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건축가의 세상짓기] 공간의 기억 / 노은주·임형남

한겨레 2021. 4. 13.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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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는 작가의 기억이 만든 공간이자 꼬불꼬불한 길들이 마구 엉켜 있는 미로이다.

내 기억 속의 큰길이 거기 없기 때문이다.

기억 속에서는 '넓은 길' 안쪽에 집들이 잘 개어놓은 마른 빨래처럼 차곡차곡 들어서 있다.

잃어버렸던 자리로 되돌아온 시장이 도시의 기억을 지우는 일을 다시 시작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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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의 세상짓기]

노은주·임형남 ㅣ가온건축 공동대표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작가의 기억이 만든 공간이자 꼬불꼬불한 길들이 마구 엉켜 있는 미로이다. 주인공은 마들렌 과자를 입에 넣으며 뭉게뭉게 피어나는 기억을 엮어내기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속도로 지나가고 많은 소리와 냄새들이 어렴풋이 섞이기도 하며, 본 적도 없고 경험해본 적도 없지만 ‘친숙한’ 느낌의 공간들이 대책 없이 들이닥친다. 아주 불친절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그의 기억 속에 들어가 길을 헤매다 보면, 알 수 없는 아련한 감상이 피어난다. 이상한 일이다. 나는 분명 이 지루한 소설에서 길을 잃고 머리가 지끈지끈 아픈데 말이다.​

우리는 늘 현재라는 시간을 떠돌지만, 기억이라는 과거가 항상 동행한다. 기억은 정리가 잘된 책장처럼 꺼내기 쉽게 수납되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를 찾으러 들어가서는 엉뚱한 물건을 발견하고 그 물건에 사로잡혀 시간을 보낸다. 그 공간이 정말 편안하다.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네댓살 무렵 살았던 서울 주교동의 작은 한옥이다. 태어난 곳은 입정동이라는데, 마치 도입부가 사라진 소설처럼 내 기억은 갑자기 주교동의 골목과 좁은 마당에서부터 시작된다. 을지로4가역에서 청계천 쪽으로 걷다가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가로세로로 굽은 길이 몇번 겹치는데, 그 근처 어디일 것이다.

그 주교동 집을 지금은 찾을 수 없다. 내 기억 속의 큰길이 거기 없기 때문이다. 당시는 길이 최소한 2차선 도로 정도 너비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그곳에는 사람도 겨우 지나가는 좁은 골목과 간신히 차가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가느다란 길뿐이다.

기억이란 항상 과거를 확장하거나 어안렌즈처럼 공간을 왜곡하곤 한다. 기억 속에서는 ‘넓은 길’ 안쪽에 집들이 잘 개어놓은 마른 빨래처럼 차곡차곡 들어서 있다. 타일을 바른 벽과 민트색 페인트가 드문드문 벗겨진 나무 창틀의 유리창이 골목을 쳐다보고 있다. 그 중간에 우리 집이 있다. 전형적인 ​서울의 도심형 한옥이었다. 대문채는 따로 없었고 철문을 들어서면 남쪽으로 작은 섬처럼 장독대가 있고, 작은 마당을 ㄷ자로 안고 있는 집이 서로 쳐다보고 있다. 작은방과 부엌이 이어지고 부엌 위 다락에 빼꼼히 고개를 내민 창이 달려 있었다. 그 안에서 우리 식구들이 분주히 움직인다. 아주 오래전 일인데도 그 기억은 어제 일처럼 아주 또렷하다.

우리는 모두 ‘잃어버린 시간’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도시는, 특히 서울처럼 오래된 도시는 많은 이들의 기억을 씨줄과 날줄로 엮으며 만들어지고 성장해왔다. 도시는 결국 사람이 사는 곳이다.

잃어버렸던 자리로 되돌아온 시장이 도시의 기억을 지우는 일을 다시 시작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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