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법정서 온종일 녹음파일 재생만..'황제재판' 논란
[경향신문]
지난 12일 오후 2시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510호 형사법정.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의 사법농단 의혹 사건 재판에서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판사, 검사, 변호인, 피고인 모두 스피커에서 흘러 나오는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의 녹음된 증언만 들었다.요즘 양 전 대법원장 등의 재판은 전임 재판부에서 진행했던 주요 증인들의 증언 녹취파일만 듣다가 끝난다. 지난 2월 법원 정기인사로 재판부 3명이 전부 바뀌어서 새롭게 꾸려진 형사합의35-1부(재판장 이종민)가 공판 갱신 절차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전임 재판부가 이미 주요 증인들의 신문을 진행했다는 점이다. 피고인들은 증인신문을 녹음한 파일을 새 재판부가 법정에서 다시 들어보는 방식으로 증거조사를 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주장했다. 검찰은 “녹음을 다 틀게 되면 (공판 갱신 절차에만) 1년이 넘게 소요된다”고 반발했다. 재판부는 피고인 측 요청이 원칙적으로 맞다며 받아들였다.
다만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요구한 주요 증인 4명에 대해서만 녹음을 듣기로 했다. 12일까지 두 기일째 녹취파일을 들었는데, 앞으로도 최소 14회 재판 내내 녹취파일을 들어야 한다. 전임 재판부에서 이규진 전 상임위원 6회,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5회, 한승 전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장 2회, 강형주 전 법원행정처 차장 3회에 걸쳐 증인신문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판 진행이 공판중심주의의 취지에는 맞다는 것이 법조계의 일반적 평가다. 대법원 형사소송규칙(144조 1항 5호)을 보면 재판부가 변경돼 공판절차를 갱신할 경우 증거조사를 다시 해야 한다. 재판부가 바뀌면 증인을 다시 불러 증언을 듣는 것이 직접심리주의 원칙에 맞고, 그렇게 못한다면 증인신문 녹취파일이라도 다시 들어야 한다. 서면으로 증언을 읽는 것과 음성으로 듣는 것은 판사의 심증 형성에 있어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범한 피고인은 감히 이런 방식의 증거 조사 방식을 요구하지 못한다. 형사소송규칙상(144조 2항) 재판부는 검사, 피고인 등의 동의가 있는 경우 ‘상당하다고 인정하는 방법’으로도 증거조사를 할 수 있다. A고등법원 판사는 “상당한 방법으로 증거조사를 하겠다며 피고인 측에 동의하느냐고 묻는 것은 기존 재판부가 한 증인신문 조서를 보고 재판을 해도 되겠냐는 말인데 보통의 피고인들은 동의한다”고 말했다. 그는 “녹취파일을 다시 듣자고 요구하는 피고인은 거의 없다. 재판부에 밉보일 수도 있는데 감히 어떻게 하느냐”며 “전직 대법원장 정도 돼야 재판부에 안 밀리고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국 법원이 얼마나 공판중심주의에 취약한지 드러났다는 지적도 있다. B고등법원 부장판사는 “앞으로는 검찰 조서보다 법정 진술이 더 중요해지는 만큼 이런 사건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며 “(현행 법관 인사 제도 하에서) 2년마다 재판부가 바뀌는 만큼 새 재판부가 2년 내내 공판 갱신 절차만 하다가 재판이 끝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촌극을 막기 위해서라도 지방 순환 근무를 위해 2~4년마다 다른 법원으로 옮겨다니는 법관 인사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B판사는 “가령 독일 같은 나라에서 이런 사례가 없는 이유는 판사가 안 바뀌기 때문”이라며 “기본적으로 한 판사가 5년에서 10년간 한 재판부에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독일에는 ‘1사건 1법정주의’ 개념이 정착돼 있다. 한 재판부가 한 사건만 심리해 선고까지 끝낸다는 원칙이다. A판사는 “독일은 1심에서 불렀던 증인이라도 2심에서 전부 다시 불러서 증인신문을 한다. 이게 바로 공판중심주의”라며 “한국의 법관 인사가 공판중심주의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말했다.
유설희 기자 s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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