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융합] 감정은 정치의 최종 심급

한겨레 2021. 4. 13.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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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융합]정희진의 융합 _21
이십대 청년이 ‘정희진의 융합’을 먼저 읽고 그리다. 김우석

이성은 서구 근대의 역사적 산물
당대의 문제를 설명하지 못해

감정은 인식, 노동, 자본을 구성하는 실체
‘시대정신’이 아니라 ‘시대 정동(情動)’이 사회를 구성

감정은 몸이 사회와 상호 작용하여 반응하는
체현(體現), 신체화(身體化) 증상으로 ‘나’의 핵심
감정은 가장 정확한 사회성, 정치적 판단을 좌우

나는 이번 보궐선거에 대해 되도록 언급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감정’은, 준비했던 다른 글쓰기 주제마저 미루고 선거 이야기로 이끈다. 서울과 부산은 비대한 자치단체다. 이 때문에 이번 선거에 대한 지나친 분석은, 국민 전체의 의사를 대변하는 것처럼 비춰질 여지가 있다. 게다가 젠더 이슈는 20대 남성의 야당에 대한 절대적 지지로 표출되고, 이후 성차별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더욱 어렵게 되었다.

두 가지 글이 눈에 띄었다. <한겨레> 이주현 정치부장의 ‘박주민이 남긴 ‘도그지어’’와 <경향신문>에 게재된 최종렬 계명대 교수의 ‘위선과 민주주의’다. 내 입장은 두 사람의 글과 공감, 연동한다. 두 글 모두 정치의 최종 심급이 감정(感情)임을 논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가웠다. 대개 감정은 이성, 과학, 객관, 균형, 의식 등의 개념과 대립하는 낮은 가치로 간주된다. 이번 선거 때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도 “민주당이 잘못이 많지만 감정 대신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민주당 후보에게) 투표를 하라”는 식이었다.

이 글의 요지는 어느 후보가 더 부패한 방식으로 부자가 되었는가, 누가 더 서민을 위한 정책을 펼칠 것인가가 아니다. 이는 지역마다 사안마다 다르다. 코로나 방역 문제도 있다. 지금 상황에서 누가 국정의 피해자인지도 판단하기 어렵다. 수도권에 집이 한 채 있는 사람인지, 다주택자인지, 만사에 절망해서 투표할 기력조차 없는 사람인지…. 나를 포함, 모두가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이번 선거 결과가 전적으로 부동산 정책 실패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태도(‘내로남불’)다. 정당의 정책과 후보의 윤리성이 투표와 무관한 시대다. 그래서 상대방의 약점을 공격하는 네거티브 전략을 쓸 필요가 없다. 유권자는 ‘나쁜 사람’이라도 기꺼이 투표한다.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의 압도적 당선을 생각해보라. 그들이 깨끗한 부자였던가, 능력 있는 정책가였던가? 당시 표심을 움직인 것은 감정, 부자에 대한 동일시 욕망과 향수였다.

거짓말보다 위선이 불리한 이유

이주현 부장의 글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우리는 차악, 저쪽은 최악’이라는 식의 반응을 보여 왔던 민주당의 쇄신 의지”를 질문한다. 최종렬 교수는 인간은 ‘나쁜 사람의 당당한 거짓말’보다 ‘덜 나쁜 사람의 위선’을 참지 못한다고 본다.

나는 인간에 대한 판단이나 정치적 선택은 잘못의 ‘정도’와 맥락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나 역시, 누가 더 잘못했는가보다 나의 구체적 이해(利害)관계와 정보량 그리고 그에 따른 감정대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책으로만 배웠던 “감정이 정치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멀리 있는 모르는 보수 야당 사람들’보다 ‘건너 건너라도 아는 문재인 정권’의 일부 인사들의 행태를 알게 되면서, 누가 더 악인인가 하는 이슈는 사라졌다. 몇몇 정말 나쁜 사람들 때문에, 예전에는 이랑 작가의 표현처럼 “나 아니면 누가 이 일을 말할 수 있을까”라는 사명감(?)에서 지금은 “내가 왜 저들 때문에 더러운 글을 써야 하나”라는 피해의식이 생겼다(외압과 보복도 있었으니 말이다).

소수의(?) 여권 관계자들이 전통적인 보수 세력보다 더 나은 사람들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아는 ‘국민의힘’ 관계자들은 거의 없으므로 그들 사이의 ‘더 나음 정도’를 알거나 판단할 능력이 없다. 나는 녹색당과 정의당 후보가 출마하지 않는 한, 문 정권의 전통적인 지지자인 이른바 ‘집토끼’ 유권자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 여당에 투표하지 않았다. 몇몇 여당 인사들의 권위주의, 폭력, 약자에 대한 태도, 횡령과 비리, 상식 이하의 권력 지향과 이중성을 보면서 나는 이 정부 내내 욕지기 상태였다.

보수의 거짓말, 진보의 위선이라는 구도에서 보면, 후자가 훨씬 불리하다. ‘거짓말 담론’은 선의의 거짓말도 있다. 나중에 수습도 해야 한다. ‘참말’이 없으므로 상황에 따라 이해도 되고 일관성을 따지기도 어렵다. 거짓말은 참작의 여지가 있고, 당사자는 해명이라는 노동도 해야 한다. 그러나 위선자들은 다르다. 골수까지 썩은 이들이 정의의 사도처럼 행동하고, 개인의 이해를 대의로 포장하면서 도덕적 우월감까지 가진 이들이 있다. 이를테면, 확신범이다. 이런 이들은 희망이 없다.

