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류경정주영체육관 [다시 보는 남북건설협력사업 (3)]
2021. 4. 14. 06:33
2013년 세계역도대회, 태극기와 애국가 울려
남북 스포츠 교류의 역사
남북 간 스포츠 교류는 다른 분야에 비해 일찍 시작됐고 빈번하기도 했다. 남북 체육계 최초의 접촉은 1957년에 있었다. 1957년 조선올림픽위원회는 국제올림픽위원회를 통해 대한올림픽위원회에 국제대회 단일팀 구성 참가를 제의했다. 이는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가 남한올림픽위원회만을 한반도에서 유일한 올림픽위원회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한은 전쟁이 끝난 후 대결 국면이 지속되고 있다는 이유로 단일팀 논의를 거부했다.
북한은 남한의 거부로 단일팀이 구성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IOC에 북한을 회원국으로 승인할 것을 요구했다. 1963년 바덴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북한은 정식 회원국으로 인정됐다. 북한이 IOC 회원국이 되면서 남북 간에는 본격적인 스포츠 대결이 시작됐다. 남북 간 최초의 경기는 도쿄올림픽 배구 예선전이었다. 인도에서 열린 대회에서 남자배구팀은 이겼으나, 여자배구팀은 졌다. 남한 정부는 남북 스포츠 대결 대비책으로 1966년 태릉선수촌을 설립했다.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부터는 남한이 경기에서 우위를 보이게 됐으며, 1982년 아시안게임부터는 북한이 스포츠 분야에서 남한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는 남한 경제의 성장과 북한 경제의 후퇴 그리고 남한의 스포츠에 대한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투자의 영향이었다.
IOC는 ‘88 서울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남북화해와 협력을 희망했다. IOC의 중재로 1985년 10월 8일에서 1986년 7월 15일에 걸쳐 4차례 회담이 진행됐다. 북한은 올림픽 공동 개최와 단일팀 구성을 주장했고, 남한은 일부 종목 경기의 북한 배정(분산개최)과 개·폐회식 공동입장을 주장했다. 그러나 1년간의 협의에도 불구하고 양측은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1988년 1월 11일 북한이 서울올림픽 불참을 선언함으로써 남북체육회담은 결렬됐다.
1990년대가 되면서 남북 스포츠 교류는 그동안 논의만 이루어졌던 수준에서 남북단일팀 구성 등의 구체적인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1991년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 대회에서 남북이 최초로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공동 입장했으며, ‘여자 단체전 우승’이라는 성과를 냈다. 단체전 우승은 중국이 18년간 우승을 독점하고 있었던 벽을 넘은 것이었다. 이는 2012년 〈코리아〉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평양류경정주영체육관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협력사업이 활발하게 추진됐다. 금강산 관광사업을 합의한 현대그룹은 1998년 10월 29일 북한의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와 ‘실내 종합체육관 건설 및 민간급 체육 교류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했다.
합의서에 따라 평양류경정주영체육관 건설이 시작됐다. 사실 남북 스포츠 교류가 오랜 기간 이루어졌으나 북한에 관련 시설을 건립한 것은 류경정주영체육관과 금강산 골프장이 유일하다. 류경정주영체육관은 2003년 준공돼 북측이 사용하고 있으나 금강산 골프장은 2008년 완공돼 시범경기까지 했으나 관광 중단 이후 전혀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류경정주영체육관은 현대그룹의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업지구 등의 경협 사업 추진을 위한 부대사업적 의미가 있었지만 정주영 회장의 스포츠에 대한 애정도 일정 부분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주영 회장은 88올림픽 유치위원장을 지냈고, 매년 그룹 신입사원들과 씨름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체육관은 남북체육 활성화를 위한 목적으로 건설하고 현대와 북측이 협력해 건설하기로 합의됐다. 체육관 건설을 위한 설계, 기술인력, 주요자재 공급은 현대가 맡았다. 인허가 및 공사 인력을 위한 편의, 건설을 위한 노동력, 현지에서 공급할 수 있는 자재(모래 같은 골재, 석재, 시멘트 등)는 북측이 분담하기로 했다. 체육관이 준공되면 농구, 배구, 레슬링, 태권도 등의 경기를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설날 등에는 씨름, 농악 등 민속경기 행사를 진행하며 남북협력을 통해 국제경기에도 출전하기로 합의했다.
