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사랑하고 싶어지는 그곳, 딜쿠샤..행촌동 로맨스

2021. 4. 13.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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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아래에는 행촌동이 있다. 오래 전 이 동네는 정동 외국인 거리와 연결되는 전망 좋은 동산이었다. 이 언덕 꼭대기쯤에 ‘딜쿠샤’라는 이름의 주택이 있다. 산스크리트어로 ‘희망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집에 이름을 붙이다니, 사랑스럽다. 딜쿠샤에서 서울성곽길을 따라 기상박물관을 들러 돈의동마을박물관, 경희궁, 서울역사박물관을 걸었다. 마음이 노골노골 봄볕에 녹아 내리는 기분이었다.

▶딜쿠샤 DILKUSHA, 기쁜 마음의 궁전

앨버트 와일더 테일러Albert Wilder Taylor와 메리 린리 테일러Mary Linley Taylor 부부는 이 집이 완공되자 ‘딜쿠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테일러 부부가 인도에서 신혼여행을 하다 들렸던 러크나우 지역의 곰티 강 근처에 있는 딜쿠샤라는 이름의 궁전에서 따왔다. 기쁨, 궁전 등의 의미가 그들에게 깊이 꽂혀있던 것이었다.

두 사람은 요코하마에서 만났다. 영국 여자 메리는 연극배우로 일본에서 공연 중이었고 미국 남자 앨버트는 조선에서 광산업을 하는 아버지를 도와 준설기 구입 차 일본 출장 중이었다. 1916년의 일이었다. 메리의 남동생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는 소식도 그때 요코하마까지 전달되었다. 깊은 슬픔에 빠져있던 메리를 위해 연극 단원들이 위로의 파티를 열었고, 그때 초대받은 손님 가운데는 앨버트도 있었다. 둘은 곧 친해졌고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메리는 인도로 돌아가야 했고 앨버트 역시 조선으로 떠나야 했다. 앨버트는 메리에게 호박목걸이를 선물하며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10개월 후 앨버트는 인도에서 메리와 재회했고 1917년 6월 봄베이 성 토마스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인도에서 석달 동안 허니문의 꿈을 꾸었다.

조선으로 돌아온 테일러 부부는 지금의 미동초등학교 건너편 충정로7길 부근 한옥에서 신혼집을 꾸렸다. 그들은 신혼집에 이름도 붙여주었다. ‘작은 회색집 The Little Gray Home’이 그것. 추측컨데, 메리는 문학소녀 같은 감성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부부는 작은 회색집에 살며 개화기 당시 한양의 대표적인 외국인 거리였던 정동은 물론 서소문에서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한양성곽길을 산책하며 조선의 감성을 함께 나누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은행나무골로 불리던 행촌동에서 은행나무 고목이 있는 땅을 발견한 부부는 그곳에 자신들의 새 집을 짓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세월이 더 흐른 뒤 그 땅의 주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부부는 단숨에 달려가 그 땅을 사 들였고 집을 지었다. 성곽길 산책을 하고, 집에 대한 욕망이 생기고, 기회가 오자 단박에 돈을 쓰고, 집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앨버트가 아버지를 따라 광산 사업을 하는 등 자금력이 탄탄했고 아내 메리의 꿈에 공감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조선의 평민들에겐 왜 그런 꿈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계급 사회가 끝나자마자 식민지 시대를 맞은 조선의 대중에게 딜쿠샤 같은 집은 멀고 먼 꿈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딜쿠샤의 테일러 부부에 대해 부정적 평가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국제 협약에 따라 조선에 진출한 광산 사업자이자 기술자였고, 서소문에서 테일러 상회라는 무역회사에 조선인을 고용, 말썽 없이 운영했기 때문이다. 또한 앨버트 테일러는 사업가로 활동함과 동시에 AP통신의 한국 공식 통신원으로 취업, 3.1독립운동 즈음 독립선언서를 조선총독부 몰래 일본으로 가져가 전 세계에 타전했다. 3.1독립운동에 참가했던 수원 제암리 주민들을 교회에 모아놓고 학살을 저지른 일본군 제암리 학살사건도 취재해서 해외 언론에 알린 인물도 앨버트였다. 그는 통신원 활동을 통해 식민지 조선을 응원했던 것이다.

