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흔적에서 교훈으로]소설 '순이삼촌' 배경, 북촌마을의 4.3
1947년 8월 13일, 삐라살포로 인한 경찰의 발포사건 발생
1949년 1월 17일 이틀 동안 마을 주민 400여 명 집단학살 당해
1978년 창작과 비평에 순이삼촌이 발표되면서 북촌사건 알려져
당팟, 옴팡밭, 애기무덤 등 북촌에 4.3유적지 관리 필요
제주에는 4.3유적지를 비롯해 수많은 다크투어 유적지가 존재한다. 제주는 대한민국의 대표 관광지이지만 제주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대한 제대로 된 기억의 전승이 우선 필요하다. 제주CBS <시사매거진 제주>는 사단법인 제주다크투어와 함께 제주에 존재하는 다크투어 유적지가 잘 보전되고 정확하게 안내가 되고 있는지 역사적 사건과 함께 짚어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방송은 매주 토요일 오후 5시 5분부터 방송되며, 노컷뉴스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 방송일시 : 2021년 4월 10일(토) 오후 5시 5분
■ 진행자 : 류도성 아나운서
■ 대담자 : (사)제주다크투어 양성주 대표
◇류도성> 오늘 소개해 주실 유적지는 어디인가요?
◆양성주> 오늘은 제주의 대표 해안마을인 북촌마을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과 유적지들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류도성> 북촌은 제주도의 대표 관광지이기도 하잖아요?
◆양성주> 그렇습니다. 넓게 펼쳐진 푸른빛 바다와 봄이면 샛노란 유채들로 가득한 이곳이 가장 참혹한 학살이 자행되었던 곳입니다. 제주올레길 19코스를 지나가는 길이기도 하고, 4·3길이 조성된 곳이기도 합니다.
◇류도성> 현재는 이렇게 아름다운 동네가 비극의 역사가 깃든 곳이라니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양성주> 참혹한 학살이 자행되고, 시민들의 뼈와 살과 피가 묻혀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제주다크투어의 고문이신 현기영 선생님의 '순이삼촌'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합니다.
◇류도성> 북촌마을에는 어떤 사건이 일어났나요?
◆양성주> 북촌마을은 일제강점기부터 저항심이 강하고 기가 센 마을로 항일 운동가를 여럿 배출하고, 해방 직후에는 인민위원회 활동이 활발했다고 합니다. 이 마을 주민들과 경찰과의 첫 충돌은 1947년 8월 13일에 있었습니다.
◆양성주> 그날은 광복절 전이라 경찰관들이 마을 순찰을 돌고 있었는데요. 삐라를 붙이고 있는 소년을 발견하고는 뒤쫓아 가면서 발포를 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무고한 농민과 소녀 등 3명에게 총상을 입히게 됩니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삐라살포는 전국적으로 빈발했었습니다. 삐라에서 가장 많이 거론된 문제는 보리공출 문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미군의 행위를 비난하는 반미 삐라 등이었습니다. 삐라는 단지 우리가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열망들을 표출한 것뿐이었습니다.
◇류도성> 8월 13일 사건 이후 주민들의 분노가 엄청났을 것 같은데요.
◆양성주> 분노한 주민들은 미처 마을 밖을 벗어나지 못한 경찰관 1명에게 뭇매를 가하고 200여 명 가량이 함덕지서에 몰려가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마을 사람들은 경찰의 집중적인 수색을 받아야 했고, 청년 상당수가 육지로 빠져나가거나 중산간 마을로 피신했습니다.
◇류도성> 시위 이후 마을의 상황은 어땠나요?
◆양성주> 후에 4·3이 발발하고 6월 16일 북촌포구 경찰관 피습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류도성> 북촌포구 경찰관 피습사건은 어떠한 이유로 벌어지게 된 건가요?