체육관의 위치는 평양직할시 보통강구역 류경호텔 부근으로 하고 부지면적 약 6만7000㎡, 연면적 약 2만7000㎡이며, 관람석은 주경기장 1만2309석, 부경기장 164석으로 돼 있다. 계획설계는 북한의 노동당 재경부 소속 설계사무소로 알려져 있는 백두산건축연구원에서 하고, 실시설계는 현대건설 종합설계실에서 했다. 북한의 건축가들과 남한의 건축가들이 만나서 함께 작업한 것은 아니지만 남북이 공동으로 설계한 최초의 사례였다.
현대그룹은 대북사업을 위해 현대아산을 1999년 2월 설립했으며, 현대아산이 체육관 건설도 총괄했다. 건설 자금은 현대그룹 계열사(현대건설,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등)가 분담했으며, 시공은 현대건설이 담당했다.
1999년 9월 현대아산은 통일부로부터 체육관 건설을 위한 협력사업자 승인을 받았다. 1999년 9월 27일 체육관 착공을 했으며, 착공식 행사로 평양에서 남북 농구경기를 했다. 농구경기에는 남한에서 허재, 이상민, 전주원(여자농구) 등이 참가했다.
공사는 남한의 건설기능공이 북한 인력을 기술지도해 시공했다. 북한 건설인력은 부흥총회사와 돌격대로 구성됐다. 부흥총회사의 인력은 건설기능공이 있었으나 남측 자재와 공법으로 건설돼 남측 인원이 기술지도를 해야 했고, 돌격대 인원은 건설 경험이 없어 시공 능률이 많이 떨어졌다.
[주간경향]
2018년 새해 첫날 많은 사람이 텔레비전을 통해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를 보고 있었다. 북한은 신년사에서 평창올림픽 참가를 시사했다. 이를 계기로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이 열리면서 당시 악화됐던 상황이 반전됐다. 이렇듯 스포츠 교류는 남북 갈등을 해소하는 최고의 대화 창구 역할을 해왔다.
2018년 새해 첫날 많은 사람이 텔레비전을 통해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를 보고 있었다. 북한은 신년사에서 평창올림픽 참가를 시사했다. 이를 계기로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이 열리면서 당시 악화됐던 상황이 반전됐다. 이렇듯 스포츠 교류는 남북 갈등을 해소하는 최고의 대화 창구 역할을 해왔다.
남북 스포츠 교류의 역사
남북 간 스포츠 교류는 다른 분야에 비해 일찍 시작됐고 빈번하기도 했다. 남북 체육계 최초의 접촉은 1957년에 있었다. 1957년 조선올림픽위원회는 국제올림픽위원회를 통해 대한올림픽위원회에 국제대회 단일팀 구성 참가를 제의했다. 이는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가 남한올림픽위원회만을 한반도에서 유일한 올림픽위원회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한은 전쟁이 끝난 후 대결 국면이 지속되고 있다는 이유로 단일팀 논의를 거부했다.
북한은 남한의 거부로 단일팀이 구성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IOC에 북한을 회원국으로 승인할 것을 요구했다. 1963년 바덴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북한은 정식 회원국으로 인정됐다. 북한이 IOC 회원국이 되면서 남북 간에는 본격적인 스포츠 대결이 시작됐다. 남북 간 최초의 경기는 도쿄올림픽 배구 예선전이었다. 인도에서 열린 대회에서 남자배구팀은 이겼으나, 여자배구팀은 졌다. 남한 정부는 남북 스포츠 대결 대비책으로 1966년 태릉선수촌을 설립했다.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부터는 남한이 경기에서 우위를 보이게 됐으며, 1982년 아시안게임부터는 북한이 스포츠 분야에서 남한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는 남한 경제의 성장과 북한 경제의 후퇴 그리고 남한의 스포츠에 대한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투자의 영향이었다.
