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코르셋 [꼬다리]

2021. 4. 14. 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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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배우러 가보니 60~70대도 많더라. 나도 60~70세에 용기를 내 공부를 시작하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웠다.” 올해 학력 인정 문해교육으로 초등 학력을 인정받은 한 어르신의 말이다. 그는 큰딸이라 가정 형편 탓에 학교를 다니지 못한 아쉬움을 품고 살아오다 6~7년 전에야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직접 통화를 하며 소감을 묻고 싶었으나, 올해 한국 나이로 91세에 접어들어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데다가 코로나19로 다니던 수영장마저 못 다니며 활력이 많이 떨어졌다고 했다.



대신 소식을 전해준 따님은 이런 말을 했다. “엄마 나이가 원망스럽죠. 나이가 80만 돼도 대안학교도 가고 다 할 수 있겠는데….”

뜻밖에도 이 말에 심장이 ‘쿵’ 하고 울렸다. “나이가 80만 돼도”라니? 80세가 퍽 젊은 나이인 것처럼 말이다. 아니 그러고 보니 60세도 마치 뭔가를 시작하기에 꽤 좋은 시기인 양 말씀하셨네? 내가 보기엔 80대나 90대나 ‘그게 그거’ 같은데 실상 91세 노인은 마찬가지로 노인인 80대를 보며 “아이고 좋을 때다”라고 한다는 것 아닌가.

이날 대화는 내 안의 ‘나이 코르셋’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나이 코르셋은 코르셋이 갈비뼈를 부러뜨리고 숨을 막을 지경으로 몸통을 옥죄듯이, 그저 ‘수’에 불과한 나이가 우리를 과도하게 얽어맨다는 뜻이다. 여성들이 주로 언급하는 용어지만 사실 성별을 떠나 나이 코르셋을 완전히 탈피한 한국인은 없으리라. ‘나이를 잊고 사는 한국인’, ‘나이 신경 쓰지 않는 한국인’이란 어쩐지 형용모순의 극치 같다. 한국어에서 나이란 ‘값’을 해야 하는 것이다. 게임에서처럼 나이별로 깨야 하는 혹은 깰 수 없는 ‘퀘스트’가 있는 양 살아간다.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 나는 중대 결정을 할 때마다 나이를 신경 쓴다. 2019년 1년짜리 휴직을 받아들고 베트남으로 베트남어를 배우러 갈 당시, 고작 29세였던 주제에 마치 30세 전에 중대 과업을 달성하지 못하면 인간 자격을 상실하는 저주라도 씐 양 비장했다. 지난달 대학원에 입학하면서도 그랬다. ‘너무 늦은 건 아닐까’란 생각이 들 때마다 1만원씩 저금했더라면 지금쯤 두툼한 돈방석에 앉았을 것이다.

나이 코르셋을 부정·긍정 두가지로 분류해봤다. ‘서른 살은 너무 늦었으니까 못 한다’는 전자, ‘마흔 살까진 반드시 해봐야지’는 후자다. 흔히 전자만을 생각하지만 후자의 위력도 만만찮다. ‘마흔 살 전엔 한라산을 올라야지’ 마음먹는 순간 마감 기한을 받아든 것마냥 조급해진다. 40세 이후의 인생이란 없는 것처럼 말이다. 뭔갈 시도해 보려다가도 긍정·부정 나이 코르셋의 ‘환장 콜라보’가 작동하기 시작하면 흉통이 갑갑해진다.

이놈의 나이 코르셋을 벗어버릴 방법은 정말 없을까. 어르신에게서 답을 찾아본다. 정말 원하는 일을 ‘나이 때문에’ 망설였다간 후회를 키운다는 진리가 그의 말에 녹아 있다. 오늘이 내 인생에서 가장 늙은 날이자 동시에 가장 젊은 날이라는 낡은 문구도 새삼 와닿는다. 결국 현재를 기점으로 어느 방향을 볼 것인가의 문제다. 과거만 돌아보며 ‘난 너무 늙었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미래를 보며 ‘그래도 아직은 젊으니 해볼 만하다’고 할 것인가. “100세까지 공부하고도 남을 분”인 어르신을 보며 어쩌면 앞으로 내 시선은 미래 쪽으로 좀더 쏠리겠다는 예감을 했다.

‘꼬다리’는 어떤 이야기나 사건의 실마리를 하는 꼬투리의 방언이다. 10년차 이하 경향신문 기자들이 겪은 일상의 단상을 전한다. ‘꼬’인 내 마음 ‘다’ 내보이 ‘리’라는 의미도 담았다.


김서영 정책사회부 기자 westze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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