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에서 돌아온 판사 [법정에서 못다 한 이야기 (16)]
2021. 4. 14. 06:29
[주간경향]
“이들의 머릿속에는 법으로 만든 가상세계가 들어 있을 것이다. 거기서는 모든 것이 다르게 불린다. 가령 떨어지는 나뭇잎은 ‘분리되는 토지의 정착물’이라고 해야 한다. 사람이 토끼를 잡는 것은 ‘선점’, 토끼를 동네사람에게 나눠주는 것은 ‘인도’라고 해야 한다. 그로 인해 동네사람에게는 ‘부당이득’이 발생해야 한다고 해야 한다. 동네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자기들끼리 주고받으면서 키득거린다.”
“이들의 머릿속에는 법으로 만든 가상세계가 들어 있을 것이다. 거기서는 모든 것이 다르게 불린다. 가령 떨어지는 나뭇잎은 ‘분리되는 토지의 정착물’이라고 해야 한다. 사람이 토끼를 잡는 것은 ‘선점’, 토끼를 동네사람에게 나눠주는 것은 ‘인도’라고 해야 한다. 그로 인해 동네사람에게는 ‘부당이득’이 발생해야 한다고 해야 한다. 동네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자기들끼리 주고받으면서 키득거린다.”
이들은 누구일까? 대부분 대한민국 법학전문대학원생이거나 법률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오답은 아니지만, 김희균 교수는 서양 중세에서 가장 오래된 ‘볼로냐 대학’에서 로마법을 공부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법학박사의 생각과 대화를 상상했다. 평균 수명이 50세도 안 되던 시절, 20년 가까이 유학생활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은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외계인의 언어로 말하고 재판했다. 배우지 못한 고향 사람들은 이들의 권위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동네사람들은 못 알아듣는 말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곽윤직 교수의 〈민법총칙〉을 읽으며, 법학에 ‘친하지 아니한(이 용어도 그 책에서 처음 보았다)’ 법학도라고 낙심했다. 그 책은 전혀 듣지 못한 법률 개념을 정의하고 분류한 다음 법리를 설명했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현실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읽고 또 읽으면서 ‘무엇에 대해서 논하라’는 문제에 그럭저럭 답안지를 채울 수 있었다. 탄력이 붙었는지, 형법과 헌법 등 다른 사법시험 과목도 몇 회독하며 조금은 쉽게 같은 길을 걸었다. 사법연수원에서는 모의기록을 ‘요건사실’과 ‘증명책임’에 따라 해부한 후 판례를 적용해 판결문을 작성하는 것을 되풀이해 배웠다. 동기생과 법률용어를 주고받으며 치기어린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공부하느라 세상과는 담을 쌓고 지냈으며, 일상생활은 어떻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법복을 입고 재판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한참 후 사법연수원 교수로 일했는데 제자들 행태는 10여년 전 필자, 수백년 전 볼로냐 졸업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요건사실’과 ‘증명책임’은 무엇인가? 민사사건에서 권리가 발생하거나 소멸하려면 갖춰야 하는 사실이 요건사실이고, 요건사실이 존재하는지 불분명할 때 불이익을 받는 것을 증명책임을 부담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빌려준 돈을 청구하는 경우 요건사실은 ①소비대차계약을 체결하고 ②돈을 건네주고 ③반환 시기가 지나갔다는 것이다. 이자나 지연손해금을 추가하려면 ④이자 약정을 했고 ⑤손해가 발생했음을 별도로 갖춰야 한다. 이에 대해 피고는 ⑥변제했거나 ⑦공탁했거나 ⑧시효가 지나갔다는 사실 등을 들어 의무를 면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도 세부적인 요건사실이 있다. 이런 걸 몰라도 시민은 경제생활을 잘하지만, 법률가는 요건사실과 증명책임에 따라 사적 분쟁을 심판한다. 개념과 수학적 논리는 법률가에게 공구박스에 들어 있는 공구이고 매뉴얼이다. 법률가는 일상적인 분쟁을 만나면 그에 맞는 공구를 꺼내 처리한다. 이런 점에서 요건사실은 법률가들끼리 통용되는 ‘프로토콜(protocol)’이고, 법률가와 시민 사이에 가로놓인 진입장벽이다.
수백년 전 볼로냐 졸업생, 30여년 전 필자, 2021년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한 학생은 개별적으로 다른 사람이지만, ‘법률 개념으로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고 분쟁을 해결하려고 한다(개념법학)’는 점에서는 똑같다. 지금 여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두 눈으로 살펴보지 않고, 오래전부터 법학자들이 법을 분석해 뽑아낸 개념으로 사물과 사건을 추상적으로 분석한다. 그러면서도 ‘법은 어떤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의 삶 그 자체이다. 인간사가 다양한 만큼 법도 복잡하다’고 말한다.
예순이 넘은 지금은 법철학자 라드브루흐의 성찰이 훨씬 마음에 와닿는다. “세계는 단 하나 진리로 가두기에는 너무 풍부하고 생생하다. 법률가에게는 다양한 색채의 세계를 일곱가지 기본색 속으로 던져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식할 때가 언젠가 한 번은 온다. 숲을 보지 않고 나무만 보려고 하는 것이 법학의 끊을 수 없는 본질이다. 법적인 사고는 사람의 가장 구체적인 삶에 그러면서도 가장 추상적인 윤곽에만 관계하도록 요구한다.”
판사는 공감능력이 있어야
청춘시절 화성으로 유학 가서 외계인의 언어로 쓰인 법을 공부했고, 지구로 돌아와 법으로 판단하는 것을 직업으로 택한 사람으로서 이렇게 생각한다. 판사는 개념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분쟁을 분석하고 그에 포섭되는지 예리하게 따져야 한다. 개념이 정의되지 않고 세분화되지 않으면, 재판관의 생각이나 정의감에 따라 결론이 달라져 법적 안정성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념이 현실세계에 실제로 존재한다거나 의미가 고정됐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개념은 법에서 공통적인 것을 모아 정리한 것일 뿐, 법이 작동하는 현실세계가 변하면 그에 맞춰 의미가 바뀌거나 새롭게 부여돼야 한다. 법과 법학은 당대의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다. 법을 적용하기 위해 또는 법률가가 지식을 뽐내고 과시하기 위해 사람들이 다투는 것이 아니다. 수시로 판사는 흑백만 보는 법개념이라는 안경을 벗고, 지금 여기에서 풍요롭고 생생하게 움직이는 현실을 느끼고 듣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기존 개념과 법리에 따른 결론이 양심과 정의감에 비춰 부당하면, 판사는 법원리와 신념에 따라 새로운 개념과 법리를 만들어야 한다.
화성에서 돌아온 판사의 가장 큰 문제는, 동네사람과 공감하고 소통하지 않은 채 개념과 법리만 말하는 것이다. 유학 보낼 때 현자로 돌아오길 기대했는데, 공구만 만지작거리는 기술자로 온 것이다. 공감은 감정이입을 통해 다른 사람과 같이 느끼는 감정이다. 판사는 공감 능력이 있어야 시민에게 필요한 선이 무엇인지 숙고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아무런 죄의식 없이 유대인을 학살하는 데 관여한 아이히만에 대해 평가한 것을 개념에 파묻힌 판사는 곱씹어 보아야 한다.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돼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떤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박형남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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