IOC는 ‘88 서울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남북화해와 협력을 희망했다. IOC의 중재로 1985년 10월 8일에서 1986년 7월 15일에 걸쳐 4차례 회담이 진행됐다. 북한은 올림픽 공동 개최와 단일팀 구성을 주장했고, 남한은 일부 종목 경기의 북한 배정(분산개최)과 개·폐회식 공동입장을 주장했다. 그러나 1년간의 협의에도 불구하고 양측은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1988년 1월 11일 북한이 서울올림픽 불참을 선언함으로써 남북체육회담은 결렬됐다.
1990년대가 되면서 남북 스포츠 교류는 그동안 논의만 이루어졌던 수준에서 남북단일팀 구성 등의 구체적인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1991년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 대회에서 남북이 최초로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공동 입장했으며, ‘여자 단체전 우승’이라는 성과를 냈다. 단체전 우승은 중국이 18년간 우승을 독점하고 있었던 벽을 넘은 것이었다. 이는 2012년 〈코리아〉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평양류경정주영체육관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협력사업이 활발하게 추진됐다. 금강산 관광사업을 합의한 현대그룹은 1998년 10월 29일 북한의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와 ‘실내 종합체육관 건설 및 민간급 체육 교류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했다.
합의서에 따라 평양류경정주영체육관 건설이 시작됐다. 사실 남북 스포츠 교류가 오랜 기간 이루어졌으나 북한에 관련 시설을 건립한 것은 류경정주영체육관과 금강산 골프장이 유일하다. 류경정주영체육관은 2003년 준공돼 북측이 사용하고 있으나 금강산 골프장은 2008년 완공돼 시범경기까지 했으나 관광 중단 이후 전혀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류경정주영체육관은 현대그룹의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업지구 등의 경협 사업 추진을 위한 부대사업적 의미가 있었지만 정주영 회장의 스포츠에 대한 애정도 일정 부분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주영 회장은 88올림픽 유치위원장을 지냈고, 매년 그룹 신입사원들과 씨름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체육관은 남북체육 활성화를 위한 목적으로 건설하고 현대와 북측이 협력해 건설하기로 합의됐다. 체육관 건설을 위한 설계, 기술인력, 주요자재 공급은 현대가 맡았다. 인허가 및 공사 인력을 위한 편의, 건설을 위한 노동력, 현지에서 공급할 수 있는 자재(모래 같은 골재, 석재, 시멘트 등)는 북측이 분담하기로 했다. 체육관이 준공되면 농구, 배구, 레슬링, 태권도 등의 경기를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설날 등에는 씨름, 농악 등 민속경기 행사를 진행하며 남북협력을 통해 국제경기에도 출전하기로 합의했다.
체육관의 위치는 평양직할시 보통강구역 류경호텔 부근으로 하고 부지면적 약 6만7000㎡, 연면적 약 2만7000㎡이며, 관람석은 주경기장 1만2309석, 부경기장 164석으로 돼 있다. 계획설계는 북한의 노동당 재경부 소속 설계사무소로 알려져 있는 백두산건축연구원에서 하고, 실시설계는 현대건설 종합설계실에서 했다. 북한의 건축가들과 남한의 건축가들이 만나서 함께 작업한 것은 아니지만 남북이 공동으로 설계한 최초의 사례였다.
현대그룹은 대북사업을 위해 현대아산을 1999년 2월 설립했으며, 현대아산이 체육관 건설도 총괄했다. 건설 자금은 현대그룹 계열사(현대건설,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등)가 분담했으며, 시공은 현대건설이 담당했다.
1999년 9월 현대아산은 통일부로부터 체육관 건설을 위한 협력사업자 승인을 받았다. 1999년 9월 27일 체육관 착공을 했으며, 착공식 행사로 평양에서 남북 농구경기를 했다. 농구경기에는 남한에서 허재, 이상민, 전주원(여자농구) 등이 참가했다.
공사는 남한의 건설기능공이 북한 인력을 기술지도해 시공했다. 북한 건설인력은 부흥총회사와 돌격대로 구성됐다. 부흥총회사의 인력은 건설기능공이 있었으나 남측 자재와 공법으로 건설돼 남측 인원이 기술지도를 해야 했고, 돌격대 인원은 건설 경험이 없어 시공 능률이 많이 떨어졌다.
