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가, 어떻게, 왜 부족한가'를 알아야 그 이후도 있다 [기초학력도 인권이다(하)]
[경향신문]
“심각하다.”
기초학력 문제는 교육계에 있는 누구에게 물어봐도 같은 답이 돌아온다.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교사는 물론 교육 양극화를 고민하며 공교육 정상화 해법을 찾는 교육당국과 정책 전문가 모두 기초학력 부진을 체감한 지 오래다. 하지만 부진의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물어보면 선뜻 답을 내놓지 못한다. 코로나19 사태로 기초학력이 떨어졌다, 학습공백이 커졌다는 말은 많이 한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실증적 데이터는 찾기 힘들다.
정확한 진단 없이 제대로 된 처방이 나올 리 만무하다. 기초학력 보장을 위해 기초학력에 관한 가장 기초적인 이야기를 시작할 때다.
■ 기초학력이란 무엇인가
‘삶 영위에 필요한 최소한의 능력’
아일랜드·영국 등 ‘표준화 평가’
진단 단계부터 소외 없게 하고
교육지원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
전문가들은 ‘기초학력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부터 정립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초학력과 기본학력 등으로 혼재된 용어를 단순히 통일하자는 것이 아니다. 과연 학생들이 필수적으로 성취해야 하는 학력은 ‘무엇’인지, 공교육이 보장해야 하는 학력의 가장 밑바탕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 논의해야 한다는 뜻이다.
김유리 서울시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 연구위원은 “기초학력은 학습에 대한 기초체력이자 근육”이라고 했다. 전체 학습에 필요한 최소한의 도구적 역량이라는 의미다. 김 연구위원은 “공교육에서 챙겨야 하는 것은 문해력과 수리력”이라며 “문해력과 수리력에서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대식 경인교대 특수교육과 교수도 “기초학력 보완은 늦어도 초등 2학년까지는 이뤄져야 한다”며 “문해력과 수리력이라는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읽고 쓰고 셈하는 능력 없이는 학력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기초학력에 어휘력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한자어가 많은 한국어 특성상 학습을 위해선 어휘 습득이 필수라는 것이다. 김승호 세한대 교수는 “학생들이 학년이 올라갈수록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건 양서류, 파충류와 같은 기본어휘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일부 전문가는 정서 능력과 의사소통 능력을 기초학력에 포함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에 대해서는 “정서 및 의사소통 능력은 초2 이후에도 향상 가능성이 있으며 당장 전체적인 학습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크지 않다. 급한 우선순위라고 보기는 어렵다”(이대식 교수)는 반론도 있다.
■데이터도, 해법도 없다
기초학력에 대한 정립된 개념이 없다보니 마땅한 데이터도 찾기 어렵다. 기초학력 미달 학생의 규모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연구는 없다시피하다. 청소년기에 기초학력이 부족한 경우 성인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기초학력 미달 학생이 정책 지원으로 얼마나 개선됐는지 추적 연구도 불가능하다. 특수교육 대상자 중 학습장애 학생 비율(약 1.5%),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에 따른 기초학력 미달 비율(2~10% 내외), 난독증 학생 비율(연구마다 다름), 개별 진단평가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짐작할 뿐이다.
그나마 이 수치도 현실을 온전히 반영한다고 보기 어렵다. 표집 학생을 추출해 실시하는 학업성취도 평가는 학생 개개인에게 맞춤형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다. 이대식 교수는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는 개별 아이가 아닌 우리나라 실태를 나타낼 뿐”이라며 “온도계처럼 대략적인 전체 수준을 보여주는 지침으로 삼아야지 기초학력 대책을 세우는 기초자료로 활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밝혔다.
학교별로 진행하는 기초학력 진단평가 역시 ‘모자라다’는 것만 보여줄 뿐 구체적으로 어디가 부족한지,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시하지 못한다. 이경아 민주연구원 연구위원(교육정책학 박사)은 “우리 공교육의 문제는 학생과 학부모에게 누적된 교육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초등 4학년 학생이 분수 계산을 못할 경우 2학년 교과과정부터 막혔는지, 3학년 과정에서 막혔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진단 없는 처방’을 넘어서려면 객관적이고 표준화된 진단도구를 활용해 진단 대상을 확대해야 한다. 서울시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이 지난해 작성한 ‘기초학력 진단 및 지원 방안 연구’를 보면 아일랜드·영국·캐나다·호주 등은 각각 기초학력을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능력’으로 보고 문해력과 수리력 측정을 위해 표준화 평가를 실시한다. 캐나다에서는 매년 4학년과 7학년에게 문해력과 수리력 기초능력 평가를 실시한다. 호주는 3·5·7·9학년이 국가수준 언어 및 수리능력 시험을 치른다.