감정은 가장 높은 정치의식

한편 나는 죄의식과 자기 검열로 괴로웠다. 더 나쁜 사람도 ‘있을 텐데’, 내가 알게 된 상황 때문에 더 여권 인사를 미워하는 것은 아닐까. 왜 이 정권은 나로 하여금 이러한 고민을 하게 하는가.

스트레스는 감정적 상태인가? 그렇다면, 이성적 자세란 무엇인가. 이성으로 산다는 것은 어떠한 삶인가. 근대성을 상징하는 이성(理性), 합리성의 첫 번째 충격이자 반증은 홀로코스트였다. 물론, 지금은 홀로코스트를 광기라고 생각하는 이는 없다. 광기야말로 가장 조직화된 이성의 특징이다. 흔히 생각하듯, 물리적 폭력이나 권력은 감정적이지 않다. 누군가의 이성 자체가 폭력인 것이다.

이성은 인간의 본질이 아니라 역사적 산물이다. 자유주의와 이성 개념은 17~18세기 유럽에서 기존의 절대왕정과 귀족의 전통적 특권에 맞서 싸운 무기였다. 여기에 자연과학의 발달은 이성과 객관 개념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이성, 계몽주의(en/lightenment, 啓蒙主義)는 말 그대로 무지와 미신, 몽매로부터 해방의 불을 밝혔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이성의 화신’, 칸트의 선험(先驗)이나 초월성 개념은 일상과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중산층 백인 남성의 위치성에서 나온 것이다. 예를 들어 그가 주장한 정상성 이데올로기의 대표적 개념인 생애 주기는 평균 연령 70살을 근거로 삼은 것인데, 당시 인도의 평균 연령은 40살이었다.

모든 언어의 구성 과정이 그렇듯, 이성의 의미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이를 확실하게 해줄 보충 개념이 동원되어야 했다. 대표적인 대립항이 감정이다. 감정(e/motion). 라틴어 어원에서 ‘e’는 이동, 초과, 자극하다, 벗어나다라는 의미가 있다. 즉 감정은 자기로부터 떠나는 나아감(moving out of oneself), 계속적인 여행 상태를 말한다. 이를테면, 흔히 말하는 일관성 없음, 불규칙성인데 이러한 성격이야말로 실제 인간의 삶이 아닐까. 이성은 정(正)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할까. 정적(停的)인 기준에다 위계적이다. 반면, 감정은 움직이고 세상과 대화한다.

감정은 물질로서 손에 잡히는 구체다. 이미지, 정서, 마음 씀 등은 노동이고 자본이다. 감정 노동이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사용하는가. 감정은 상품이고 자본이고 노동이다. 포용과 공감 능력과 같은 리더십을 ‘감정 자본’이라고 한다. 감정이 ‘맞고’ 이성은 ‘틀리다’는 얘기가 아니라 이성은 실현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계급의식’, ‘지역감정’처럼, 감정이 정치의식으로 다루어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의 몸이 부위마다 다른 역할을 한다는 사고 때문이다. 이성은 뇌에서, 감정은 가슴(heart)에서 나온다는 오해가 만연해 있다. 이성과 감정의 이분법은 아래의 사례와 함께 서구 문명을 구성해왔다. 단단한/부드러운, 합리적인/비합리적인, 강함/약함, 터프함/부드러움, 자연/문화, 지배/종속, 과학/예술, 능동적/수동적, 내부/외부, 경쟁/협력, 객관적/주관적, 공/사, 추상적/구체적, 독립/의존, 가해자/피해자, 주체/타자(self/other), 질서/무질서, 전쟁/평화, 신중/충동, 이성/열정, 지성/감성, 깊이/표면, 실재/현상, 초월성/내재성, 시간성/공간성, 형상/질료, 긍정적/부정적, 심리학/생리학….

그러나 복잡한 지각 주체인 인간의 몸에 두 가지가 반반씩 거처할 수도 없으며, 특정 인간 그룹이 한쪽만 독점, 대표할 수도 없다. 감정은 사회적 산물이다. ‘시대정신’이 아니라 ‘시대 정동(情動)’이 사회를 구성한다. 감정은 개인의 몸이 사회와 상호 작용하여 반응하는 체현(體現), 신체화(身體化) 증상이다. 즉 감정은 가장 정확한 사회성이자 인식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감정적으로 산다. 감정, 즉 생각이 세상과 만나는 지점에 따라 그 내용이 다를 뿐이다. 이성적으로 대응하는 사람은 없다. ‘흥분을 자제’해서가 아니라 이성은 없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몸들이 만나는 사회는 감정의 격돌장이며, 감정은 정치의 최종 심급이 된다. 정치인의 ‘감성’은 시장을 돌아다니며 어묵을 먹는 행위가 아니다. 타인을 존중하려면?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한데, 쉽지 않다. 선거 패배 후 90도 인사를 하는 대신 자신을 아는 것이 먼저다.

참고로, 박명랑 감독의 <분노의 윤리학>(2013)은 희로애락 중에서 분노를 가장 “대빵으로 친다”(영화 중 대사).

정희진

여성학 연구자·문학박사. 글쓰기와 책읽기를 좋아한다. ‘논문, 비평, 수필, 편지, 칼럼’ 등 글의 장르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학 연구자로서 공부의 목적은, 기존의 논쟁 구도와 전선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여성주의와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재해석하는 데 관심이 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tobrazi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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