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강국 한국, 자동차 반도체는 98%가 수입품
차량용 반도체 공급 부족이 전 세계 자동차 업계를 강타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의 차량용 반도체 자급률이 2%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 5위 완성차 강국이지만 차량용 반도체 거의 전부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부품 한 두 종만 해외 조달에 문제가 생기면 공장을 세워야하는 처지다. 실제로 현대차는 대만산 차량용 반도체 부품 공급이 차질을 빚자 지난 7일부터 울산1공장이 휴업에 들어갔고 12일 아산공장까지 멈췄다.
한국자동차연구원은 12일 차량용 반도체 보고서에서 “한국의 자동차와 반도체 산업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차량용 반도체는 98%를 해외에 의존한다”며 “특히 전자장치 제어용 반도체인 MCU(마이크로 컨트롤 유닛) 같은 핵심 부품은 국내 공급망이 아예 없다”고 밝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차량 1대에 40개가량 들어가는 MCU는 세계 생산량 70%를 대만의 파운드리(위탁생산) 업체 TSMC가 생산한다. TSMC가 멈추면 전세계 자동차 공장도 올스톱 해야 하는 치명적인 구조다. 보고서는 “TSMC에 주문이 폭주하면서 발주에서 납품까지 12~16주면 됐던 MCU 조달기간이 26~38주로 늘어났다”고 했다.
반도체 전문가들과 업계에선 “정부가 나서 강력한 차량 반도체 자립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한국은 차량용 반도체 대란이 불거진 지 넉 달여 만인 지난 9일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반도체산업협회 회장단과 첫 간담회를 가진 게 전부다. 반면 미국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 12일 삼성전자·인텔·TSMC·GM·포드를 포함한 글로벌 반도체, 자동차 기업을 불러 반도체 대책회의를 열었다.
정우성 포스텍 산업경영공학과 교수는 “각국은 안보 차원에서 자동차 반도체 내재화(독자개발·생산)에 나서고 있다”며 “반도체는 진입 장벽이 높고 수익을 내는 데 긴 시간이 걸리는 만큼 파격적인 세제 혜택을 포함한 획기적 지원책 없이는 안정적인 공급망 확보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1달러짜리 칩 동나자… 현대차는 공장 스톱, 한국GM은 감산
그랜저·쏘나타를 생산하는 현대차 아산공장 직원 1500여 명은 12일 출근하지 않고 친환경차 동향 온라인 재택교육을 받았다. 차량 전기장치 부품 전반을 제어·관리하는 부품 재고가 떨어져 공장이 휴업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반도체 회사 NXP가 납품하는 이 부품엔 대만 TSMC가 만든 차량용 반도체 칩(MCU·마이크로 컨트롤 유닛)이 들어간다. 그런데 TSMC가 이 부품을 대지 못하면서 여파가 현대차까지 덮친 것이다. MCU는 전원을 켜고 끄거나 경고음을 내는 구형 반도체로 평균 가격은 1달러다. 1달러짜리 부품이 없어 연간 생산액 7조8000억원의 자동차 생산라인이 통째로 멈추는 초유의 상황이 빚어진 것이다. 현대차 울산 1공장도 지난 7일 MCU 부족으로 멈췄다. 이 공장은 사전 예약만 4만대에 이르며 국내 자동차 업계 사상 최대 예약 판매 기록을 세운 전기차 아이오닉5를 생산한다. 하지만 ‘미국 테슬라를 잡겠다’는 현대차의 야심 찬 계획은 반도체 부족에 시작부터 발목이 잡혔다.
국내 자동차 업계는 지난 2월 한국GM이 반도체 부족으로 부평 2공장 감산에 들어갈 때만 해도 글로벌 기업인 GM의 특수 상황으로 여겼다. 하지만 현대차 공장까지 잇따라 멈춰서자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차량용 반도체 공급난은 올해 내내 계속될 전망이어서 엄청난 매출 손실이 우려된다”고 했다.
◇신뢰성·경험 중요해 진입 장벽 높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포진한 한국은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시장 57%를 장악한 반도체 강국이다. 하지만 차량용 반도체 시장에선 명함을 내밀지 못한다. 글로벌 차량용 반도체 매출 상위 100개 기업 중 한국 기업은 삼성전자를 포함해 8개에 불과하다. 미국(31개), 일본(23개)뿐만 아니라 중국(9개)에도 밀린다. 삼성전자조차 글로벌 순위 26위로 사실상 존재감이 없다. 메모리 반도체보다 수익성이 낮고, 자동차 경기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이유에서 차량용 반도체를 철저히 외면한 결과다.
반도체 전문가들은 한국이 당장 차량용 반도체 시장을 공략한다고 해도 결실을 보려면 최소 5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본다. 차량용 반도체는 메모리 반도체와 달리 미세 공정이나 첨단 장비의 우수성보다는 신뢰성과 경험이 중요한 시장이기 때문이다. 메모리 반도체가 회로 선폭 10nm(1nm=10억분의 1m) 미만에서 치열한 공정 경쟁을 벌이고 있는 반면, 차량용 반도체는 30nm 이상 구식 공정이 대부분이다. 이지형 자동차연구원 연구원은 “차량용 반도체는 수명이 15년 이상이어야 하고 영하 40도부터 영상 155도의 극한 조건에서 견뎌야 한다”면서 “자동차 판매량에 따라 재고를 30년 이상 보유해야 하는 등 조건이 까다롭다”고 말했다. 이로 인해 네덜란드 NXP, 독일 인피니언, 스위스 ST마이크로, 일본 르네사스 등 오랜 경험을 가진 일부 업체에 편중돼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현재 한국에는 차량용 반도체에 최적화된 구형 팹(설비)이 거의 없다”면서 “라인과 기기를 설치하고 개발, 테스트, 양산을 거치는 데 최소 5년에서 10년은 필요할 것으로 본다”고 했다.
◇자율주행차는 대당 반도체 2000개
전문가들은 당장의 공급 부족 해소 문제보다는 전기차, 자율주행차 상용화를 앞둔 앞으로가 더 걱정이라고 지적한다. 현재의 내연 기관 차량 한 대에는 반도체가 300개 정도 들어가지만, 대중화되고 있는 전기차에는 600~900개의 반도체가 필요하다. 엔진이 전기 모터로 대체되면서 반도체가 차량 구동 전반을 좌우하는 데다, 인포테인먼트 등 각종 편의 사양도 강화되는 추세이다. 여기에 글로벌 자동차·IT 회사들이 앞다퉈 개발하고 있는 자율주행차에는 최소 2000개 이상의 반도체가 들어가고, 현재 제각각 작동하는 반도체를 중앙집중화한 ‘통합 시스템칩’이나 ‘초저지연 통신칩’ 같은 고사양 반도체 수요도 늘어날 전망이다. 차량용 반도체가 메모리에 버금가는 미래 먹거리가 될 수 있지만 우리 기업들은 공급 부족을 우려하며 손놓고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조대곤 KAIST 경영대학 교수는 “반도체는 기술 주도권을 쥔 업체가 시장을 독식하고, 다시 공격적으로 투자해 지배력을 강화하는 특징이 있다”면서 “한국이 강점을 갖고 있는 초미세 공정을 활용해 전기차, 자율주행차용 고사양 반도체 시장에 선제적으로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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