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액 과외에 사립학교 '우회입학' 까지..스위스 취리히의 '고교 입시' 논란

천준모 2021. 4. 13.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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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하고 높은 교육 수준의 가정에서 자란 학생에게 유리

"대학 진학 기회 격차 벌린다" 지적 많아


스위스 고교 입시에 대한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취리히 대학 총장이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인문계 고교 시험으로 인해 대학 접근성이 제한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 계기가 됐다. 스위스의 고교 입시는 일부 주(칸톤)에서는 전통적으로 인문계 고등학교 입학을 위해 시험을 시행해왔지만, 사교육을 부추기고 교육격차를 심화시킨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프랑스의 바칼로레아(Baccalauréat)나 독일의 아비투르(Abitur)처럼 스위스에는 고교 졸업 시험인 마투라(Matura)가 존재한다. 마투라에 합격해야 고등학교 졸업이 가능하고, 고등학교 졸업을 해야 스위스 내의 공립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같은 마투라를 치르는 고등학교는 보통 인문계 고교(김나지움 혹은 칸톤슐레)에 한정된다. 중학교 단계부터 대학 진학을 목표로 공부해 좋은 성적을 거둔 학생들이 이런 인문계 고교로 진학한다.


교육 방침과 운영이 전적으로 주(칸톤)에 위임되어 있는 스위스 연방제의 독특한 특징 때문에 스위스 26개 주 가운데 일부는 인문계 고교 진학을 시험을 통해 결정한다. 현재까지 고교 입시를 운영하는 칸톤은 취리히, 베른, 장크트갈렌, 투르가우, 샤프하우젠, 글라루스 등이 있다. 이들 지역에선 인문계 고교에 시험을 치르고 입학해 졸업시험 (마투라)을 치르는 것이 대학 입학의 기본 요건이다.


고교 입학 시험을 치르는 대표적인 칸톤, 취리히의 경우 시험의 합격률은 50퍼센트 언저리다. 많은 학생들이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다. 여력이 있는 부모들은 값비싼 과외를 통해 자녀의 합격 가능성을 높이려 한다. 실제로 취리히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보충학습'라고 적혀있는 사설 교육기관들의 간판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인문계 고교 입시가 존재하지 않는 칸톤에서는 생소한 광경이다.


©게티이미지


저소득층이나 이민 가정과 같이 사회적으로 취약한 배경을 지닌 학생들은 이러한 고교 입시로 인해 불이익을 받는다. 고액 과외를 감당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될뿐더러 주변에 대학 혹은 장래에 대해 조언해줄 수 있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학생들이 인문계 고교가 아닌 기술직 업계로 진출한다고 해서 대학 진학의 문이 완전히 닫히는 것은 아니지만, 저소득층과 이민자가정은 대개 가능한 루트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교육과 소득 수준이 높은 가정의 학생들은 부모의 관심과 지원 아래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이 수월하며, 대학 진입의 길도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취리히에서 자라 현재 취리히 대학교에서 정치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루이사 차커(Louisa Cakir)는 “취리히의 일부 학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이러한 시험을 준비시키기 위해 어린 자녀에게 엄청난 양의 돈을 쏟아붓기도 한다”며 취리히 주의 고교 시험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보였다. 이 제도가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올해 스위스 언론 NZZ의 광고란에는 “고등학교 입시 시험 : 미쳤다”라는 멘트의 광고가 실리기도 했다.


높은 경쟁률에 부딪쳐 인문계고 입학시험에 떨어져도 길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여전히 돈이 필요하다. 고액의 사립고등학교 진학이라는 우회로를 통해서다. 실제, 취리히의 고등학교 입학시험이 끝난 후 한동안은 취리히 시내의 버스와 트램 곳곳에서 사립 고등학교의 광고들이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사립 고등학교들은 입학시험 없이 들어갈 수 있고, 또 스위스 정부에서 인정하는 마투라를 칠 수 있다. 대신 학비가 어마어마하다. 고교 시험에 떨어졌지만, 자녀를 여전히 대학에 보내길 바라는 재력 있는 부모를 지원하는 일종의 비즈니스인 셈이다. 아무도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세태가 '교육의 평등한 기회'와는 어쩐지 멀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취리히와 마찬가지로 인문계 고교 입학에 있어 시험을 요구하는 또 다른 주인 장크트갈렌에서도 이러한 문제가 지적된 바 있다. 장크트갈렌 주는 2014년 보고서에서 “사회적으로 불우한 배경을 지닌 젊은이들은 그들이 높은 경쟁력을 가지고 있어도 인문계 고교에 다닐 기회가 적다”라고 명시했다. 교육의 균등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취리히에서 40km 떨어진 칸톤 아르가우에서는 2016년을 마지막으로 인문계 고교 입시가 사라진 바 있다. 취리히에서도 매년 고교 입시를 대신할 여러 방안들이 논의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진전이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매년 논란의 중심에 서는 취리히의 고교 입시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어갈지 지켜볼 일이다.


스위스 아라우 = 천준모 글로벌 리포터 junmo.cheon@uzh.ch


■ 필자 소개

취리히 대학교 정치학 석사 과정 

(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연수원 해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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