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헌의 바깥길] 키 작은 능력주의

한겨레 2021. 4. 13.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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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헌의 바깥길]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이상헌 ㅣ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나는 키가 작다. ‘땅콩’이라는 별명을 들으며 키 큰 친구에게 아이 취급받은 것 말고는, 불편한 것은 별로 없었다. 낮은 세상의 공기도 괜찮아서 숨 쉬고 살 만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나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하셨는지, 아니면 당신의 유전적 책임감 탓이었는지, 아들의 키 얘기만 나오면 “딱 출세하기 좋은 키”라고 발끈하셨다. 내게 위로와 용기를 전하려 한 말은 나를 더 작게 만들었다. 소박한 키와 함께 이런 억울한 심사까지 내 자식들에게 전달된다는 생각까지 겹쳐서 심란하기까지 했다.

내가 애쓴다고 될 일도 아니다. 물론 잘 챙겨 먹고 운동하면 키를 약간 늘려볼 수는 있겠다. 실제로 효과도 있다. 하지만 노력에도 엄연한 한계가 있다. 게다가, 남들도 똑같이 애쓰면 내 가상한 노력도 헛된 일이다. 키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다. 내 키의 절대적 개선에도 불구하고 남들도 자라면 나는 여전히 ‘땅콩’일 뿐이다. 모두 부쩍 커버린 지금의 20대는 내겐 모두 장신이지만, 그 속에도 ‘땅콩’의 실존적 고민은 계속되고 있을 터다. 나는 그저 ‘키 몇 센티’로 사람을 재단하거나 줄 세우지 않는 세상을 고마워할 뿐이다. 운동장에서 키 순서대로 줄 서면 맨 앞쪽에 서서 하품 한번 하지 못했던 기억은 교문 뒤로 남겨둔 지 오래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이룬 세력이 민주주의의 과실을 독점하려는 것을 이미 보았다. 4·19 혁명이 그러했고, 80년대 민주화운동도 그런 징후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엘리트에게는 부끄러움, 주저함, 의심이 없다. 자신의 머리와 손으로 온전히 이룬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항상 당당하다.

바깥세상의 줄 세우기 방식은 치밀하다. 먹고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뻔하지 않고 늘 변해왔다. 피와 함성으로 이룬 20세기의 사회정치적 성취도 따지고 보면, 세습적 신분이나 계급을 없애고 만인이 더 나은 삶을 추구할 기회를 보장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출신성분 좋은 사람이 아니라 똑똑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사회적 중책을 맡게 하고 금전적 성공을 거둘 수 있게 하는 사회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 ‘기회 평등’이 필수불가결하다는 생각은 폭넓은 대중적 공감대를 얻었다. 혹시 모를 ‘반동’의 여지를 차단하기 위해서 치밀한 제도적 장치를 만들었다. 누가 똑똑하고 노력했는지를 정확히 판별하는 세세한 선별 방식을 만들어내고 이를 엄격히 적용했다. ‘실력’ 있는 학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능력’ 있는 졸업생이 고위공무원이 되고, ‘똑똑한’ 직원이 기업 임원이 되었다. 시험과 평가가 전부였고, 그 결과는 우리 삶의 족보에 올라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역사적 진보였고, 아직도 이런 진보를 위한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많은 나라에서 ‘기회의 평등’을 위한 첫걸음도 내딛지 못했던 1950년대에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은 미완의 과제에 서둘러 경고음을 울렸다. ‘기회 평등’을 통해 성장한 엘리트 계급이 모든 기회를 포획하거나 독점함으로써 그 역사적 진보성은 역설적으로 사회적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두가지 방식을 택했다.