보고서는 “개별 학생의 성장을 확인하기 위한 표준화된 진단도구를 개발해야 한다”며 “학생에 대한 평가가 아니고 개별 학생의 교육지원을 위한 평가여야 한다. 진단하는 단계에서부터 소외되는 학생이 없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 ‘낙인’이 아니라 ‘권리’
학습 부진 개인 탓 ‘미달자’ 낙인
기초학력 문제 해소에 걸림돌
맞춤형 개별 진단 제공 필요
민감정보로 분류해 공개 말아야
기초학력 진단을 세분화할 필요도 있다. 이대식 교수는 “학생의 수준, 오류 유형, 학습 습관, 학습 관련 핵심 인지기능 정도 등에 대한 구체적이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진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읽기의 경우 자·모음 원리, 받침소리, 필수 어휘 습득 정도, 언어 이해 및 독해 등 영역별로 학생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또래에 비해 문자해독, 수감각, 철자 쓰기 등이 부족하면 체계적 지도가 필요하다고 봐야 한다”면서 “이렇게 세세한 진단은 교사가 하기 어렵기 때문에 평가 도구가 필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핵심은 학생 개개인을 개별 진단하는 것이다. 기초학력 미달 학생은 학습장애부터 누적된 학습결손, 단순히 학습을 소홀히 한 경우까지 배경과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김영식 좋은교사운동 공동대표는 “초등학교 6학년이지만 3~4학년 수준인 아이를 위한 진단 시스템이 없다. 아이들이 왜 기초학력이 미달되는지 원인부터 제대로 분석한 후 부진 학생을 대상으로 진단해야 한다”며 “현재 (전체 인구의) 1~2% 수준인 특수교육 대상자 비율을 제대로 파악하고 부진 특성에 맞춰 효과가 검증된 종합적인 지도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초학력 미달자에 대한 부정적 낙인효과도 없어야 한다. ‘또래보다 뒤처지는 아이’라는 낙인이 찍힐까봐, ‘내 아이가 그럴 리 없다’는 현실 부정 등 이유로 보호자가 특수교육 대상자 검사와 기초학력 교실 참여를 거부할 경우 학교도 방법이 없다. 특성화고 교장을 지낸 이민철 전 서울시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장은 “학생들에게 기초학력 미달로 선별됐다는 것은 자존감을 훼손했다는 점에서 역린을 건드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미달 학생을 따로 분류해 기초학력 교실을 운영하는 방식은 낭패감과 실패감을 키운다”고 말했다. 이 전 원장은 “이들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목소리가 점점 묻히는 경험을 한다”며 “학습 의욕을 일깨워주려면 격려하고 북돋아주면서 정당하게 인정받는 체험을 하게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공부를 못하면 발언권이 약해지는 학교 현실, 학업 부진을 개인 탓으로 돌리는 풍토 또한 기초학력 문제를 해소하는 데 걸림돌이다. 김승호 교수는 “의무교육 기간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 학부모를 처벌하는 이상 공교육이 기본적인 것은 책임을 져야 한다”며 “학습 부진은 부모나 아이가 아닌 국가의 교육 책임”이라고 말했다.