자재는 북측에서 조달할 수 있는 자재가 골재(모래, 자갈) 외에는 거의 없어 남측 자재를 인천에서 남포항으로 해상 운송했다. 당초 북한은 건축용 석재, 시멘트 등을 부담하기로 했으나 대부분 남측에서 조달했다. 북측 시멘트를 구입해 사용하는 방안이 검토되기도 했지만 풍화가 심하거나 기준 설계강도에 미달하는 등 품질이 균일하지 않아 남측 시멘트를 사용했다.
운송 및 건설장비도 북측에서 조달할 수 없었다. 레미콘트럭(에지테이터트럭), 타워크레인, 차량크레인(하이드로크레인), 트럭, 지게차 등을 남측에서 반입했다. 남측 인력은 입국 시에는 중국의 심양공항을 거쳐 고려항공을 타고 평양 순안으로 들어갔고, 출국 시에는 북경을 거쳐서 나왔다. 숙식은 문수리 초대소를 이용했다. 자재의 해상운송비, 남측 인력의 체류비, 해외근무수당 등으로 인해 국내 공사에 비해 공사비가 추가로 들어갔다.
2003년 5월경 체육관 공사는 마무리됐다. 평양체육관은 정주영 회장의 남북교류 기여를 기념해 류경정주영체육관으로 명명됐다. 류경은 평양 대동강변에 버드나무가 많아 지어진 별칭이다. 공사는 총 5600만달러 정도가 투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준공식은 2003년 10월 6일 열렸다. 현대아산 직원과 초청받은 1000여명이 버스를 타고 공사 중이었던 경의선 도로와 개성-평양 간 고속도로를 통해 평양을 방문했다. 일반인이 육로로 평양을 방문한 것은 이때가 최초였으며, 현재까지도 전례가 없는 일이다. 준공식은 남자농구, 여자농구경기가 열렸고, 경기 후 통일음악회가 열렸다. 남측 참석자 1000여명은 개막식 참석 후 3박4일간 머물면서 평양관광, 개성관광을 하고 복귀했다. 남측 참석자들은 고려호텔과 양각도 호텔에서 숙식했다.
남북체육교류 새로운 시작
당초 정주영체육관은 준공 후 북측과 현대가 공동으로 운영하면서 정기적으로 스포츠 경기와 행사를 하기로 합의했으나 현대는 운영에 관여하지 못했다. 체육관은 이후 평양세계복싱선수권대회, 조용필 평양 공연 등에 사용됐다. 2013년 세계역도선수권대회가 정주영체육관에서 열렸고, 북한에서 최초로 태극기가 게양되고 애국가가 연주되기도 했다.
준공 후 북한의 일방적인 합의 불이행으로 지속적인 체육교류가 이어지지 못한 부분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일 체육교류가 지속될 수 있었다면 남측사람들의 평양 관광도 계속될 가능성이 있었고, 남북체육교류는 한 단계 높은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2017년 5월 취임한 문재인 정부는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남북관계 복원의 계기로 삼으려고 했다. 북한은 2018년 김정은이 발표한 신년사에서 평창올림픽 참가를 선언했고, 이에 따라 남북체육회담이 금강산에서 열리는 등 평창올림픽을 위한 준비가 급속하게 진행됐다. 올림픽 개·폐회식 공동입장, 여자아이스하키팀 단일팀 구성, 개막행사 북한 공연단 참가 등이 합의됐고, 평창올림픽은 성공적으로 개최됐다. 북한 응원단도 2005년 인천육상선수권대회 이후 12년 만에 방문했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남북관계는 복원돼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이 잇달아 열렸다. 하지만 2019년 2월 북미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다시 남북체육교류는 침체됐다. 남북은 2032년 올림픽을 공동으로 개최하기로 하고 유치를 추진하고 있으나 코로나19 여파로 중단된 상태이다. 만약 올림픽 남북공동 개최가 성사된다면 남북스포츠 교류가 획기적으로 확대되는 것은 물론이고, 남북교류도 새로운 단계로 발전할 것으로 기대된다.
변상욱은 건축사, 건축시공기술사다. 1999년부터 현대아산 기술관리부에서 일하며 금강산관광지역 건설사업을 관리했다. 이 시기 금강산 호텔, 금강산 옥류관 건설 등에 참여했다. 이후 2004년부터 2016년까지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에서 건설사업과 공장건축인허가업무를 담당했다. 2007년 산업포장을 받은 바 있다.
