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년만에 첫직장 찾은 김동연, 그가 까마득한 후배 행원들에게 해준 얘기는?

2021. 4. 13.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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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은행 젊은 직원들, 김 전 부총리를 강연에 초청
"옛 은행 선배와의 대화로 젊은 하나인 길 찾겠다"
김 전 부총리는 하나은행 전신 한국신탁은행 출신
김동연, 가보로 여기던 옛사진 꺼내며 후배와 소통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최고일꾼이 돼달라"
"도전 두려워말되 무조건 오늘을 행복하게 살길.."
은행 근무시절의 김동연. 사진은 서울신탁은행 기업분석부 행원 때. [강연PPT자료]

[헤럴드경제=김영상 기자] 지난 12일 오전 8시40분께 서울 중구 을지로에 위치한 하나금융그룹 명동사옥.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사옥 앞에 도착했다. 그는 건물을 잠시동안 올려다봤다. 감개무량한 표정이었다.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고, 눈시울은 약간 붉어졌다. 왜였을까.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열일곱살 그리고 스물다섯살의 김동연’이 자신의 눈에 밟혀서였다.

사연은 이렇다. 하나은행은 김 전 부총리의 친정(첫 직장)이다. 김 전 부총리는 덕수상고 3학년때인 지난 1974년 11월 한국신탁은행에 촉탁행원(오늘날의 수습 또는 인턴)으로 입행했다. 거기서 은행 업무는 물론 선배 행원들의 잔업무 지시와 심부름으로 여기저기 뛰어다녔을, 여드름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소년의 김동연 모습을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늘날 ‘고졸신화’의 주인공으로 통하는 김 전 부총리의 남다른 스토리 출발점이 바로 한국신탁은행이었던 것이다. 수습 몇개월뒤인 1975년 2월1일, 그는 은행의 정식 발령을 받았다. 어엿한 초급행원(고졸) 자격으로 사회에 발을 내딛은 것이다. 정식 발령 부서는 ‘심사부’였다. 말그대로 대출을 심사하는 심사부는 은행에서 파워가 있는 부서였고, 권한도 많은 곳이었다. “고졸행원이 처음부터 심사부 발령 받기가 쉬운 것이 아닌데, 웬일인지 거기에 배치받아 뿌듯했던 기억이 납니다.” 언젠가 그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 적 있다. 촉탁행원때부터 빠릿빠릿한 ‘소년 김동연’의 ‘될성부른 떡잎’을 알아주는 이가 많았고, 이것이 좋은 평가로 이어져 상대적으로 좋은 부서에 배치받았을 것이다. 

김 전 부총리가 입행했을때 한국신탁은행(1968년 설립)은 서울 종로구 조계사 근처 견지동에 위치했다. 그러다가 지난 1976년 8월 서울은행이 한국신탁은행을 대등합병했고, 그 이름은 서울신탁은행으로 바뀌었다. 은행 위치도 명동으로 옮겨졌다. 그런 서울신탁은행이 여러 역사를 거쳐 지금은 을지로 소재(명동사옥)의 하나은행이 됐다.

은행 이름이 바뀌고, 건물 위치는 이동했지만, 김 전 부총리는 이 은행에 열일곱살에 입사해 스물다섯살때까지 일했다. 총 7년8개월이었다. 군복무 1년 6개월(1977~1978년·육군 일병 제대)을 빼면 실근무 경력은 6년 2개월이었다. 언론에 많이 소개된 것 처럼, 그 와중에 야간대학도 다녔고, 죽어라고 공부해 고시에 패스했다. 

마지막으로 근무한 곳이 서울신탁은행 시절의 기업분석부였다. 직전엔 심사2부에서 일했다. “그때 부서의 모든 이가 중급행원(대졸)이었어요. 고졸 행원은 제가 유일했죠. 게다가 막내였고요. 상사 행원들은 그러니 선배이자 형들이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소중한 추억이 많습니다.” 그는 이렇게도 되돌아본 적 있다.

