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공정성 확인하겠다"..'불신의 법정'된 임종헌 재판
"대한민국 헌법 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법대에 앉아있는 제36형사부 구성원 모두가 대한민국 헌법 103조가 정한 법관입니다.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가 판사로서, 헌법과 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할 뿐입니다."
오늘(13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사법농단' 사건 공판준비기일이 진행된 서울중앙지법 508호 법정은 냉랭했습니다.
재판장인 윤종섭 부장판사는 위와 같은 마무리 발언으로 오늘 기일을 마무리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를 재판부가 언급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 재판 멈춘 3개월 사이 '공범 유죄 판결'
오늘 재판은 지난 1월 18일 이후 거의 석 달 만에 재개됐습니다. 지난 1월 재판부는 2월에 있을 법관 인사이동을 앞두고 재판절차를 잠정 중단했는데요. 통상 알려진 인사원칙과 달리 재판부 판사 세 명이 모두 유임됐습니다.
이후 지난달 23일, 이 세 명의 판사가 겸임하는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2부(재판장 윤종섭)는 임 전 차장의 공범으로 기소된 이민걸·이규진 전 판사에 대해 유죄 판결을 선고했습니다.
재판부는 특히 두 전직 판사가 관여한 주요 범행을 임 전 차장이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결문에 명시했습니다.
임 전 차장 측이 재판부 기피신청에 나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 이유입니다.
임 전 차장은 이미 재판 초반인 2019년 6월, 재판장인 윤종섭 부장판사에 대해 기피신청을 했다가 대법원에서 최종 기각 결정을 받은 바 있습니다.
■ 재판부 "기피 사유되나 검토해달라" 선제적 명령…"신뢰 얻고자"
'사법농단' 첫 유죄 판결 사흘 뒤, 재판부는 3월 2일에 지정해뒀던 공판기일(3월 26, 27일)을 돌연 취소했습니다.
그리고 나흘 뒤인 3월 31일, 공판기일이 아닌 공판준비기일을 열겠다며 날짜를 4월 13일로 결정했습니다. 재판을 재개하기 전 정리할 쟁점이 있다고 판단한 겁니다.
그 쟁점은 바로 재판부가 선고한 '사법농단' 첫 유죄 판결이었습니다.
재판부는 "향후 심리에 앞서 관련 사건 판결 선고가 당사자에게 어떤 의미로 여겨질 수 있는지, 당사자가 실제로 관련 사건 판결 선고를 어떤 의미로 여기는지", 변호인과 검사에게 의견을 내달라고 명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공범 유죄 판결에 대해 "그저 참고 판결이 하나 생긴 것에 불과하다"거나 "이 사건에서 잠정적인 심증을 전면적으로 개시한 것과 마찬가지"라거나 "이 사건에서 중간판결을 선고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등의 의견이 있을 수 있다면서, 재판부 기피 사유에 해당하는지까지도 살펴봐달라고 한 겁니다. [관련 기사] 법원, 임종헌 前 차장에 “이민걸 前 실장 등 유죄판결에 관한 의견 제출하라”
재판부는 특히 " 관련 사건 판결을 선고하였다고 하여 이를 중간판결로 여기고 실제로 이에 기속되어 향후 심리 진행할 생각은 전혀 없다"면서 "오히려 향후 이 사건 심리 과정에서 당사자의 주장을 더욱 경청해 혹시 관련 사건 판결의 잘못된 부분이 드러나면 그와 달리 판단하겠다"고도 공판준비명령서에 적었습니다.
이에 대해선 재판부가 다시 기피신청을 당하기 전 선제적 조치를 취한 것이라거나, 굳이 할 필요없는 일을 했다는 등 평가가 엇갈리는데요. 재판장이 오늘 재판에서 내놓은 설명은 이렇습니다.
"이 법원이 겸임하는 제32형사부는 2021년 3월 23일 관련 사건 판결을 선고하였습니다.
그 직후 재판부 구성원 모두가 몸과 마음이 지쳐 힘든 상태였음에도, 이 사건 소송관계인들이, 특히 피고인과 변호인이 관련 사건 판결 선고를 어떤 의미로 여길지 고민하였습니다. 향후 심리를 어떻게 진행할지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 결과 3월 29일 월요일, 3월 30일 화요일 공판기일을 변경·취소하고 그와 같은 고민을 3월 31일자 공판준비명령에 담았던 것입니다.
공판준비명령의 다른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재판은 소송관계인들의 재판부에 대한 신뢰 속에서 진행돼야 합니다. 이 법원은 소송관계인들로부터, 바로 그 신뢰를 얻고자 하였던 것입니다."(윤종섭 재판장)
■ "할말 없어" 입 닫은 임종헌…사실조회 신청으로 '공정성' 거론
재판부 준비 명령에 대해 검찰은 원칙적인 입장을 내놨습니다.
오늘 재판에서 검사는 "공범 사건 선고는 참고 판결에 불과하고 이 사건 심리는 독립적으로 진행돼야 한다"면서 "추후 검사와 변호인은 자신의 주장에 부합하는 증거와 법리를 제출하며 공박하고, 재판부는 그 의미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심으로써 관련 사건 판결 선고에 기속되지 않고 본건에 대해 선고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반면, 임 전 차장 측은 "할 말 없다"고 밝혔습니다.