변상욱 건축사 | 정리·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운송 및 건설장비도 북측에서 조달할 수 없었다. 레미콘트럭(에지테이터트럭), 타워크레인, 차량크레인(하이드로크레인), 트럭, 지게차 등을 남측에서 반입했다. 남측 인력은 입국 시에는 중국의 심양공항을 거쳐 고려항공을 타고 평양 순안으로 들어갔고, 출국 시에는 북경을 거쳐서 나왔다. 숙식은 문수리 초대소를 이용했다. 자재의 해상운송비, 남측 인력의 체류비, 해외근무수당 등으로 인해 국내 공사에 비해 공사비가 추가로 들어갔다.
2003년 5월경 체육관 공사는 마무리됐다. 평양체육관은 정주영 회장의 남북교류 기여를 기념해 류경정주영체육관으로 명명됐다. 류경은 평양 대동강변에 버드나무가 많아 지어진 별칭이다. 공사는 총 5600만달러 정도가 투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준공식은 2003년 10월 6일 열렸다. 현대아산 직원과 초청받은 1000여명이 버스를 타고 공사 중이었던 경의선 도로와 개성-평양 간 고속도로를 통해 평양을 방문했다. 일반인이 육로로 평양을 방문한 것은 이때가 최초였으며, 현재까지도 전례가 없는 일이다. 준공식은 남자농구, 여자농구경기가 열렸고, 경기 후 통일음악회가 열렸다. 남측 참석자 1000여명은 개막식 참석 후 3박4일간 머물면서 평양관광, 개성관광을 하고 복귀했다. 남측 참석자들은 고려호텔과 양각도 호텔에서 숙식했다.
남북체육교류 새로운 시작
당초 정주영체육관은 준공 후 북측과 현대가 공동으로 운영하면서 정기적으로 스포츠 경기와 행사를 하기로 합의했으나 현대는 운영에 관여하지 못했다. 체육관은 이후 평양세계복싱선수권대회, 조용필 평양 공연 등에 사용됐다. 2013년 세계역도선수권대회가 정주영체육관에서 열렸고, 북한에서 최초로 태극기가 게양되고 애국가가 연주되기도 했다.
준공 후 북한의 일방적인 합의 불이행으로 지속적인 체육교류가 이어지지 못한 부분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일 체육교류가 지속될 수 있었다면 남측사람들의 평양 관광도 계속될 가능성이 있었고, 남북체육교류는 한 단계 높은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2017년 5월 취임한 문재인 정부는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남북관계 복원의 계기로 삼으려고 했다. 북한은 2018년 김정은이 발표한 신년사에서 평창올림픽 참가를 선언했고, 이에 따라 남북체육회담이 금강산에서 열리는 등 평창올림픽을 위한 준비가 급속하게 진행됐다. 올림픽 개·폐회식 공동입장, 여자아이스하키팀 단일팀 구성, 개막행사 북한 공연단 참가 등이 합의됐고, 평창올림픽은 성공적으로 개최됐다. 북한 응원단도 2005년 인천육상선수권대회 이후 12년 만에 방문했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남북관계는 복원돼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이 잇달아 열렸다. 하지만 2019년 2월 북미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다시 남북체육교류는 침체됐다. 남북은 2032년 올림픽을 공동으로 개최하기로 하고 유치를 추진하고 있으나 코로나19 여파로 중단된 상태이다. 만약 올림픽 남북공동 개최가 성사된다면 남북스포츠 교류가 획기적으로 확대되는 것은 물론이고, 남북교류도 새로운 단계로 발전할 것으로 기대된다.
변상욱은 건축사, 건축시공기술사다. 1999년부터 현대아산 기술관리부에서 일하며 금강산관광지역 건설사업을 관리했다. 이 시기 금강산 호텔, 금강산 옥류관 건설 등에 참여했다. 이후 2004년부터 2016년까지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에서 건설사업과 공장건축인허가업무를 담당했다. 2007년 산업포장을 받은 바 있다.
변상욱 건축사 | 정리·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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