◆양성주> 6월 16일 오전 북촌포구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배 한 척이 포구로 들어오는데요. 당시 상황상 마을 밖에서 사람들이 들어오면 모두 경계하던 시절이기 때문에 다들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날은 산에 올라가 있던 무장대 7~8명이 마을에 들어와 있던 날이었습니다. 배는 제주 읍내로 가던 길에 풍랑이 일어 피항 차 북촌 포구로 진입했던 것이었고, 안에 경찰 2명을 포함 15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류도성> 무장대가 마을로 들어와 있었고, 그 배에 경찰이 타고 있었다면 후에 상황이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갔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데요?
◆양성주> 그렇습니다. 하필 이날 무장대가 마을로 들어와 있었고, 배에는 경찰이 타고 있었습니다. 『4·3은 말한다』 제3권에서 1995에 나와 있는 당시 제주농업학교 4학년 학생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배가 포구에 닿자 청년 2명이 배에 올라왔고 "어디서 오는 배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일행들은 그들을 향보단원으로 알고 "지서주임을 모시고 제주성내에 지서 식량 등 물자를 가지러 간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두 청년은 경찰 2명이 있는 선실로 들어갔고 몇 마디 말을 주고받고는 배 안에서 갑자기 총성이 울렸고 선창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 명이 배 위로 뛰어 올라와 선실 안의 경찰관들을 향해 발포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양성주> 청년들은 승객들을 하선시킨 후 에워싸 포박했습니다. 배 안에는 경찰 가족이 많았고 이들은 청년들의 감시를 받으며 대낮에 산 쪽으로 끌려갔습니다.
승객들은 선흘곶 동굴에 감금되어 일주일 간 이 동굴 저 동굴로 옮겨 다녔다고 합니다. 한편, 배 안에서 총을 맞고도 살아 있던 경찰을 발견하고는 산 쪽으로 끌고 가 학살했고 일주일 뒤에 경찰은 가족들이 감금됐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됩니다.
◇류도성> 경찰이 정보를 입수하고 곧바로 토벌 작전이 전개되었나요?
◆양성주> 경찰은 즉각 군경 합동 토벌 작전을 전개했고, 피랍되었던 13명은 모두 무사 귀환했습니다. 『4·3은 말한다』 제3권, 1995에 나와 있는 당시 피랍되었던 분의 증언에 따르면 "조금만 늦었어도 산에서 인민재판을 통해 목숨을 잃을 뻔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토벌대는 숲속을 뒤져 무장대 9명을 검거했고 이들의 신병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이후 북촌마을은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류도성> 어떤 사건이 발생하게 되나요?
◆양성주> 1949년 1월 17일 고작 이틀 동안에 마을 주민 400여 명 가까이 집단 학살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북촌사건'은 제주4·3 기간 중 발생한 가장 큰 비극이라 할 수 있습니다.
◇류도성> 해안가 마을은 초토화 대상이 아니었는데 북촌은 해안가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왜 수백여 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어야만 했던 건가요?
◆양성주> 1948년 겨울로 접어들면서 많은 마을에서 집단 학살이 벌어지는데 북촌마을은 피해가 적었습니다. 앞에 있었던 사건들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군인과 산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며 눈치껏 처신을 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949년 1월 17일 오전에 무장대의 습격으로 군인 2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북촌마을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무장대의 공격에 대한 보복을 애꿎은 마을 주민들에게 하면서 말도 안 되는 숫자의 희생자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류도성> 당시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어요?
◆양성주> 당시 2연대 소속 군인들을 태운 트럭이 북촌리를 경유해 함덕 대대본부로 가던 도중에 무장대의 습격으로 군인 2명이 사망하게 됩니다. 이에 마을 구장을 비롯한 마을 유지들이 의논을 하고 시신을 싣고 함덕에 있는 대대본부로 싣고 가게 됩니다.
군인들은 주민들이 보초를 제대로 서지 않았다며 사망의 책임을 주민들에게 물었습니다. 시신을 수습한 주민 중 경찰 가족 1명을 제외한 나머지 8명을 함덕리 고두물로 끌고 가 구타 후 총살했습니다.
