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 공직자에 '지나치게 관대한' 프랑스 공화국 법정
지난 3월 초, 에두아르 발라뒤르 전 프랑스 총리가 뇌물수수 혐의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았다. 발라뒤르 전 총리는 우파 성향 정치인으로,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과 함께 2차 동거정부를 이끌었다. 자크 시라크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1995년 선거에도 후보로 출마했던 정계의 거물이다.
91세의 전 총리가 연루된 사건은 25년 전의 일이다. 그는 미테랑 정부에서 일하던 1993년에서 1995년 사이 뇌물을 수수한 혐의를 받았다. 1994년 프랑스 정부는 파키스탄에 약 8억3000만 유로(약 1조1000억원)에 해당하는 3대의 잠수함을, 사우디아라비아에 30억 유로(약 4조원) 규모의 호위함 2대를 판매했다. 당시 프랑스에는 무기를 판매할 때 ‘중개인’들을 선임해 ‘합법적 뇌물(pots-de-vin légaux)’인 수수료를 지급하는 관행이 있었다. 명목상으로는 거래를 수월하게 돕는 대가로 지급하는 돈이지만, 그 일부는 상대국 정책 결정권자에게 들어가는 뇌물이다. 여기서 중개인의 중요한 기능은 ‘돈세탁’이다. 문제는 중개료 일부가 상대국뿐만 아니라 1995년 프랑스 대선을 준비하던 발라뒤르 캠프에도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25년 전 사건이 뒤늦게 재판에 회부된 계기는 2002년 ‘카라치 테러 사건’이다. 2002년 5월8일 프랑스가 수출한 잠수함을 조립하러 파키스탄 남부 카라치로 갔던 기술자들이 폭탄테러를 당한 것. 버스에 타고 있던 프랑스 국영 조선소(Direction des Constructions Navales, DCN) 직원 11명이 사망했다. 애초 프랑스 수사 당국은 9·11 테러 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던 점을 고려해 배후를 알카에다로 봤다. 하지만 7년이 지난 2009년, 한 조사관이 다른 가능성에 주목하면서 사건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995년 당선된 시라크 대통령이 중개인에게 지불해야 할 무기 거래 중개료를 지급 중단하는 바람에 일어난 ‘보복성 테러’라는 것이다.
무기 거래와 테러 간의 연관성을 다룬 언론보도가 뒤따랐다.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2010년 4월26일 사우디아라비아와의 무기 계약서 복사본을 입수해 보도했다. 압둘 라만 엘아시르와 지아드 타키에딘이라는 두 중개인이 ‘Sawari 2’라 불리는 호위함 판매 계약을 통해 12개월에 걸쳐 총 2억1000만 유로(약 2800억원)를 수수료로 받기로 했다는 내용이다. 시라크 정부가 지급을 중단하기 전까지 중개인들은 5400만 유로(약 724억원)를 받았다고 보도되었다. 적지 않은 돈이지만, 중개료 총액의 4분의 1만 수령한 것이다. 또한 수사 당국은 프랑스 국영 조선소의 전 재무 담당자로부터 “정치권력이 두 사람을 중개인으로 임명했다”라는 진술을 확보했다고 한다.
주간지 〈파리 마치〉의 2011년 9월27일 보도도 충격적이었다. 프랑스 국방부가 문제의 중개인 두 명을 선임했는데, 그 시기가 파키스탄과의 계약이 거의 성사될 무렵인 1994년 7월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중개인들이 거래를 성사시키는 데는 거의 개입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즉, 중개인들은 거래 이후 중개료를 전달할 목적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프랑스가 사우디아라비아에 호위함을 판매할 때도 같은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카라치 테러 사건을 수사하는 것과 별개로 프랑스 수사 당국은 2011년부터 공금횡령 혐의를 조사하는 수사단을 꾸렸다. 수사단은 중개인들이 요구한 ‘지급 방법’에 주목했다. 특성상 적지 않은 액수인 거래수수료는 여러 해에 걸쳐 지급되는데, 이 사건 중개인들은 ‘중개수수료를 1년 내에 지급하라’는 이례적 요구를 했다. 수사 당국은 파키스탄과의 계약이 1994년 하반기에 진행되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다음 해에 프랑스 대통령 선거가 열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중개료가 대통령 후보 캠프 중 어딘가로 흘러갔을 가능성이 있다.
