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사랑하고 싶어지는 그곳, 딜쿠샤..행촌동 로맨스
인왕산 아래에는 행촌동이 있다. 오래 전 이 동네는 정동 외국인 거리와 연결되는 전망 좋은 동산이었다. 이 언덕 꼭대기쯤에 ‘딜쿠샤’라는 이름의 주택이 있다. 산스크리트어로 ‘희망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집에 이름을 붙이다니, 사랑스럽다. 딜쿠샤에서 서울성곽길을 따라 기상박물관을 들러 돈의동마을박물관, 경희궁, 서울역사박물관을 걸었다. 마음이 노골노골 봄볕에 녹아 내리는 기분이었다.
▶딜쿠샤 DILKUSHA, 기쁜 마음의 궁전
앨버트 와일더 테일러Albert Wilder Taylor와 메리 린리 테일러Mary Linley Taylor 부부는 이 집이 완공되자 ‘딜쿠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테일러 부부가 인도에서 신혼여행을 하다 들렸던 러크나우 지역의 곰티 강 근처에 있는 딜쿠샤라는 이름의 궁전에서 따왔다. 기쁨, 궁전 등의 의미가 그들에게 깊이 꽂혀있던 것이었다.
두 사람은 요코하마에서 만났다. 영국 여자 메리는 연극배우로 일본에서 공연 중이었고 미국 남자 앨버트는 조선에서 광산업을 하는 아버지를 도와 준설기 구입 차 일본 출장 중이었다. 1916년의 일이었다. 메리의 남동생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는 소식도 그때 요코하마까지 전달되었다. 깊은 슬픔에 빠져있던 메리를 위해 연극 단원들이 위로의 파티를 열었고, 그때 초대받은 손님 가운데는 앨버트도 있었다. 둘은 곧 친해졌고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메리는 인도로 돌아가야 했고 앨버트 역시 조선으로 떠나야 했다. 앨버트는 메리에게 호박목걸이를 선물하며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10개월 후 앨버트는 인도에서 메리와 재회했고 1917년 6월 봄베이 성 토마스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인도에서 석달 동안 허니문의 꿈을 꾸었다.
조선으로 돌아온 테일러 부부는 지금의 미동초등학교 건너편 충정로7길 부근 한옥에서 신혼집을 꾸렸다. 그들은 신혼집에 이름도 붙여주었다. ‘작은 회색집 The Little Gray Home’이 그것. 추측컨데, 메리는 문학소녀 같은 감성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부부는 작은 회색집에 살며 개화기 당시 한양의 대표적인 외국인 거리였던 정동은 물론 서소문에서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한양성곽길을 산책하며 조선의 감성을 함께 나누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은행나무골로 불리던 행촌동에서 은행나무 고목이 있는 땅을 발견한 부부는 그곳에 자신들의 새 집을 짓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세월이 더 흐른 뒤 그 땅의 주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부부는 단숨에 달려가 그 땅을 사 들였고 집을 지었다. 성곽길 산책을 하고, 집에 대한 욕망이 생기고, 기회가 오자 단박에 돈을 쓰고, 집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앨버트가 아버지를 따라 광산 사업을 하는 등 자금력이 탄탄했고 아내 메리의 꿈에 공감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조선의 평민들에겐 왜 그런 꿈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계급 사회가 끝나자마자 식민지 시대를 맞은 조선의 대중에게 딜쿠샤 같은 집은 멀고 먼 꿈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딜쿠샤의 테일러 부부에 대해 부정적 평가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국제 협약에 따라 조선에 진출한 광산 사업자이자 기술자였고, 서소문에서 테일러 상회라는 무역회사에 조선인을 고용, 말썽 없이 운영했기 때문이다. 또한 앨버트 테일러는 사업가로 활동함과 동시에 AP통신의 한국 공식 통신원으로 취업, 3.1독립운동 즈음 독립선언서를 조선총독부 몰래 일본으로 가져가 전 세계에 타전했다. 3.1독립운동에 참가했던 수원 제암리 주민들을 교회에 모아놓고 학살을 저지른 일본군 제암리 학살사건도 취재해서 해외 언론에 알린 인물도 앨버트였다. 그는 통신원 활동을 통해 식민지 조선을 응원했던 것이다.
▶당신의 애정에는 어떤 이름이 붙어있는가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테일러 부부는 적국 시민으로 분류되어 1941년 감금, 1942년에 강제로 추방당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자마자 테일러 부부는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1948년 남편 앨버트가 심장마비로 죽고 만다. 모든 게 끝난 것 같았으나 아내는 남편의 유해를 안고 해방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의 아름다웠던 삶을 잊을 수 없었고, 무엇보다 남편의 한국에 대한 애정의 깊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앨버트는 언더우드 가족 등의 도움으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치되었고 메리는 곧 한국을 떠났다.