김동연 이사장의 고3 2학기(1974년) 은행수험표(왼쪽)와 은행원 시절의 명함. [강연PPT 자료]

김 전 부총리는 1982년 9월11일 은행을 그만뒀다. 약 40년 전 일이다. 그날은 고시에 패스한 김 전 부총리가 공무원으로 임용되는 날이었다. 그는 이 날짜로 국회 예산결산특별위 입법조사관(사무관) 발령을 받았다. 은행 퇴직일과 공무원 발령 일자가 똑같다. 마지막까지 은행 업무를 하고 곧바로 공무원 자리로 옮긴 것이다. 직장을 옮길때 사나흘 전이나 일주일전 쯤 사표를 내고 다음 직장으로 가는게 보통인데, ‘소년 가장’의 책임감으로만은 설명할 수 없는 절박함과 처절함이 인생을 지배하던 시절, 그게 김동연의 청년기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니 어찌 소회가 남다르지 않을 수 있을까. 첫 직장의 후신인 하나은행을 찾은 김 전 부총리로선 푸근한 친정 같은 살가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가 하나은행 건물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면서 회상에 잠긴 것은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그 세월을 몇번이고 넘어 건물 장소는 바뀌었지만 40년만에 첫 직장을 찾은 김동연. 찰나의 순간, 머릿속엔 과거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쳤을게 분명하다. 고졸인생의 좌절과 포기, 그리고 희망과 도전을 맛보면서 고뇌의 날을 보낸 그때, 하나은행 건물에서 그 시절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이날 김 전 부총리가 하나은행에 온 것은 젊은 은행 직원들의 초청을 받아 강연을 하기 위해서였다. 하나은행은 같은 경험을 했던 선배로부터 나아갈 길에 대한 혜안을 얻고 세대간 소통을 열어보자는 취지로 ‘선배와의 대화‘ 시간을 마련했는데, 하나은행 직원들이 같은 은행 대선배이자 사회 선배인 김 전 부총리를 초대한 것이다. 행사를 준비한 하나은행의 캐치프레이즈 중 하나가 ‘은행 선배와의 대화로 젊은 하나인이 나아갈 길을 찾다’였다. 이날 강연에는 젊은 은행 직원 50여명이 참석했고, 20여명 이상의 직원은 온라인 화상으로 강연을 들었다. 5년차 이하 너댓명, 10년차 이상 너댓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5~10년차의 행원들이었다.

“금융기관 강의는 처음입니다. 사실 공기관, 대기업, 금융기관 등에서는 강의 요청이 와도 정중히 사양해왔습니다. 그런데 은행 후배들이 초청한다는데 안올 재간이 있어야죠. 후배가 선배 보고 싶다고 하니, 다른 생각 다 물리치고라도 뛰어와야죠.” 강연에 앞서 김 전 부총리는 이날의 만남이 성사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날 강연 제목은 ‘김동연 선배와 함께 하는 유쾌한반란’이었다. 후배와 선배의 만남은 하나금융그룹 명동사옥 대강당에서 이뤄졌다. 강연은 코로나19에 대한 방역을 위해 좌석간 거리두기를 철저히 지켰다. 김 전 부총리는 이날 유쾌한반란 이사장으로서 강연에 임했다. 김 이사장(이하 이사장으로 통일)은 오랜 공직생활을 그만둔뒤 일상속의 혁신을 추구하는 유쾌한반란 법인을 만들었고, 법인을 통한 ‘일상의 혁신 대한민국’을 추구하면서 세대간의 소통을 극대화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김동연 이사장이 후배 은행직원들인 하나은행 직원들 앞에서 강연하고 있다.

김 이사장은 이날 후배들 앞에서 50분 정도 강연했다. 은행원으로서 출발과 도전, 그리고 지난날의 삶과 미래에 대해 얘기했다. 그는 강연을 통해 가보처럼 간직해온 오래된 사진 몇장도 공개했다. 은행 수험표, 은행원 명함, 동료들과의 은행원 시절 모습 등 개인적로는 향수가 묻어있는 소중한 사진들이었다.

김 이사장은 이날 만남이 어디까지나 은행 선배와의 만남임을 누누이 강조했다. “오늘 좀 일찍 왔는데, (높으신)몇분이 차 한잔 하자고 했는데, 후배들 빨리 만나고 싶어 서둘러 왔습니다. 전직 경제부총리 등의 타이틀이 아닌 은행 선배로서 초청 받은 자리니까 편하게 하시죠. 여러분도 그렇게 하실거죠?” “예”하는 함성이 돌아왔다.