■ 진단 확대가 아니라 줄세우기가 문제
교육계에선 기초학력 진단을 확대하고 표준화하는 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기초학력 진단 결과가 학교 평가에 반영되고, 그것이 학교별·시도별 줄세우기, ‘우리 학교에 미달자는 없다’는 보고를 위한 파행적 학사운영으로 이어진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 학업성취도 평가가 전수조사 방식의 일제고사로 실시될 때 각급 교육청은 성적에 따라 학교 순위를 공개했다.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시·도별 결과를 근거로 성적이 좋지 않은 지역의 교육감을 질타했다. 학업성취도 평가 향상도가 교원 성과급에도 반영됐다. 정소영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대변인은 “학부모들이 학교별로 비교하고 교육청서 ‘개선하라’는 지침이 내려오면 일선 학교는 기초학력 진단검사에 대비해 문제풀이를 할 수밖에 없다”며 “표면상으론 기초학력이 채워지겠지만 장기적으로 배움에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과거와 같은 기초학력 진단은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이대식 교수는 “기초학력 문제는 요란을 떨면 안 된다”며 “진단도구를 통해 실제로 진단을 하고 결과를 취합·분석하는 과정이 학교가 ‘으레 하는 일’로 자연스럽게 인식돼야 한다. 기초학력 진단과 보완이 교육청 주도 사업처럼 되다보니 교사들이 반대하는 것”이라고 했다.
김유리 연구위원도 “표준화된 진단의 전제조건은 학생 스스로 성장을 확인하는 게 목적이고, 객관적인 판단 근거로만 활용돼야 한다는 점”이라며 “진단 결과는 학생 개개인의 민감 정보로 분류해 공개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 연구위원은 “우려 때문에 실증을 못하고 있다는 건 교육적으로 엄청난 손해”라며 “기초학력 진단에 대한 인식을 개선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기초학력 진단의 확대·표준화 자체가 아니라 그릇된 방법이라는 것이다. 마치 확대·표준화 자체가 문제인 것처럼 오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교육당국의 직무유기라는 뜻이기도 하다.
교사와 학생에게 기초학력 부진을 메꿔나갈 시간적·심리적 여유를 주려면 교육과정을 핵심만 남기고 간소화할 필요도 있다. 교육과정상 명시된 ‘성취기준’이 과도하게 많다는 건 교육계에서 꾸준히 나오는 지적이다. 각 단원·차시마다 반드시 가르쳐야 할 내용이 지나치게 규정돼 있다보니 교사는 진도 나가기에 급급해 아이들 학습 상황을 찬찬히 살펴볼 수 없다는 것이다.
■ ‘일제고사냐, 아니냐’ 이분법을 넘어
국회에는 기초학력보장법안이 발의돼 있다. 이 법안은 기초학력을 ‘학생이 학교 교육과정을 통해 갖춰야 하는 최소한의 성취기준을 충족하는 학력’으로 정의한다. 교육부 장관 소속 기초학력보장위원회를 신설하고 이 위원회가 5년 주기로 ‘기초학력 보장 종합계획’을 수립하도록 돼 있다. 학교장이 기초학력 진단검사를 실시해 그 결과를 보호자에게 알리도록 규정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법안을 둘러싸고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나온다. 교원단체도 의견이 엇갈린다. 전교조는 과거 일제고사의 부활 가능성을 우려해 회의적인 입장이다. 반면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와 교사노조연맹은 공감한다는 뜻을 밝혔다. 기초학력보장법을 대표발의한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강득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시·도교육청 차원에서도 다양한 지원사업과 제도를 마련하고 있으나 제도의 안정성이나 연속성을 갖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며 “코로나19 상황을 생각하면 국가·지역·학교의 책임성 강화를 위한 제도를 미룰 수 없다”고 말했다.
기초학력을 둘러싼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저마다 나름의 논거와 역사적 경험, 현실적 판단이 있다. 깊게 들어가면 교육철학의 뿌리와 닿는 예민한 쟁점도 있다. ‘일제고사 부활이냐, 반대냐’는 이분법적 구도가 생산적 대화를 가로막은 측면도 있다. 분명한 것은 그러는 사이 적지 않은 학력부진 아이들이 오늘도 공교육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는 사실이다. 어디에서 출발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아이들에게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영식 공동대표는 “기초학력 문제는 가난한 아이들, 발달이 취약한 아이들, 우리 교육의 한계가 동시에 엉켜있다”며 “아이들을 위해 정교하게 전체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유리 연구위원은 “기초학력의 개념과 평가, 지표에 관한 논의는 발전적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학생의 입장에서 출발해 보면 ‘답’이 보이지 않겠느냐”고 밝혔다.
<시리즈 끝>
김서영·이성희 기자 westze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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