변호인은 오늘 재판에서 "관련 사건 판결 선고의 의미에 대해서 피고인 측 의견을 개진하라는 것이 공판준비명령 사항으로서 적절한 것인지 다소 의문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또 이 사건 재판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관련 사건 판결 선고의 의미에 대해 피고인 측이 의견내는 건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며 "따라서 관련 사건 선고 이유에 대한 피고인 측 의견에 대해선 말씀드릴 것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아울러 "관련 판결에 대해서는 언론 보도로 대략적으로 요지를 알고 있지만 아직 판결문을 본 적이 없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쟁점을 꺼내들었습니다. '재판부의 공정성'을 확인하기 위해 대법원에 사실조회를 하겠다는 겁니다.
"대법원과 법원행정처에 사실조회 신청하고자 합니다. 사실조회 목적은 재판의 공정성 확인입니다.
[…] (2021년 2월) 조선일보 보도와 관련한 것인데요. 대법원장이 2017년 10월 경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재조사에 관한 일선 판사들의 의견을 청취할 목적으로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대표 10명 초청해 면담 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는지, 이 면담 자리에 참석한 부장판사 대표 10명이 누구인지, 면담 자리 발언 관련 참석자들 중에 조선일보 보도와 같이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관련 "반드시 진상을 규명해서 연루자를 단죄해야 한다"는 취지로 발언한 사람이 있는지 여부와 있다면 누군지, 당시 면담 자리에 참석한 10명이 한 발언이 보존돼 있는지 여부와 보존돼 있다면 그 보존 양태를 사실조회 신청합니다." (변호인 이병세)
앞서 조선일보는 지난 2월 "최근 법관 정기 인사에서 전례 없이 6년째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유임된 윤종섭 부장판사가 2017년 10월 김명수 대법원장과의 면담 자리에서 이른바 '판사 블랙리스트' 등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과 관련해 '반드시 진상 규명을 해서 연루자들을 단죄해야 한다'는 취지로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습니다.
조선일보는 이어 "이듬해 서울중앙지법엔 사법행정권 남용 전담 재판부 3곳이 신설됐고, 윤 부장판사가 그중 한 곳인 형사36부에 배치됐다"면서 "해당 사건을 심리도 하기 전 '단죄해야 한다'며 확고한 유죄 심증을 표명한 판사를 담당 재판부에 배치한 건 '사법 농단'이자 '인사 농단'이라는 법조계 비판이 나온다"고 썼습니다.
이같은 보도가 사실이라면 재판부의 공정성을 믿을 수 없으니, 대법원에 대한 사실조회로 의혹의 진위를 확인해야 한다는 게 임 전 차장 측 주장입니다.
임 전 차장은 2019년 6월 윤종섭 부장판사에 대해 기피신청을 하면서 "재판장 윤종섭은 강형주 서울중앙지방법원장 주재 모임에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자들을 엄단하여야 한다'고 말했다는 기자의 제보도 있다"고 이미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다만 근거 자료를 제출하진 못했습니다.
이같은 사실조회 신청에 대해 검찰은 "대법원에서 이미 기피신청이 기각된 바 있고 공정성 시비가 해소됐다고 판단한다"면서 "이번 사실조회 신청은 공정성에 대한 새로운 문제제기도 아니며, 공소사실 입증이나 양형 판단에 필요한 사항도 아니기 때문에 기각돼야 한다"고 했습니다.
변호인은 "(사실조회 신청을 하기까지) 고민을 좀 했다"면서도 입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변호인은 "만약 조선일보 보도 내용이 사실이라면 임성근 부장판사 사퇴 관련 면담 과정에서 대법원장이 보여준 이중적 태도, 즉 속으로는 임성근 부장에 대한 탄핵을 바라면서 겉으론 마치 탄핵에 전혀 찬성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는 그 태도에 비추어 피고인 측으로서는 보도 내용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즉 그동안 대법원장이 보여준 태도에 비춰보면, 이른바 '사법행정권 남용' 관련자들에 대해 중형을 선고하라는 대법원장의 의중이 이 사건 재판부 신설 및 구성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기에 피고인 측으로서는 재판의 공정성을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공정성 우려를 해소, 완화하는 차원에서라도 이 부분을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 "법정 외에서 결정하겠다"…의혹 해소될까
재판 바로 전날 제출된 사실조회 신청에 대해, 재판부는 "인용 여부는 쌍방의 의견을 다시 살펴본 후 법정 외에서 결정하도록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다음 재판이 열리는 오는 26일 전까지는 결론을 내릴 것으로 전망됩니다.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재판부는 대법원과 법원행정처에 사실조회서를 발송하게 됩니다. 다만 의혹을 해소할 만한 회신이 올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사실조회 신청이 본 재판과 무관하다고 보고 재판부가 신청을 기각한다면, 임 전 차장 측은 재판부의 공정성 문제를 더 강하게 물고 늘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느 쪽이든 재판부가 얻고 싶었다던 소송관계인의 '신뢰'를 얻기란 당장은 어려울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같은 '불신의 법정'을 만든 책임자가 누구인지도 이 재판이 던지는 중요한 질문일 것입니다.
김채린 기자 (dig@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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