문학 소녀 감성의 메리의 조선에 대한 사랑은 딜쿠샤에 전시되어 있는 그녀의 여행과 그림 속에서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의 금수강산에 매료된 메리는 남편, 아들과 함께 금강산을 두 번이나 여행했고, 여름이면 원산 갈마 해변의 더 헤이븐The Haven 별장, 화진포의 에이트 벨스Eight Bells 별장 등에서 피서를 즐기기도 했다. 메리는 금강산, 갈마해변 등의 풍경화는 물론 자신이 살던 행촌동, 서대문 일대의 마을 풍경들을 물론, 집안 일을 도와주던 공서방, 테일러 상회의 직원이었던 김주사의 초상화도 솜씨 좋게 남겼다.

▶당신의 애정에는 어떤 이름이 붙어있는가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테일러 부부는 적국 시민으로 분류되어 1941년 감금, 1942년에 강제로 추방당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자마자 테일러 부부는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1948년 남편 앨버트가 심장마비로 죽고 만다. 모든 게 끝난 것 같았으나 아내는 남편의 유해를 안고 해방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의 아름다웠던 삶을 잊을 수 없었고, 무엇보다 남편의 한국에 대한 애정의 깊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앨버트는 언더우드 가족 등의 도움으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치되었고 메리는 곧 한국을 떠났다.

그녀가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행촌동 언덕, 그들의 사랑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딜쿠샤였다. 메리는 캘리포니아 멘도시노로 돌아가 살다 1982년 남편 앨버트의 별로 떠났다. 딜쿠샤는 그 뒤에 소유주가 몇 차례 바뀌었다.

딜쿠샤가 앨버트와 메리 가족의 품으로 되돌아 간 것은 두 사람의 아들로 딜쿠샤에서 성장한 브루스 T. 테일러가 한국의 김익상 서일대학교 교수에게 부탁해 딜쿠샤의 존재를 확인하면서였다. 가족과 함께 딜쿠샤를 방문한 브루스는 직접 집을 확인했고, 자신의 부모가 지은 집이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을 뿐 아니라, 집 없는 사람들의 나름의 안식처가 되어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2015년 브루스도 세상을 떠났고, 그의 딸 제니퍼 L. 테일러가 딜쿠샤를 중심으로 하는 가문의 스토리와 자료를 정리,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함으로써 할아버지 할머니의 한국에서의 아름다웠던 삶을 마무리했다.

서울시는 테일러 가족에게 딜쿠샤 복원을 통해 감사의 마음을 선사했다. 딜쿠샤는 등록문화재 제687호로 등록되어 국가가 관리하게 되었고 테일러 가족이 기증한 자료와 유물들은 복원한 딜쿠샤에 촘촘하게 재배치, 2021년 3월에 시민에게 공개됐다. 딜쿠샤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서울시와 원만한 협의 끝에 2018년 이주를 완료했다.

유물과 사진들이 전시된 딜쿠샤는 일단 집 외관은 물론, 실내가 너무도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1920년대 서양 중산층의 격조 있는 모습 그대로이다. 넓은 공간에는 품격 있는 가구와 소품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고, 무엇보다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남향집 거실에서 사랑스러운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1층에는 거실 내부가 재현되었으며, 테일러 부부의 결혼, 조선 입국 스토리, 한국에서의 생활, 딜쿠샤로의 귀향 등이 전시되어 있다. 2층에서는 재현된 거실 내부, 영상실, 기자로서의 활약상, 딜쿠샤 복원 스토리를 만날 수 있다. 전시된 가구, 전등, 오브제 등은 1920년대 빈티지 모습 그대로다. 부유하다는 게 단순히 돈이 많은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오래전 사랑이 넘쳤을 공간 딜쿠샤에서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위치 서울시 종로구 사직로2길 17(주차장이 없으며 차를 가져갈 경우 서울교육청 또는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에 세운 뒤 걸어서 올라간다. 인터넷 맵에는 딜쿠샤 바로 앞에 교남공영주차장이 뜨지만, 이곳은 거주민 전용 주차장으로 등록된 자동차만 주차가 가능하다)

관람 서울시 공공예약시스템 사전 예약

권율 장군 집터 테일러 부부가 신혼 시절 한양성곽길을 산책하다 보고 반했다는 은행나무 뜨락이 혹시 이곳 권율 장군 집터가 아니었을까? 물론 그런 기록은 없다. 행촌동은 그 옛날 은행나무가 숲을 이룬 노란색 동산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서 마을을 내려다 보고 있는 420살의 이 은행나무는 마을의 품격을 높여주는 조상신처럼 사랑받고 있다. 나무는 딜쿠샤 바로 앞에 무성하게 서 있다. 권율(1537~1599) 장군은 임진왜란 때 큰 활약을 펼쳤고 백성들과 함께 행주대첩의 승리를 이룬 도원수였다.

