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리로 성찰.."나만의 방식으로 광주 치유하고파"
작가가 말했던 ‘꿈의 도시’는 몽롱한 빛과 소리가 울려 퍼지는 우주와 비슷했다. 감상의 여정 자체가 우주를 붕 떠서 날아다니는 듯한 착시 체험의 연속이었다.
영국 동시대 미술가그룹 와이비에이(YBA)의 대표작가로, 국내 미술판에서 초대하고 싶어 하는 거장 1순위로 꼽혔던 리엄 길릭의 전시는 명불허전이었다. 지난 2월 광주시립미술관에서 개막한 아시아 최초의 미술관 기획전 ‘워크 라이프 이펙트’ 현장에서 그는 우리에게 익숙한 일상의 사물이나 용품을 전혀 다른 아름다움으로 보여줬다. 1·2전시실 1300여㎡(400여평) 공간에 그가 꺼낸 작품은 10개 안팎에 불과했다.
1전시실 들머리의 램프 설치작품 <신경망에서 감지되는 행복에 대한 기대>부터 파격이었다. 천장에 매달린 9개의 동그란 램프가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면서 관객에게 전시장에 들어왔음을 알려준다. 그 뒤로 엘이디(LED) 창과 미닫이문이 있는 방 모양의 건축 구조물 <워크 라이프 이펙트 스트럭처 에이(A)>가 보인다. 방 안 벽에는 산업재료로 만든 금속 봉들을 수직으로 배열한 작품 <핀 앤드 호라이즌>이 붙어 있다. 관객들은 유리창 없이 트인 이 방 안팎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단순화·추상화한 도시적 요소를 살펴보게 된다. 작가는 이런 공간적 구도를 통해 일상 속 삶과 일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이끈다.
벽면에 가상의 행복방정식 수식을 빛나는 네온으로 붙여놓기도 했다. 이 수학적 공식들은 몇년 전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에서 발표한 ‘행복을 계산하는 공식’이다. 어떤 수치를 집어넣거나 조작을 해도 행복이 물질적으로 계량화될 수는 없다는 것을 증명하듯 이 네온 작품은 꿈결같이 파랑, 빨강, 노랑 등 다양한 색채를 내뿜는다.
2전시실 한가운데 배치된 디지털 피아노 설치작품 <눈 속의 공장(우편배달부의 시간)>도 전시의 핵심이다. 1974년 포르투갈 군사정부를 무너뜨린 카네이션 혁명의 시작을 알렸던 노래 <그란돌라 빌라 모레나>의 후렴구 선율을 피아노가 자동 연주하는 가운데, 천장에 매달린 기계에선 검은 비닐 조각들이 검은 눈처럼 뿌려지는 풍경이 연출된다. 작가가 연관성을 강조한 건 아니지만, 1980년 5월 광주에 대한 리엄 길릭 특유의 조형적 사유를 담은 헌정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말 프랑스 비평가 겸 기획자 니콜라 부리오가 ‘작가와 관객이 구분을 허물고 함께 행위하고 만나면서 작품을 만들어가는 관계 미학’을 주창하면서, 리엄 길릭은 이를 뒷받침하는 핵심 작가로 인식돼 왔다. 그가 2019년 광주 전시를 제안받은 건 숙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는 코로나19 사태가 있기 전부터 광주를 답사하면서 항쟁의 역사적 상처, 도시 정체성 등에 대해 숙고와 연구를 거듭했고, 팬데믹 이후로는 일과 삶이 융합된 추상적 미학을 줄곧 고민해 왔다고 한다. 이런 2년간의 진통과 모색을 거쳐 이번 광주 전시에 기존 전시 어법과는 구별되는 맥락에서 관객과 광주 도시 공간의 구체적 소통을 시도하는 신작들을 선보이게 됐다.
광주 전시 공간에서 시도한 경계 넘기와 성찰은 광주의 상처에 대한 치유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인류사의 샤머니즘 언어를 통한 치유와 연대를 설파하는 바로 옆 광주비엔날레 본전시관의 전시들과 흥미롭게 대비된다. 심령적 요소를 주로 다루는 비엔날레 콘텐츠와 성격이 전혀 다른, 개념적이고 사색적인 이미지 구성 작업이란 점 때문에 두 전시를 함께 보면서 성찰하는 것은 더욱 각별한 감상의 재미를 안겨준다.
지난 1일 전시 설명회에 참석한 리엄 길릭은 대표작 <핀 앤드 호라이즌>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시를 준비한 이래로) 광주란 도시의 역사를 늘 의식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빤히 아는 것을 재현하는 쪽으로 가고 싶진 않았다. 난 역사적으로 핍박당한 아일랜드인 후예다. 광주의 역사와 고통에 공감하면서도, 나만의 방식으로 광주의 치유에 기여하고 싶었다.” 타자의 시선으로 엿본 광주가 아니라 지금껏 그가 밝혀온 모토대로 직접 작품 안으로 들어가 일부가 되는 ‘태도의 전환’으로 광주의 미학을 일구고 싶다는 다짐처럼 들렸다. 6월27일까지.
광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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