김 이사장은 본인이 만든 PPT를 통해 강연을 시작했다. 그가 내놓은 강연 주제는 ‘젊은 하나인들과 함께하는 유쾌한반란’이었다. 그는 유쾌한반란 뜻부터 정의했다. “내가 맘에 들지 않는 것을 고치는 것이 ‘반란’입니다. 그런데 반란하면 좀 껄끄러운 단어라, 그 앞에 ‘유쾌한’이라는 말을 넣었습니다. 유쾌한반란은 그러니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내가 맘에 들지 않는 것에 대한 뒤집기’라고 할 수 있어요.”

김 이사장은 이날 강연에서 ▷남이 낸 문제 ▷ 내가 낸 문제 ▷사회가 낸 문제를 푸는 작업, 그게 유쾌한반란을 관통하는 키워드이자 젊은 하나인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라고 했다. 자신의 선택과 무관한 어려운 환경이라는 ‘남이 낸 문제’를 도전으로 이겨가는 여정, 남이 시키는 것이 아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는 ‘내가 낸 문제’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 그리고 사회에 대한 책임과 사회적 가치에 고민해야 하는 ‘사회가 낸 문제’에 대한 성찰 등을 화두로 제시했다.

그는 청계천 판잣집 시절, 강제이주로 쫓겨나 살게 됐던 광주 허허벌판의 움막집 시절, 매일 끼니걱정을 하던 가난했던 시절을 돌아봤다. 고3때 은행에 들어가면서 어머니, 할머니, 세 동생을 부양해야했던 소년가장으로서의 무거웠던 짐도 털어놨다. 유학생활과 공무원으로서의 삶도 반추했다. “나중에 깨달았어요. 제 지나온 삶이 어려운 환경을 이기기 위한 반란, 나 자신의 고정관념의 틀을 깨는 반란, 사회적책임을 실행하기 위한 반란과 무관치 않다는 것을요. 소소할 수 있지만 유쾌한반란을 통한 생활 속 작은 혁신을 추구하는 것은 아마 제 과거와도 연결돼 있을 겁니다.”

그가 소셜임팩트 포럼을 진행하면서 사회적 가치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김 이사장은 “예를들어 예전에는 그나마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있어 가난해도 노력하면 성공(세간에서 말하는 출세)하는 이가 많았는데, 지금은 교육이 오히려 부와 사회적 권력을 대물림하는 것으로 작용하지 않나 하는 반문을 해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고민해보자는 게 유쾌한반란 취지입니다.”

은행 후배들은 김 이사장의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았고, 그의 혹독하게 가난했던 시절의 에피소드 앞에선 마냥 진지했다. 

강연 후 질문과 대답 시간에는 50여분 할애됐다. 일방적인 강연이 아닌, 대화를 통한 소통과 교감이 더 중요하기에 질문과 대답 시간 역시 강연 시간 못잖게 주어져야 한다는 김 이사장의 생각이 반영된 대목이었다. 후배 은행직원들은 대선배를 향해 묻고 싶었던 질문을 자유롭게 꺼냈다. 강연장에 참석치 못한 일부는 온라인을 통해 화상으로 질문했다. 다음은 질의 응답 요약분.

김동연 이사장이 후배 은행직원의 질문을 받고 있다. 김 이사장은 이날 방청객 외에도 온라인 화상을 통해 후배들의 질문을 받고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답했다.

▶(후배 은행직원A) 선배님의 고졸신화를 잘 알고 있습니다. 꾸준히 도전하는 인생이었는데, 도전이라는 말을 꺼내면 저는 일단 겁이 납니다. 조언을 해주신다면.

-(김 이사장) 고백하자면, 저 역시 새로운 도전을 할때마다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남들은 제가 경제부총리를 하고 좀 (높은 사람이)돼봤으니까 엄청 대단한 사람이구나 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사실 그렇지 않아요. 저는 어렸을때 소심했고요. 약간 찌질이였습니다(청중들 웃음). 하지만 도전을 하다보니 처음엔 겁 나고 두려웠지만 어느새 익사이팅(exciting)해졌어요. 이제는 도전을 하면 기대가 됩니다. 사람은 처음엔 ‘눈먼열정’으로 살기도 합니다. 탈출구가 필요한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과연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냥 무조건 열정을 갖고 도전하는 것이죠. 이때 실패도 할 수 있겠지만, 눈먼열정으로 살다보면 ‘눈뜬열정’을 얻게 되기도 합니다. 조금은 방향성을 갖춘 열정이라고 할까요? 뭔지도 모르는 눈먼열정이 기반이 되면, 어느순간 눈뜬열정으로 도전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될지도 모릅니다. 후배님도 도전하다보면 눈뜬열정을 발휘하게 될 것으로 믿습니다.