▶월암공원과 홍난파가옥

월암은 달처럼 빛나는 바위라는 뜻이다. 실제로 이 바위는 야밤에 보아도 하얗게 빛나는 모습을 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이 일대를 월암동이라고 부른 적도 있다. 원래 한양성곽이 지나가던 자리였으나 개화기 때에는 독일인 마을이 조성되었다. 『대한매일신보』를 창간, 조선의 독립을 도왔던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의 집터도 이곳에 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광화문스튜디오 등 우리나라 초창기 원룸 다세대주택과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산동네 모습이었다. 한양성곽이 복원되면서 주택들은 사라졌고 지금의 월암공원이 조성되었다. 국민 동요 ‘고향의 봄’을 작곡한 홍난파(본명 홍영후, 난파는 아호)가 살던 집도 이곳에 복원되어 있다. 독일식 벽돌집을 홍난파가 사들인 것은 그의 말년 때의 일이었고, 이 집에서 적지 않은 창작곡을 만들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나라 서양 음악의 선구자이기도 한 그는 작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등 근대 서양음악의 다방면에서 발군의 음악성을 발휘했다. 미국 유학 중 독립단체인 흥사단에 가입해서 활동했으나, 귀국 후 흥사단 계열의 수양동우회에서 활동했던 이유로 구속당한 뒤 일제의 강압에 의해 사상 전향서를 쓰고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적극 참여한 사실 때문에 친일파 음악가로 분류되었다. 수양동우회는 홍난파뿐 아니라 소설가 이광수 등도 구속되어 극심한 고문에 시달리다 일부 인사들은 결국 친일로 돌아섰으나 고문 후유증 등으로 일찍 세상을 뜨는 불운을 맞기도 했다. 홍난파 역시 그랬다. 홍난파 가옥은 외관을 그대로이지만 내부를 전시관 형태로 변경하면서 원형은 유지되지 않았다. 월암공원 북쪽 끝에 있다.

위치 서울시 종로구 송월1길38 관람 2021년 3월 현재 휴관 중

▶국립기상박물관

1932년에 최초로 건축하고, 1939년에 증축한 기상관측소의 원형을 복원해서 작년 10월30일 ‘기상문화를 관측하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박물관에 가려면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예전 기상청으로 들어가는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데, 꼭대기에 올라가 느끼는 감성이 싱그럽다. 마당에서 바라보는 건물은 근대 모더니즘과 아르데코의 조화가 단조롭게 표현되어 있고, 관측 장비들이 설치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곳곳에 있는 진달래, 벗나무, 복숭아, 배나무 등 꽃나무들. 단 한 그루씩만 있는 이 나무들은 모두 계절 관측 표준목들로, 개화 시점을 통해 피부로 느껴지는 계절의 변화를 확인하는 자연의 도구들이다.

국립기상박물관은 건축물 관람과 함께 예로부터 기상 선진국이었던 조선과 관련된 스토리, 한국의 기상 장비 등이 전시되어 있다. 기상 관측 독점이 강력한 왕권과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 근대 서구식 기상 기술, 현대 기상의 특이점, 기상관측소의 존재감 등이 관련 도구와 텍스트로 전시되어 있다. 국보 제329호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사이즈의 기묘한 비밀, 흙을 파서 강우량을 조사했던 도구 ‘우택’, 제국주의 시대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준비하며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북태평양 천기도 외에 기상 레이더와 기상 위성의 차이점, 슈퍼컴퓨터는 왜 필요한가 등등 기상에 얽힌 재미있는 원리들도 만날 수 있다.

위치 서울시 종로구 송월동 52(주차장 제한적 개방, 서울시교육청 주차장 추천) 관람 사전예약제(국립기상박물관 홈페이지에서 가능, 평일 10:00, 11:00, 14:00, 16:00 / 주말 10:00, 11:00, 14:00, 16:00, 17:00 정시에만 입장 가능)