◆양성주> 그렇습니다. 군인들은 총을 난사하며 마을로 진입했고 주민 모두에게 북촌초등학교로 집결할 것을 명령하고서 온 마을을 불태웠습니다. 당시 마을이 불타는 광경과 군인들의 집결 명령으로 주민들은 엄청난 혼란과 공포감이 극에 달했을 것입니다.
◇류도성> 그렇다면 군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마을 주민 대부분을 북촌초등학교로 집결하라 명령을 내렸던 것인가요?
◆양성주> 그렇습니다. 마을에 있던 무고한 주민들에게 모두 집결 명령을 내렸고, 당시 무려 1,000여 명의 주민들이 학교 운동장으로 집결하면서 운동장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주민들을 운동장으로 집결시킨 후 현장 지휘자는 교단에 올라 민보단(경찰의 협조기관 성격으로 조직) 책임자를 나오도록 해서 마을 보초를 잘못 섰다는 이유로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즉결처분했습니다.
◇류도성> 후에 학교 운동장에서 계속 총살이 집행됐나요?
◆양성주> 군인들은 학교 동쪽 울타리에 기관총을 걸어놔 주민들을 위협했고, 운동장 앞에서 긴 장대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군경 직계 가족과 가족이 아닌 주민들을 분리해서 30~50명씩 단위로 끌고 가 현재 '순이삼촌 문학비'가 세워져 있는 옴팡밭과 당팟 등에서 사람들을 집단 학살했습니다.
오전 11시에 시작된 보복살인은 오후 5시 정도 대대장의 중지 명령이 있을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300명가량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전해오는 증언에 따르면 당시 군인들은 사격 경험이 없는 군인들에게 경험을 쌓기 위한 일환으로 주민들을 한 명씩 쏴서 죽이게 했다는 잔인한 만행을 벌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류도성> 피해자 수가 400여 명이 넘어간다고 들었는데, 이 숫자가 장기간에 걸쳐서가 아니라 단 며칠 안에 발생했다는 건가요?
◆양성주> 운동장에서 300명을 살상한 2연대 군인들은 나머지 주민들에게 다음 날 함덕본부로 집결 명령을 내립니다. 그 집결 명령에 따라 함덕본부로 간 사람들 중에 100여 명이 또 학살 당하게 됩니다.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큰 희생자를 낸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북촌리 공동체는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1949년 1월 17일 북촌리 대학살 사건이 발생하고 희생된 주민들을 위해 묵념을 했다는 이유로 침묵을 강요당했던 '아이고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양성주> 1954년 1월 23일, 북촌리에서 마을 청년이 군대에서 죽어 마을장례를 하게 되었는데, 시신 대신 죽은 이의 옷을 꽃상여에 넣고 생전에 살던 곳, 놀았던 곳을 찾아다니는 의식이 마을의 오랜 풍습이었다고 합니다.
꽃상여는 생전에 고인이 머물렀던 마을을 순례 후 마지막으로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들어갔고, 의식을 치르는 와중에 5년 전 그 자리에 있던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죽음의 공포가 운동장을 가득 채우던 그 날을 생각하며 죽은 자들을 위한 술 한잔의 의식은 여기저기 '아이고' 울음소리로 변하며 운동장을 메웠고 설움에 복받친 '아이고' 곡소리는 경찰 상부에 보고되면서 이장을 비롯한 여러 명이 불려가 고초를 당하고 다시는 4·3을 집단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나온 일을 마을 사람들은 '아이고 사건'이라고 불렀습니다. 이후 북촌리 사람들은 더욱 숨죽인 세월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류도성> 당시 금기의 역사였던 제주4·3이 현기영 작가님의 소설인 '순이삼촌'을 통해 발표되면서 한국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죠. 순이삼촌 문학비가 옴팡밭 일대에 세워져 있다고요?
