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는 말이야 [편집실에서]

2021. 4. 14.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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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예전에는 말이야….” 외할아버지의 연설이 시작되면 ‘또 시작한다’ 싶어 저는 딴청을 피웠습니다. 60년 전만 해도 보리가 파릇파릇 올라오는 이맘때가 1년 중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합니다. 이른바 ‘보릿고개’지요. 굶어죽는 게 이상하지 않던 시절, 외할아버지 머릿속에는 2남4녀 자식새끼들을 먹여살리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은 없었을 겁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지나온 1920년대생 외할아버지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영웅이었습니다. 나라경제를 이만큼이나 발전시킨 공로가 크다는 것이지요. 이분들이 산업화 세대입니다.

안타깝게도 외할아버지의 장광설은 저를 별로 설득시키지 못했습니다. 1970년대 태어난 저는 당신과는 ‘역사적 경험치’가 달랐습니다. 김치에 계란프라이뿐인 찬 도시락이 지겹기는 해도 굶어죽는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소시지, 참치, 햄으로 반찬은 갈수록 풍성해졌고, 학창시절이 끝날 즈음에는 보온도시락으로 ‘따스운 밥’도 먹어봤습니다. 제가 잊지 못하는 한 문장이 있습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초등학교 때 외웠던 국민교육헌장입니다. 얼마나 학교에서 닦달했으면 지금까지도 뇌리에 딱 박혀 있을까요. ‘중흥’이 뭔지, ‘사명’이 뭔지도 몰랐지만 그냥 머릿속에 쑤셔넣어야 했습니다. 오후 5시만 되면 온 마을에 사이렌이 울리고, 모두가 국기게양대를 향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괴기스러웠습니다. 정권 비판을 하면 국가보안법으로 잡혀가던 시절, 그때는 말할 자유가 더 중요했습니다.

4·7 재보궐선거에서 20대가 국민의힘을 지지했다고 합니다. 20대는 배를 곯은 기억도, 할 말을 못 한 기억도 없습니다. 비만이 걱정이고, 가짜뉴스가 걱정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산업화 세대와도, 민주화 세대와도 ‘역사적 경험치’가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문제는 가난과 군사독재가 끝났어도 살아가는 것이 팍팍하기는 마찬가지더라는 겁니다. 취업난에 일자리를 얻기 힘들어졌고, 폭등한 집값에 집을 사는 건 엄두도 못 냅니다. 그렇다고 세상이 그다지 공정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자산은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가 꽉 틀어쥐고 놓지를 않습니다. 제가 20대라도 분노했을 것 같습니다. 20대가 지난해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을, 이번 재보궐에서 국민의힘을 선택한 배경이었을 수 있습니다.

20대의 ‘행동’은 반갑습니다. 그동안 20대는 정책대상에서 소외됐습니다. 쪽수는 적었고, 선거참여도 미미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재보궐선거에서는 캐스팅보트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꼰대’들은 20대가 한자도 모르고, 철학도 빈약하다고 걱정합니다. 그러나 제가 만나본 20대는 꼰대들보다 훨씬 유능했습니다. 영어도 잘하고, 모바일 세상에도 최적화돼 있었습니다. 국제감각도 뛰어났습니다. 20대는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가 아닌 첫 번째 세대입니다. ‘20대 개XX론’으로 매도하기보다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려 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라떼는 말이야”로는 안 됩니다. 열한 달 뒤 눈물 대신 환호를 내지르고 싶다면 말입니다.

박병률 편집장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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