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과 정년에 관해 알아야 하는 것들
한국은 노동조합이 정년을 연장해달라고 요구하지만, 프랑스에서는 노동자들이 ‘정년 연장 반대 시위’에 나선다. 이 차이는 왜 발생할까?
정년의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의 정년은 ‘강제로 고용계약을 종료시키는 나이’를 뜻한다. 프랑스를 비롯한 많은 유럽 국가에서 정년은, 고용 여부와 관계없이 ‘연금을 받기 시작하는 나이’와 연동된다. 노동자의 권리 개념이다. 정부가 정년을 늦추면 연금을 받기 시작하는 나이도 따라서 늦춰진다. 이때 정년 연장은 ‘연금 받지 말고 더 일하라’는 의미가 된다.
공적 연금은 시민들이 노동시장에서 은퇴한 뒤에도 생계를 보장받게 하는 제도다. 취지상 은퇴 연령과 연금 수급 개시 연령이 일치하는 것이 표준적인 모델이다. 한국은 법정 정년이 만 60세인데,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이 현재의 만 62세에서 2033년 만 65세로 늦춰질 예정이다. 표준 모델에 따르면 법정 정년을 만 65세로 늦춰야 할 것 같지만, 한국의 노동시장은 이런 표준 모델과 동떨어져 있다는 게 문제다. 법정 정년인 만 60세까지 안정적으로 고용을 유지하는 사람이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법정 정년을 연장하면, 노동시장 중심부에 있는 이들만 혜택을 볼 가능성이 높다(12~19쪽 기사 참조).
설령 노동시장 중심부만 정년 연장의 혜택을 입더라도, 정년이 늘어난 이들이 그만큼 보험료를 더 낼 테니 연금 재정에 도움이 되리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국민연금은 2057년 고갈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이는 “착시효과일 뿐, 본질적으로 국민연금의 재정 불안정을 더 심화시키는 조치다”라고 연금 전문가인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은 말했다. 왜? “보험료 납부 시점과 연금 수급 시점은 다르다. 정년을 연장하면 납부자들이 늘어나니 단기적으로는 보험료 수입이 증가한다. 하지만 이들이 몇 년 뒤 수급자로 전환되면 새로 보험료를 납부한 기간이 급여에 산정되므로 연금 수급액이 오른다. 게다가 현재 국민연금은 자신이 낸 돈의 2.6배를 돌려받는 구조다. 국민연금으로서는 100을 받고 260을 내줘야 하니 결과적으로 연금 재정에 부정적이다.”
누군가는 정년 연장을 국민연금 재정과 연결짓는 일에 화가 날지도 모른다. 국민연금은 1988년 소득 대비 연금급여 비율(40년 가입 기준, 이하 소득대체율) 70%에 소득 대비 보험료율(이하 보험료율) 3% 체제로 출범했다. 이후 두 차례 연금 개혁으로 현재 보험료율은 9%이고 소득대체율은 2028년 이후 40%가 된다. 그런데도 연금 재정이 불안정하다니, 나라에 ‘도둑놈’이 많거나 국민연금공단이 기금 운용을 잘못해서일까?
그렇지 않다. 독일도 2001년 연금 소득대체율을 70%에서 53%로 낮췄고, 2030년 이후엔 43%로 더 낮춘다. 다른 나라들도 연금 계산식을 바꾸거나 보험료율을 올리거나 수급 개시 연령을 늦추는 등 연금 개혁을 추진해왔다. 인구가 늘어날 때는 ‘적게 내고 많이 받는’ 연금으로도 문제가 없었지만,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연금의 ‘보장성’보다는 연금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개선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고령화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출산율은 최저인데, 연금 보험료율마저 세계적으로 매우 낮은 수준이다(2018년 기준 보험료율은 독일이 18.6%, 스웨덴은 21.7%, 일본은 18.3%, OECD 평균은 18.4%다). 사실 소득대체율 40%의 연금을 받으려면 보험료율을 현재의 9%에서 당장 두 배 가까이 올려야 재정 균형이 맞는다. 이대로라면 국민연금 재정이 고갈되는 2057년 이후 미래세대는 소득대체율 40%를 적용받기 위해 소득의 30% 이상을 연금으로 내야 한다.
