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희의 한국후손, 화순 주자학 中보다 더 빛났다 [인문학종가]

2021. 4. 13. 08:12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화순 신안주씨 대종가는 주희(1130~1260)의 직계 한국 가문으로, 주자학을 중국보다 더 발전시킨 동양 인문학의 거점이다.

조선 건국의 이념적 토대를 제공해 세종대왕이 '주자대전' 목판을 제작·보급한 뒤 중국에서 보다 한국(조선)에서 더욱 꽃핀 동양의 전통사상이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대종가는 주자를 제향하는 주자묘(화순군 향토문화유산 제53호)를 건립하고, 한국과 중국에서 찾아오는 많은 참배객을 위해 교육프로그램 운영을 위한 주자학당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화순 신안주씨 대종가
향토문화유산 주자묘, 중국 참배행렬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화순 신안주씨 대종가는 주희(1130~1260)의 직계 한국 가문으로, 주자학을 중국보다 더 발전시킨 동양 인문학의 거점이다.

화순 신안주씨 주자 진영. 주자묘 사당에 모셔진 주희(주자)의 영정 [남도일보, 서정현 선임기자]

조선 건국의 이념적 토대를 제공해 세종대왕이 ‘주자대전’ 목판을 제작·보급한 뒤 중국에서 보다 한국(조선)에서 더욱 꽃핀 동양의 전통사상이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대종가는 주자를 제향하는 주자묘(화순군 향토문화유산 제53호)를 건립하고, 한국과 중국에서 찾아오는 많은 참배객을 위해 교육프로그램 운영을 위한 주자학당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 발 순례객은 마치 공자의 후손들이 안동에 찾아가 도산서원이 공자의 학문을 본토 보다 더 발전시켰다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감사의 비각을 세운 것과 견줄 만 하다. 본관 신안은 중국내 일족과 동일하다.

주희의 증손인 4세 주잠(1194~1260, 호는 청계)은 송인으로 남송에서 학문의 최고봉 격인 한림학사, 비서각 직학사를 역임했다. 송나라가 몽고의 침입으로 쇠락하자 1224년 가족과 문인 7학사(도성하·두행수·섭공제·유응규·조창·주세현·진조순)와 함께 나주 영산포로 입국했고 화순 능성(능주 옛이름)에 은거했다.

학사들을 압송하려는 원나라의 수색을 피하지 못한 섭공제와 조창은 원으로 소환됐지만, 주잠은 추적을 피해 적덕으로 개명하고 전북 진안 주천면 신안촌(주자천변)에 이거해 서당을 열고 주자학을 전수하다 능성으로 돌아와 사망하고 주천서원(전북 문화재자료 제142호)에 배향됐다. 신안주씨는 주잠을 한국의 시조로 모신다.

화순 신안주씨 동원사. 주자묘 내에 주잠, 주여경, 주열, 주인장, 주인원, 주인환을 추모하는 사당 회덕사가 있던 자리에 건립한 사당. [남도일보]

중시조 2세 주여경(?~?)은 은사과(과거시험의 일종)에 등과하고 벼슬은 좌승상·추밀원밀직사를 지냈다. 화순 동면 귀후재(화순군 향토문화유산 제59호)에 배향됐다. 후손들은 그의 묘를 찾지 못하고 있었으나 나주의 도로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지석(무덤 소재를 기록한 판석)으로 인해 주자묘 옆으로 옮겼다고 한다.

주여경의 아들인 3세 주열(1227~1287)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 쿠빌라이칸의 무리한 요구를 철회토록 설복해 구국재상으로 고려사 열전에 기록됐다. 좌리공신으로 능성군에 봉해졌다.

주열은 문장과 필법, 그리고 코가 빨간색일 정도로 술을 좋아했다. 원나라 공주가 놀리자, 충렬왕은 ‘이 노인의 마음은 물과 같이 맑다오’하니, 공주가 존경의 태도를 취했다고 전해진다.

4세 주인장(1243~1315, 시호는 정숙)은 한림학사를 거쳐 예부상서에 오르고 퇴관 후 화순 능주에서 여생을 보내며 능성파의 1세가 된다. 그의 아들 주의(1278~1366)는 충렬왕의 부마가 된다.

조선 개국에 참여하지 않아 가난과 수난을 겪어야 했지만 가학의 전통을 실천했고, 영조대부터 잡역 면제, 왕의 존경 표시 등 명예가 완전히 회복됐다.

화순 신안주씨 연자루 아래 주자 친필 글씨를 모사해 대리석에 새긴 수 [남도일보 제공]

13세 주엽(1596~1638)은 은봉 안방준 문하에서 배웠으며 병자호란 때엔 의병군에 참여했다. 주석환(1893~1955)은 독립운동가로서 1919년 만주로 건너가 광복군 사령부 모험부장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국내로 파견돼 정의단 조직, 군자금 송금, 일제헌병주재소·관청 등에 폭탄 투척하는 등의 활약으로 투옥돼 옥고를 치렀다. 중국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한 후 조국광복으로 환국해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자료협조: 전남종가회, 화순 신안주씨 대종가, 남도일보]

abc@heraldcorp.com

- Copyrights ⓒ 헤럴드경제 & heraldbiz.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헤럴드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