▶(후배 은행직원B) 까마득한 우리 은행 후배들에게 ‘이것 한가지만은 꼭 해야하지 않나’란 것을 꼽아 주신다면.

-(김 이사장) 일단은 몸담고 있는 직장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상사나 동료에게 인정받아야 합니다. 직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면 다른 곳에서도 인정을 받기 어렵습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샌다’는 말처럼요. 인생의 가장 기본은 현재 하고 있는 일에서 최선을 다하고, 최고가 되는 것입니다. 또 당당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후배는 ‘저와의 기싸움에서 지지 않는 후배’입니다. 저도 100% 옳지만은 않거든요. 저도 틀릴 수 있어요. 그걸 당당하게 지적하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맡은 일을 주도적으로 일하는 후배라면 좋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건 은행원이 아니라 다른 직장, 다른 조직에 있는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기본 틀이라고 봅니다.

▶(후배 은행직원C) 선배님의 책 ‘있는자리 흩트리기’를 읽었는데요. ‘수평적 소통’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저 역시 조직에 있으면서 그런 점에선 고민이 많습니다. 수평적 소통이 말로는 쉽지, 어려운 것인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요?

-(김 이사장) 저 역시 정답을 말할 입장은 못됩니다. 사실 우리 세대는 효율을 우선시한 ‘빨리빨리’ 문화였어요. 조직에선 지시와 수용으로 이뤄진 게 대부분이고요. 은행에 있을때나 공무원으로 있을때나, (고백하건대)수평적 소통을 얘기했지만 그렇지 못한 적이 많았습니다. 효율을 핑계로 수직적 업무 처리를 많이 했습니다. 반성하고 있습니다. 다만 아주대 총장시절 젊은 학생들과의 소통, 공감을 위해 미팅을 많이했는데, 거기서 많이 배웠어요. 정답은 아닐지라도, 수평적 소통을 하려면 일단 젊은이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경청을 잘해야 합니다. 여기에 리더의 직관, 실행력, 용기와 소통에 대한 진정성이 조화를 이루면 수평적 소통이 조금은 가능해지지 않을까요? 물론 이런 조화를 이루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죠. 하지만 수평적 소통은 우리가 함께 일궈야할 중요한 조직문화라는 점을 잊지 않으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후배 은행직원D) 선배님 강의에서 들었듯이 ‘도전=성공’ 방정식이 많이 엿보여 개인적으로는 뭉클했습니다. 그런데 도전이 반드시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도전을 해도 많은 이가 실패합니다. 이사장님도 실패한 적이 있나요? 그렇다면 어떻게 실패를 극복했습니까.

-(김 이사장) 제가 도전하고 매번 성공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혹시 강의에서 그렇게 들으셨다면 제가 강의를 실패한 것이고요(청중들 웃음). 저역시 많은 실패가 있었습니다. 은행원 시절에도 공무원 시절에도 수많은 실패를 맛봤어요. 가슴 아픈 사례 하나 말씀 드릴게요. 제가 은행 그만둘때 고시 2개 붙었다고 했잖아요? 그게 단박에 붙은게 아닙니다. 바로 직전해 고시를 봤는데, 떨어졌어요. 그것도 충격적으로요. 그 사연 지금도 서럽습니다. 옛날 고시는 며칠을 오전, 오후로 나눠 논술시험을 보는데요. 첫날 오전의 윤리, 오후의 헌법 시험은 그런대로 잘 치렀어요. 두번째 날 오전에는 제가 가장 자신있는 과목 시험이 있었어요. 그날 나온 논술 주제를 보곤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요. 눈을 감고도 20페이지 분량을 술술 써내려갈 정도로 충분히 준비해온 주제였거든요. 시험지를 다 작성하고나니 시험관이 “답안은 그냥 책상에 놔두라”고 하더군요. 전날에는 시험지를 다 걷어가더니 이상하네라고 생각은 했어요. 시험장을 나와서 좀 있다가 난리가 났어요. 제 답안지가 없다는 거예요. 생각해보니 답안을 다 끝낸후 만년필과 잉크 등을 가방에 담으면서 답안지도 무의식적으로 넣은 겁니다. 시험관이 부정행위라고 노발대발했고요. 그때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됐습니다. 답안지를 인정받기는 커녕, 부정행위로 5년간 고시 시험을 볼수 없게 될 수 있다는 말에 기절할 뻔 했습니다. 다행히 답안지 초안이 있어서 부정행위가 아닌, 실수로 밝혀져 시험도 못보고 그날 쫓겨나는 선에서 끝났지만…. 나머지 시험도 못보고 시험장(한성대)을 나오는 순간, 울음이 터졌어요. 집까지 울면서 갔습니다. 하나의 예지만, 이런 일이 살면서 단 한번 있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무수히 많은 실수와 실패를 거듭했죠. 하지만 실패도 내 인생의 하나의 점입니다. 실패와 실수, 그리고 도전과 성공들의 점이 선으로 연결돼 나중에 그걸 되돌아보면 그게 ‘인생’임을 알게되는 거지요. 실패는 두렵고 피하고 싶지만 너무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후배들에게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잔잔한 바다에서 노를 저으려 하지말고, 풍랑이 거친 바다에서 때론 노를 저을 생각을 하시라’고요. 답이 됐나요?