물론 ‘적게 내고 많이 받는’ 지금의 연금이 현 세대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연금 개혁은 늘 인기 없는 주제다. 가뜩이나 현재 국민연금 평균 급여액은 월 54만2000원으로 ‘용돈 연금’이라는 비아냥을 받는다. 그래서 노동조합은 재정 고갈 우려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오히려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한국의 소득대체율 자체는 낮은 편이 아니고 국제 평균에 가깝다. 그럼 우리는 왜 외국처럼 연금이 ‘빵빵하지’ 않나? 연금 평균 가입 기간이 15년 정도로 30년을 훌쩍 넘어가는 외국에 비해 지나치게 짧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의 명목 소득대체율은 40%이지만 실질 소득대체율은 20% 초반에 머무르는 이유다.
오건호 위원장은 “연금 수급액은 소득대체율과 가입 기간의 결합으로 정해진다. 아무리 소득대체율이 높아도 근속연수가 짧아서 가입 기간이 짧아지면 받는 금액도 줄어든다. 이런 상황에서 소득대체율을 올리면, 누구의 연금 수급액을 끌어올릴까? 가입 기간이 긴 사람들의 수급액을 끌어올린다”라고 말했다. “가입 기간이 짧고 소득이 낮으면 내는 보험료도 작고 받는 연금액도 작아진다. 연금 내 불평등은 노동시장 불평등에 따른 고용불안정과 임금격차를 그대로 반영한다. 젊었을 때 노동시장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국민연금에서도 사각지대에 남는다.”
하위 계층 노후 보장 위한 기초연금
사각지대의 핵심은 ‘지역가입자’다. 국민연금 가입자는 크게 사업장가입자(1인 이상 사업장의 사업주와 노동자), 그리고 이에 해당하지 않는 지역가입자로 나뉜다. 사업장가입자인 노동자는 보험료 절반(소득의 4.5%)을 사업주가 내준다. 10인 미만 사업장의 노사는 보험료 80%를 국가가 지원해준다(두루누리 사회보험료 지원사업). 같은 지역가입자라도 농어민의 경우 국가가 최대 50%까지 보험료를 지원한다. 그런데 도시 지역가입자에 대한 지원은 없다. “보험료를 내기 어려워 ‘납부 예외’를 신청한 사람 중 상당수가 도시 지역가입자다. 영세 자영업자, 프리랜서, 특수고용 노동자가 여기에 포함된다. 도시 지역가입자의 소득이 농어민보다 낮은데, 이들만 소득의 9%를 고스란히 보험료로 내야 한다. 차별이다(오건호 위원장).”
세계 각국은 연금 재정의 지속가능성과 더불어 하위 계층의 노후 보장에 시선을 돌리고 있다(이러한 흐름을 ‘재조준화’라고 한다). 보험료를 일정 기간 납부한 뒤 돌려받는 연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판단하에, 조세를 기반으로 한 연금 기능을 강화하는 것이다. 우리로 치면 기초연금이 이에 해당한다. 국민연금 가입자 중 납부예외자가 328만명(약 15.1%), 13개월 이상 장기 체납자가 106만명(약 4.9%)에 달하고, 자영업자의 국민연금 가입률이 50%대에 머물며, 국민연금 최소 가입 기간 10년을 채우지 못하는 등의 이유로 국민연금에서 배제되는 이들이 많은 한국에서, 만 65세 이상 소득 하위 70%면 무조건 받을 수 있는 기초연금은 하위 계층의 노후 보장에 특히 중요하다.
2018년 국민연금 재정추계가 발표된 뒤 문재인 정부는 네 가지 연금 개편 방안을 내놓았다. 월 30만원인 기초연금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45%로, 보험료율을 12%로 올리는 방안에 무게를 두었다. 그러나 이조차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시간만 흐르고 있다. 정년 연장만으로 은퇴 뒤 ‘소득 크레바스(빙하 표면에 생긴 깊은 균열)’를 논하기에는, 그 뒤에 너무 많은 이야기가 있다.
전혜원 기자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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