▶돈의문박물관마을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돈의문은 현재 강북삼성병원 앞 사거리에 위치했던 서울의 서대문이었다. 2003년 돈의문터 북쪽 마을이 뉴타운으로 지정되면서 현재의 박물관마을은 경희궁과 연결되는 공원으로 조성될 계획이었지만 이곳이 역사적으로 돈의문 안의 첫 마을이었다는 점을 감안, 박물관마을로 부활시켰다. 그 박물관마을에 봄이 한창이다. 화단에 꽃을 심고 곳곳의 화분에도 새로운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돈의문을 새문으로 부르던 오랜 전통을 이은 새문안극장에서는 실제로 ‘돌아오지 않는 해병’, ‘로맨스 빠빠’, ‘로보트 태권 V’,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독고탁’ 등이 유료 상영 중이다(월요일 휴관). 서대문 사진관에서는 누구나 낭만의 인생 샷을 찍을 수 있다. 돈의문 역사관, 스코필드 기념관 등 여러 가지 전시를 경험할 공간도 즐길 수 있고, 한지공예, 매듭공방, 마음명상, 국악체험 등 마을의 한옥에서 체험할 수 있는 여러가지 문화 콘텐츠들도 흥미롭다. 누구나 자유관람 혹은 도슨트투어에 참여할 수 있다. 마을 입장은 자유이지만, 시설에 들어가거나 체험하기 위해서는 일단 마을안내소에서 코로나 체크를 해야 한다. 월요일은 전체가 휴무이나 산책은 가능하다.

위치 서울시 종로구 송월길 14-3

▶경희궁

점심 시간 무렵에 찾아간 경희궁 돌담 둘레길에는 주변 직장인들의 산책 행렬이 끝이 없었다. 키다리 나무들은 여전히 거무튀튀한 색을 띄고 있는데, 그래도 사람들은 그 나무 사이를 삼삼오오 짝지어 웃고 대화하며 걷고 있었다. 경희궁은 서울의 5대 궁궐 중 한 곳이다. 인조의 아버지 원종(정원군)의 사저였던 곳인데, 임진왜란 후 광해군이 이곳에 왕기가 서렸다는 말을 듣고 궁궐로 편입했다. 인조반정 후 궁궐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으나 창덕궁이 소실되고 창경궁마저 불에 타 버리자 결국 왕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숙종이 이곳에서 태어났고 경종, 정조, 헌종이 숭정문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현대에 이르러 이곳에 학교가 세워지고, 서울역사박물관이 들어서면서 궁궐의 흔적은 많이 훼손되고 말았다. 경희궁지가 얼마나 넓은지, 경희궁이 복원되면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 우리의 궁궐이 부활하게 되는지, 할 말이 많지만 아직은 갈 길이 요원하다. 대한축구협회, 성곡미술관, 일조각출판사, 내수동교회, 구세군회관, 서울시교육청, 서울복지재단 등 이미 사유화 되거나 다른 시설이 들어선 곳들이 많은 게 경희궁의 오늘 현실이다. 서울역사박물관 관람과 함께 산책하기에 좋은 곳이다.

위치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관람 09:00~18:00 *월요일 휴관

▶서울역사박물관

행촌동 로맨스 산책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마무리 된다. 지금 이곳에서는 여러 특이점이 있는 전시가 진행 중이다. ‘한양을 지켜라’ 전시는 경상남도 함양의 양반인 1665년생 이지건이 17세기 말, 먹고 살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가 삼군영 취준생이 되어 고군분투 하다 끝내 합격하여 결혼도 하고 자식도 본 뒤 대를 이어 삼군영에서 일하는 과정을 그린 스토리이다. 이지건의 후손들인 이억령, 이억기, 이우복, 이희득, 이노득, 이흥철, 이지홍, 이지영, 이계근 등 누대에 이르는 무관 집안은 어려운 살림살이 속에서도 도성 방어군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살아갔다. 역사 전시는 보통 왕이나 사대부, 특별한 인물이나 사건 중심으로 열리는데 보통 사람의 대를 이은 삶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시민의 눈높이와 일치하는 지점이 많다. 1층 기획전시실에서 4월18일까지 열린다. ‘서울학교 100년’ 전시는 기증자들의 유물 중 학교 관련 자료만 선별하여 여는 전시다. 주제는 근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1880년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서울 학교의 문화와 모습을 담고 있다. 일제시대 때는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우민화 교육이 실시되었는데, 그 내용과 함께 그에 반발하는 교육 구국 운동도 함께 소개되고 있다.

위치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 55(전용 주차장 출입구는 경희궁 앞에 있음)

관람 2021년 4월18일까지, 평일 09:00~20:00, 토일 09:00~19:00 *월요일 휴관

[글과 사진 이영근(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74호 (21.04.13)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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