사회자의 ‘마지막 한마디’ 요청을 받은 김 이사장은 강연을 통해 하고 싶은 얘기를 했는데, 정말 하고픈 말 하나가 있다고 했다. “후배님들,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그것도 지금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돼서,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 돼서 행복한 것은 의미가 없고 지금 행복한게 좋다는 것을 저도 얼마전에 깨달았습니다. 자기 중심을 갖고 행복하게 사는 것, 우리 후배님들은 그런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김동연 이사장의 책 '있는자리 흩트리기'.

강연장 참석자들, 그리고 온라인 화상으로 연결해 강연을 지켜본 후배 행원들이 힘찬 박수를 보냈다. 김 이사장은 강의와 질의응답이 끝난후엔 자신의 저서 ‘있는자리 흩트리기-나와 세상의 벽을 넘는 유쾌한반란’ 책을 일일이 사인해 주는 등 후배들에 성의를 다하는 선배 모습을 보였다.

이날 한쪽에선 가슴 뭉클한 풍경도 연출됐다. 방청석에는 김 이사장의 은행 상사였던 윤성로(81) 씨, 은행 선배였던 권태길(68) 씨도 참석했다. 이들은 김 이사장이 서울신탁은행 시절 퇴사 직전 마지막까지 근무하던 기업분석부 상사들이었다. 당시 윤성로 씨는 기업분석 과장이었고, 권태길 씨는 선배 은행원이었다. 이들은 김 이사장이 모신 초청인사(?)였다. 하나은행 후배들을 만나는 자리에 함께 하면 좋겠다는 김 이사장의 참석 요청에 흔쾌히 응한 것이다. 하나은행에서 34년간 일하며 고위직으로 은퇴한 윤 씨는 김 이사장과 관련한 옛일을 회고해 눈길을 모았다. “옛날 기업분석부에 있을 때 일입니다. 부장님이 주재하는 전직원회의에서 김 이사장(당시 김동연 행원) 때문에 우리가 혼난 적이 있습니다. 회의 전에 각자가 회사별 신용조사 리포트를 작성해 냈는데, 김 이사장이 낸 리포트가 너무 훌륭했던 모양이예요. 부장님이 “행원이 이 정도의 리포트를 만들어 냈는데 과장, 대리는 그동안 뭐했나”라고 크게 질책한 것입니다. 그때 김 이사장 때문에 우리들 다 난감했어요. 그때 알아봤죠(될성부른 떡잎을…). 하하하.” 그 말에 김 이사장은 “저는 기억에 없는데요”라고 한다.

김 이사장은 은행 시절의 인연을 소중히 해왔다고 한다. 공무원 임용 후, 또 장관이 된 이후에도 은행 상사들을 1년에 한번씩 저녁식사에 초대해 옛일을 회고하는 등 즐거운 모임을 가져왔단다. “오늘 존경하는 선배들을 모셨는데, 이 선배님들의 덕분으로 제가 오늘 이렇게 강연도 하고 그럽니다.” ‘한번 은행 선후배는 영원한 선후배’라는 은행업계의 끈끈한 정을 과시하는 김 이사장의 이 말에 젊은 하나인들의 가슴엔 뭉클함이 도배됐다. 

ys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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