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까지 다시 불러낸 '피의사실 공표' 논란
공개금지 규정 실효성 의문.."알권리 단절은 안돼"
김학의 불법 출국금지 사건을 계기로 검찰의 피의사실공표 논란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까지 언급하며 엄중 대처 의지를 밝혔지만, 한편에선 정부·여당에 불리한 사안에만 ‘선택적 문제제기'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정치적 공방으로 치닫고 있다.
검찰의 피의사실공표 논란은 박 장관이 지난 6일 김학의 출금 사건 관련 ‘청와대 기획 사정 의혹’ 수사 상황이 실시간으로 보도되는 것에 강한 유감을 표하면서 다시 점화됐다. 박 장관은 보궐선거 하루 전 “특정 사건과 관련한 보도가 며칠간 이어지는 상황을 매우 엄중히 보고 있다”며 “대검과 중앙지검이 보도 경위를 알고 있었는지를 확인해보고 후속 조치를 고려하겠다”고 말했다. 대검은 사건을 수사하는 중앙지검과 수원지검에 진상조사를 지시했고, 중앙지검 인권감독관실은 수사팀 관계자 등을 상대로 수사 내용 유출 경위 등을 조사 중이다.
피의사실공표 조사…정치적 ‘내로남불’ 되풀이가 문제
박 장관의 지시가 나오자 검찰 안팎에선 선택적 문제제기라는 비판이 나왔다. 정부·여당에 유리한 사안에 대해서는 왜 당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냐는 지적이다. 정부 초기 국정농단 수사 당시 의원 신분이었던 박 장관이 “(수사 상황을) 국민에게 알리는 것이 옳은 태도”라고 한 발언 등이 다시 소환되기도 했다. 검사장 출신의 한 변호사는 “이른바 적폐수사라고 불렸던 전직 대통령 사건과 사법농단 사건 때는 아무런 문제제기가 없다가 조국 전 장관 수사 때는 피의사실공표를 문제 삼았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기준이 달라지면 문제가 절대로 해결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추미애 전 장관 시절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사건 관련자들의 공소장에 대해 처음으로 비공개하기로 결정한 것도 대표적인 정치적 판단의 사례로 꼽힌다. 당시 진보적 단체로 꼽히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마저 “법무부가 정치적 논쟁의 소재가 될 원인을 제공했다”고 비판할 정도였다.
지난 7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자신의 재판에서 언급한 ‘한동훈 검사장 사례’도 검찰의 피의사실공표 문제가 전형적인 ‘내로남불’ 논리로 작동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장면이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재판정에서 “얼마 전에 검찰 고위 간부 한 분이 모종의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되자 ‘수사상황이 시시각각 유출돼 공정한 수사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했다”라며 한동훈 검사장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그러면서 양 대법원장은 “(한 검사장이 지휘했던 사법농단 사건이야말로) 수사 과정이 언론에 실시간으로 중계돼 국민이 예단을 갖게 됐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수사할 때는 피의사실을 실시간 중계해놓고, 정작 수사를 받는 처지가 되니 한 검사장 역시 ‘피의사실공표’를 문제 삼고 나선 상황을 꼬집은 셈이다.
공개금지 규정 실효성 의문…‘알권리’와 ‘불순한 의도’ 구분해야
검찰 안팎에서는 2019년 조국 장관 시절 제정한 ‘형사사건 공개금지 규정'이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규정은 심의기구의 의결을 거친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일부 수사상황을 공개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검찰 내부에선 수사 상황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고 절차도 복잡해 현실성이 없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법조인들은 피의사실공표 문제 해결을 위해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특정 집단에 피해가 가는 사안일 때만 피의사실공표가 문제 되는 것은 국민의 불신만 키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검찰 수사를 견제하기 위해서 수사 상황을 완전히 대중에게서 단절시키는 쪽으로만 대책에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라며 “사적인 통로로 수사정보가 흘러나와 언론사의 주관적인 의견까지 섞여 사실이 왜곡되는 폐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필요할 경우 공개적으로 수사 상황이 공유될 수 있는 현실성 있는 지침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수사 경험이 많은 한 전직 검찰 간부도 “피의사실공표의 폐해는 피의사실을 알려 수사에 유리한 여론을 형성하려는 수사팀의 의도와 단독기사를 쓰고 싶은 언론의 욕심이 만나는 지점에서 생기는 문제”라며 “제도적 정비도 필요하지만, 불순한 의도를 가진 기존 수사 관행과 언론의 보도 관행이 발맞춰 변하지 않으면 쉽게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라고 짚었다. 옥기원 기자 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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