◆양성주> 그렇습니다. 제주4·3을 말하려 하면 "속솜허라" 했던 시절, 1978년 창작과 비평에 순이삼촌이 발표되면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바로 이 순이삼촌의 배경이 된 곳이 이곳 북촌입니다. 현기영 선생님은 4·3을 소재로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관계기관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으셨고 이후 순이삼촌은 금서가 되기도 했습니다.
2000년, 4·3 북촌 유족회 창립을 시작으로 2009년에 너븐숭이 4·3기념관이 개관하면서 북촌은 4·3을 기억하기 위해 제주를 찾는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잘 알려진 유적지가 되었습니다. 주변의 당팟과 옴팡밭, 애기무덤 등 아름다운 해안마을 북촌에 서려 있는 4·3의 이야기는 더욱 처연함을 자아냅니다.
◇류도성> 옴팡밭 일대에 세워진 순이삼촌 문학비가 당시 널브러진 시체들을 형상화했다고요?
◆양성주> 맞습니다. 4·3 당시 옴팡밭 일대는 "마치 무를 뽑아 널어놓은 것 같이"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고 합니다. 원고가 새겨진 빗돌들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건 당시 죽어간 희생자들의 시신을 연상케 한 것이고 중간마다 글자가 없는 백비는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비극적 사연들과 역사의 올바른 정리를 기다린다는 의미입니다.
이 밭의 가운데에는 작은 봉분이 하나 있는데요. 당시 희생된 어린아이의 무덤입니다. 너븐숭이에는 어린아이들의 무덤인 애기무덤들이 많이 있습니다. 당시 어른들의 시신은 수습할 수 있었지만, 아이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무덤을 만든 게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20여 기의 애기무덤이 모여 있는데 적어도 8기 이상은 북촌대학살 때 희생된 어린아이의 무덤이라고 합니다. 당시 죄 없이 희생된 아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작은 손길들(과자, 장난감, 편지 등)은 눈시울을 젓게 합니다.
◆양성주> 지난해 제주다크투어는 유적지 100곳에 대한 실태조사를 벌였는데요. 북촌은 대표적인 제주4·3 유적지 중 한 곳인 만큼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었습니다. 이번에는 당시 지적 사항이 개선되었는지에 대해 중점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작년 7월 조사 당시, 글자를 확인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이 심했던 '당팟(4·3희생터)', '정지퐁낭' 유적지 안내판은 정비가 이뤄진 모습이었습니다. 지난 3월에 2년 만에 시트지 교체가 이뤄졌다고 합니다.
◇류도성> 다른 유적지 안내판도 새롭게 정비가 되어 있었나요?
◆양성주> 금이 쩍쩍 가 있던 옴팡밭 안내판도 새롭게 정비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너븐숭이 4·3유적지' 안내판 옆에 설치되어 있던 유적지 소개 QR코드는 지난번 조사 때와 마찬가지로 접속 불가로 개선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너븐숭이 4·3기념관 건너편에는 2개의 유적지 지도 안내판이 조성되어 있는데요. '옴팡밭'이라는 학살터의 이름이 빠져 있거나, 옴팡밭에 새롭게 조성된 '순이삼촌 문학비'라는 이름으로 갈음되어 있었습니다.
처음 오시는 분들은 그 자리가 학살터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들었습니다. 최소한 순이삼촌 문학비-옴팡밭으로 병기를 하거나 표기를 해야 할 것입니다.
◇류도성> 안내판 시트지가 교체된 것 외에는 따로 개선된 점은 없었나요?
◆양성주> 옴팡밭, 애기무덤, 당팟, 정지폭낭 등 일부 유적지 안내판 시트지 교체작업이 이루어진 것 외에 따로 개선된 점은 없었습니다. 너븐숭이 기념관은 이동약자 접근은 가능하지만, 시각장애인 등을 위한 점자 안내나 음성변환용 코드는 여전히 부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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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CBS 류도성 아나운서] ryuds@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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