첫째,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능력주의’로 번역되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는 능력을 중시하는 것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아이큐와 근면성 정도로 측정되는 ‘능력’만으로 사람들을 줄 세우고 이런 과정을 통해 엘리트가 된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런 지배는 제 능력으로 엘리트가 된 사람들이 자식들에게 ‘능력’을 넘겨줌으로써 완성된다. ‘능력의 원칙’을 숭배하면서도 ‘혈연의 원칙’을 버리진 못한. 이 두 원칙들은 필연적으로 충돌하지만, 이를 해소하기 위해 ‘능력’을 다시 정의하고 측정 방식도 기꺼이 바꾼다. 사회적 이동성을 높이려던 핵심적 도구는 이제 타인의 진전을 막는 장치가 된다. 그리하여 ‘똑똑함’은 키와 같은 유전적인 것으로 전환된다. 불행하게도, “출세하기에 적당한 어리석음”은 없다.

한마디로 능력주의의 왜곡이다. 이런 역사의 역설은 낯설지 않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이룬 세력이 민주주의의 과실을 독점하려는 것을 이미 보았다. 4·19 혁명이 그러했고, 80년대 민주화운동도 그런 징후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엘리트에게는 부끄러움, 주저함, 의심이 없다. 자신의 머리와 손으로 온전히 이룬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항상 당당하다. 남의 날 선 비판을 철없는 질투라고 가벼이 여긴다.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는 자신이 낡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면서 스스로를 ‘능력주의자’라고 불렀다. 당연히 마이클 영은 발끈했다. 책은 읽지 않고 ‘능력주의’라는 말만 끌어댄 블레어야말로 족벌화된 능력주의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꼬집었다.

둘째, 능력주의의 위기를 예고했다. 그의 책 <능력주의의 등장>에는 “1870-2033”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2033년에 능력주의에 대한 대중적 불만이 고조되어 포퓰리즘적 대중운동이 생긴다고 가정하고,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회고적으로 서술했다. 위기의 핵심에는 지식 엘리트가 이해하지 못하는 ‘능력 없는’ 사람들이 있다. 시험성적으로 표상되는 ‘능력’은 수많은 패자를 만들어내고, 능력의 세습화와 독점화는 ‘키 작은’ 무능력자를 만들어낸다. 아무리 애써봐도 ‘작은 키’를 넘지 못하는데, 능력 넘치는 지배계층은 ‘노력’을 주문한다. 게다가 타고난 ‘능력’은 다를 터인데, 세상은 저들이 정의하는 ‘능력’만 인정한다. 저쪽은 교육 강화를 대책으로 외치지만, 이쪽은 사회적 능력 평가 방식의 변화와 이에 따른 정당한 보상이 필요하다. 이렇게 둘 간의 거리가 멀어진다.

그러면 변화는 올 것인가. 출간한 지 50년 이상이 지난 후 그의 책은 인기다. ‘능력주의’를 다룬 책이 수없이 쏟아졌다. 변화의 신호이겠다. 하지만 마이클 영은 변화를 희망하면서도 회의적이었다. 능력주의가 극단적으로 진행되어 모든 역량이 엘리트에게 흡수되어 반항을 조직할 능력마저 없을 것을 걱정했다. 저항의 능력마저도 빼앗기고, 정치적으로 기댈 세력도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말한 포퓰리즘은 어쩌면 고립무원의 상황이 빚어낸 저항 방식이다.

“자유, 평등, 우애”의 나라 프랑스는 엘리트 교육으로 유명하다. 1945년 샤를 드골 대통령이 상층계급이 교육을 독점하고 정부 요직을 장악하는 것을 막고자 만든 국립행정학교가 대표적이다. ‘기회 평등’의 가치를 내세웠던 이 학교는 성적으로 일등부터 꼴찌까지 경쟁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엘리트 양성소로 전락했다. 지적으로 출중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지배층을 양산했다. 학생 70% 이상이 상위층 출신이고, 노동계층집안 출신은 6%도 되질 않았다. 최근 “노란 조끼” 운동의 비난 대상이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얼마 전 ‘기회 평등’의 복원을 위해 이 학교 문을 닫고 새로운 출발을 한다고 선언했다. 원대했던 목표로 돌아갈지 아니면 도돌이표가 될지 두고 볼 일이다.

‘키 작은 능력주의’를 낡은 교문 뒤편에 남겨둘 때가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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