괘불이 왜 천주교 성지에?

정상혁 기자 2021. 4. 1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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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 마친 '화엄사 영산회 괘불탱'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서 첫 공개
"종교의 경계 넘어선 숭고한 화합"
서울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에 특별 전시된 ‘화엄사 영산회 괘불탱’을 13일 한 관람객이 바라보고 있다. 진본은 약 40일간 전시된다. /남강호 기자

천주(天主)와 부처가 한 공간에 머문다.

지금 서울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에는 ‘화엄사 영산회 괘불탱’(국보 301호)이 걸려있다. 설법하는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보현과 문수보살이 좌우에 자리 잡고, 네 귀퉁이에서 사천왕이 세계를 보위한다. 조선 효종대에 그려진 1208x769㎝ 규모의 웅장한 채색 회화는 문화재 보수정비 사업에 따라 2019년 3월 은둔에 들어갔고 지난달 복원이 완료됐다. 새 모습으로 대중에게 공개되는 첫 장소가 사찰 아닌 천주교 기관인 것이다. 전시 감독을 맡은 김영호 중앙대 교수는 “지금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재앙의 시대에 꼭 필요한 그림”이라며 “종교의 경계를 넘어서려는 의지가 이 그림을 여기까지 오게 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대표적 천주교 순교 성지에 자리 잡은 이 박물관에서 현대 불교 미술전 ‘공(空)’이 6월까지 열린다. 조선 후기 성인(聖人) 103위 중 44위, 복자(福者) 123위 중 27위가 신앙을 지키려다 이곳 서소문 밖 네거리에 설치된 사형터에서 참형당했다. 천주교 성지에서 열린 이례적인 불교 미술 전시에 대해 주최 측은 “천주교 신자뿐 아닌 많은 이들이 스러져간 역사적인 공간”이라며 “관세음(觀世音)의 뜻 그대로 우리가 당면한 세상의 목소리를 살피고 성찰한다”고 설명했다. 분열과 갈등의 양상을 넘어서려는 숭고미가 담긴다.

현대미술로 재해석한 불교. 위부터 이종구 화가가 그린 그림 '사유-생로병사', 복도에 설치된 김승영 작가의 영상 '쓸다'.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이 복판에 ‘화엄사 영산회 괘불탱’이 있다. 큰 법회가 열릴 때 법당 앞뜰에 걸어놓는 그림으로, 워낙 거대해 다 펼친 상태로는 좀처럼 구경하기도 힘들다. 화엄사 주지 덕문 스님은 흔쾌히 대여 결정을 내렸다. 김 교수는”만나 뵙고 전시 취지를 말씀드렸더니 ‘괘불을 뜻깊은 공간에서 전시해주시니 감사하다’고 덕담해주셨다”며 “불화(佛畵)는 대중을 위해 제작된 것이니 마땅히 널리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시더라”고 말했다. 전란(戰亂) 이후 제작된 이 믿음의 형상이 호국의 의미를 상기시킨다. 12일 개막식에 참석한 염수정 추기경은 “어려운 시기 모두가 같은 배를 타고 있고 혼자서는 살아남지 못한다는 성찰을 더 크게 한다”고 말했다. 이 진본 그림은 40일 정도 뒤에 모사본으로 교체될 예정이다.

현대미술 30여점이 공간과 사상의 조화를 완성한다. 이수예 화가는 천불도(千佛圖)와 내영도(來迎圖)에서 주제를 빌려와 서있는 천불의 가지각색 표정을 그려냈고, 이종구 화가는 미소 짓는 반가사유상을 패러디해 생멸 변화하는 세계를 화폭에 옮기는 식이다. 설치미술가 김승영은 괘불 맞은편 건물에 난 약 10m 길이 캄캄한 복도에 3분짜리 영상 ‘쓸다’를 틀어놨다. 서울 진관사 마당에서 비질하는 비구니 한 명이 벽면에 투사되는 동시에, 복도 바닥 무늬도 시시각각 변화한다. 어둠을 울리는 비질 소리, 땅을 상처냈던 발자국이 지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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