그녀가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행촌동 언덕, 그들의 사랑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딜쿠샤였다. 메리는 캘리포니아 멘도시노로 돌아가 살다 1982년 남편 앨버트의 별로 떠났다. 딜쿠샤는 그 뒤에 소유주가 몇 차례 바뀌었다.
딜쿠샤가 앨버트와 메리 가족의 품으로 되돌아 간 것은 두 사람의 아들로 딜쿠샤에서 성장한 브루스 T. 테일러가 한국의 김익상 서일대학교 교수에게 부탁해 딜쿠샤의 존재를 확인하면서였다. 가족과 함께 딜쿠샤를 방문한 브루스는 직접 집을 확인했고, 자신의 부모가 지은 집이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을 뿐 아니라, 집 없는 사람들의 나름의 안식처가 되어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2015년 브루스도 세상을 떠났고, 그의 딸 제니퍼 L. 테일러가 딜쿠샤를 중심으로 하는 가문의 스토리와 자료를 정리,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함으로써 할아버지 할머니의 한국에서의 아름다웠던 삶을 마무리했다.
서울시는 테일러 가족에게 딜쿠샤 복원을 통해 감사의 마음을 선사했다. 딜쿠샤는 등록문화재 제687호로 등록되어 국가가 관리하게 되었고 테일러 가족이 기증한 자료와 유물들은 복원한 딜쿠샤에 촘촘하게 재배치, 2021년 3월에 시민에게 공개됐다. 딜쿠샤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서울시와 원만한 협의 끝에 2018년 이주를 완료했다.
유물과 사진들이 전시된 딜쿠샤는 일단 집 외관은 물론, 실내가 너무도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1920년대 서양 중산층의 격조 있는 모습 그대로이다. 넓은 공간에는 품격 있는 가구와 소품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고, 무엇보다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남향집 거실에서 사랑스러운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1층에는 거실 내부가 재현되었으며, 테일러 부부의 결혼, 조선 입국 스토리, 한국에서의 생활, 딜쿠샤로의 귀향 등이 전시되어 있다. 2층에서는 재현된 거실 내부, 영상실, 기자로서의 활약상, 딜쿠샤 복원 스토리를 만날 수 있다. 전시된 가구, 전등, 오브제 등은 1920년대 빈티지 모습 그대로다. 부유하다는 게 단순히 돈이 많은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오래전 사랑이 넘쳤을 공간 딜쿠샤에서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위치 서울시 종로구 사직로2길 17(주차장이 없으며 차를 가져갈 경우 서울교육청 또는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에 세운 뒤 걸어서 올라간다. 인터넷 맵에는 딜쿠샤 바로 앞에 교남공영주차장이 뜨지만, 이곳은 거주민 전용 주차장으로 등록된 자동차만 주차가 가능하다)
관람 서울시 공공예약시스템 사전 예약
▶월암공원과 홍난파가옥
위치 서울시 종로구 송월1길38 관람 2021년 3월 현재 휴관 중
▶국립기상박물관
국립기상박물관은 건축물 관람과 함께 예로부터 기상 선진국이었던 조선과 관련된 스토리, 한국의 기상 장비 등이 전시되어 있다. 기상 관측 독점이 강력한 왕권과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 근대 서구식 기상 기술, 현대 기상의 특이점, 기상관측소의 존재감 등이 관련 도구와 텍스트로 전시되어 있다. 국보 제329호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사이즈의 기묘한 비밀, 흙을 파서 강우량을 조사했던 도구 ‘우택’, 제국주의 시대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준비하며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북태평양 천기도 외에 기상 레이더와 기상 위성의 차이점, 슈퍼컴퓨터는 왜 필요한가 등등 기상에 얽힌 재미있는 원리들도 만날 수 있다.
위치 서울시 종로구 송월동 52(주차장 제한적 개방, 서울시교육청 주차장 추천) 관람 사전예약제(국립기상박물관 홈페이지에서 가능, 평일 10:00, 11:00, 14:00, 16:00 / 주말 10:00, 11:00, 14:00, 16:00, 17:00 정시에만 입장 가능)
▶돈의문박물관마을
위치 서울시 종로구 송월길 14-3
▶경희궁
위치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관람 09:00~18:00 *월요일 휴관
▶서울역사박물관
위치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 55(전용 주차장 출입구는 경희궁 앞에 있음)
관람 2021년 4월18일까지, 평일 09:00~20:00, 토일 09:00~19:00 *월요일 휴관
[글과 사진 이영근(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74호 (21.04.13)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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