여간해선 유죄 선고하지 않는 법정
수사 결과 1차 대통령 선거 3일 뒤인 1995년 4월26일 발라뒤르 후보 선거캠프 계좌에 모두 1억 프랑(유로화 이전 프랑스의 화폐단위로 약 201억원)의 현금이 입금된 사실이 밝혀졌다. 수사 당국은 같은 해 4월 초에 중개인 한 명이 중개료를 입금받은 스위스 은행 계좌에서 같은 금액을 인출한 것도 알아냈다. 앞뒤가 딱 맞아떨어진다. 수사단은 발라뒤르 캠프가 무기 거래 중개수수료를 받아 선거자금을 마련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조사를 벌였다. 2013년 6월엔 중개인 중 한 명인 타키에딘이 발라뒤르 선거캠프 대변인에게 1994년 말 스위스에서 세 번에 걸쳐 한국 돈으로 약 16억원에 해당하는 현금을 전달했다고 진술했다.
2020년 6월15일 경범재판소(Le tribunal correctionnel)는 선고를 내렸다. 중개인 두 사람, 이 둘을 임명한 국방부 고문인 르노 돈디외 드바브르, 발라뒤르 후보 캠프장 니콜라 바지르, 캠프 대변인 티에리 고베르, 그리고 국영 조선소 국제부 담당으로 국방부가 무기 계약에 가담할 수 있게 도운 도미니크 카스텔랑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발라뒤르 전 총리와 프랑수아 레오타르 전 국방장관은 공화국 법정(CJR)에서 재판을 받았다. 공화국 법정은 3명의 대법원 판사와 각각 6명의 하원, 상원의원으로 구성된 법정으로, 장관이나 총리 등 고위 공무원의 재임 중 범법 행위를 심판한다. 공화국 법정에서 재판받은 역대 고위 공무원 8명 중 3명은 무죄, 3명은 집행유예, 2명은 형을 면제받았다. 사실상 공화국 법정은 공직자에 대한 실형을 내린 적이 없어서 이번 재판은 더 큰 주목을 받았다.
2021년 3월4일 공화국 법정은 발라뒤르 전 총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발라뒤르 대선 캠프 자금 1억 프랑(약 201억원)이 어디에서 지급됐는지 명확한 증거가 없다”라는 이유를 들었다. 반면 레오타르 전 국방장관은 실형을 받은 주요 중개인들의 범법 행위에서 ‘중심이자 동력 역할’을 맡았다는 이유로 징역 2년과 10만 유로(약 1억3000만원) 벌금형을 받았다.
발라뒤르 전 총리는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자신을 둘러싼 의혹이 ‘소문이고 거짓증언들’이며, “총리가 (계약에 대한) 모든 사실을 알아야 하는 의무를 갖지는 않는다”라고 주장해왔다. 무죄선고를 받은 뒤 발라뒤르는 “결백을 인정해준 공화국 법정의 결정에 만족한다”는 입장문을 내놓았다. 그의 변호인은 라디오 프랑스앵포와의 인터뷰에서 언론을 비판했다. 방송에서 그는 “에두아르 발라뒤르는 25년간 많은 의혹과 비방, 주장의 대상이 됐다. 그에 대해 비판한 언론 기사만 7500건이 넘는다”라고 말했다. 또한 판결에 대해 “이성과 인권의 승리이자 진실의 승리, 즉 정의의 승리”라고 주장했다.
반면 카라치 테러 사건 희생자 가족의 변호인인 올리비에 모리스는 기자회견에서 “공화국 법정에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고위 공직자에게 유죄를 선고하지 않는 공화국 법정을 폐지하라고 요구했다. 프랑스 라디오채널 RTL은 3월5일 ‘카라치 사건:공화국 법정은 지나치게 관대한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번 판결 역시 “그들만의 정의”라고 적었다.
파리·이유경 통신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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