다. 최근 북한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도발에 나설 것이라는 정황이 감지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북한이 도발한다면 15일이 고비다. 북한의 최대 명절인 태양절(김일성 주석 생일)인 동시에 미국 의회에서 대북전단금지법(개정 남북관계발전법) 관련 청문회가 열리는 날이다. 북한이 실제 도발한다면 문재인정부 입지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 연합뉴스
◆좁혀지지 않는 한·미 대북 시각차

북핵 문제에 대한 한·미 간 시각차는 지난달 18일 서울에서 열린 한·미 외교·국방장관(2+2)회의에서 극명히 드러났다. 공동성명에는 바이든 행정부가 강조한 ‘북한의 비핵화’라는 표현이 담기지 않았다. 공동기자회견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유산인 ‘싱가포르 북·미 공동선언’ 계승 여부를 두고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 했지만, 블링컨 장관은 언급을 피했다. 블링컨 장관은 우리 정부가 언급을 꺼리는 북한 인권 문제도 강한 어조로 제기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블링컨·오스틴 장관을 접견한 자리에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포함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실현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혀 평화 프로세스에 방점을 찍었다.

한국의 ‘선 종전선언, 후 비핵화’ 구상에 대해서도 미국은 회의적인 입장인 것으로 보인다. 정 장관이 지난달 31일 기자회견에서 종전선언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며 미국에 긍정적 검토를 공개적으로 촉구한 데서 엿볼 수 있다. 정 장관은 또 백악관이 지난달 29일(현지시간) 바이든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날 의향이 없음을 분명히 했음에도 “(미국 측이) 톱다운, 톱다운 외 다른 방식 또는 혼합된 방식 등 여러 가지를 검토하고 좋은 결론에 도달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사진=뉴스1
◆대북정책, 현실과 괴리가 문제

정부의 대북정책이 길을 잃은 건 현실과 괴리된 데다 북한에 끌려다닌 탓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을 지낸 위성락 전 러시아 주재 대사는 “문재인정부가 추구하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방향을 변화하는 현실에 맞게 조정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면서 “바이든 행정부에서 2018년(한반도 평화 모드)을 재현하는 건 트럼프 행정부 때보다 어려운 일인데도 정부는 당시와 똑같이 하려고 한다”고 지적했다. 신범철 경제사회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은 “정부가 대북정책 추진 과정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북한에 끌려다니다 보니 북한의 요구 사항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다”면서 “대북제재 등 한국 정부가 독자적으로 풀 수 없는 과제에 봉착하니까 북한이 남북관계를 저버리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북한이 ‘남북관계를 북·미관계 아래 두겠다’는 정책 방향을 정하면서 중재자 역할을 하려는 정부의 입지가 좁아졌다”면서 “정부가 바이든 행정부의 반중 전선 동참 요구에 응하지 않으니 북한 문제를 조율하는 데서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럼에도 이들 전문가는 정부가 대북정책 기조를 바꾸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대북정책이 문재인정부의 정체성과 같은 데다 이미 너무 많은 정치적 자산을 투자했기 때문에 이를 바꾼다면 실패를 인정하는 모양새가 된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왼쪽),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연합뉴스
◆“이벤트성 정상회담 등에 매달려선 안 돼”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불씨를 살릴 방법은 없는 걸까. 정부가 한·미 정상회담 조기 개최 등을 돌파구로 삼을 여지가 있지만 성과가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신 센터장은 “정부가 남북관계에서의 성과를 부각하기 위해 정상회담이나 고위급회담을 추진하려고 하겠지만 그렇다고 외교안보 환경이 바뀌는 게 아니어서 한계가 있을 것”이라면서 “5월에 한·미 정상회담을 한다고 해도 공허한 회담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위 전 대사도 “보수와 진보를 떠나 큰 이벤트를 만들어 상황에 대처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하는 게 한국 외교의 고질병 가운데 하나”라면서 “한·미 정상회담을 한다고 해도 돌파구를 마련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 교수는 “동맹 측면에서 미국과의 대북정책 조율이 필요하며 더 중요한 건 대중정책에 대한 정부 입장을 정하는 것”이라면서 “전략적 모호성으로는 미국과의 조율에 한계가 있다”고 조언했다.

원재연 선임기자 march27@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