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완의 사이언스카페] 로마 황제 망토의 자주색, 소라에서 나왔다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2021. 4. 13.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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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망토 자주색은 레바논 소라, 英 궁녀 옷 붉은색은 美 연지벌레
‘붉은색 對 파란색’ 오랜 싸움, 현대엔 안전·무해 색소 연구 경쟁으로
KAIST는 미생물서 붉은색, 美 제과사는 양배추서 파란 색소 만들어

영화 ‘글래디에이터’는 도입부에 나오는 로마군과 게르만족의 전투 장면이 압권이다. 자세히 보면 주인공 막시무스 장군(러셀 크로)이 이끄는 로마군은 은색 갑옷 아래 붉은색 옷을 입고 있고 군기(軍旗)도 붉은색이다. 반면 숲을 등진 게르만족은 얼굴에 파란색 칠을 하고 있다. 청회색 가루를 발라 상대에게 유령 같은 존재로 각인시켰다.

붉은색과 파란색의 대결은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도 나온다. 스코틀랜드를 지배한 영국군은 붉은 옷을 입었고 윌리엄 월레스(멜 깁슨)가 이끄는 현지 반군은 얼굴에 파란 칠을 했다. 유럽의 고대 켈트 민족의 전통으로 유럽 쪽인 대청을 오줌에 개어서 얼굴에 발랐다.

/일러스트=이철원

역사에 뒤엉켰던 붉은색과 파란색의 전쟁이 현대 과학에서도 일어났다. 이번에는 문명과 야만의 차별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안전하게 사용하고 지구에도 해가 없는 식용 색소(色素)를 찾는 연구 경쟁이다.

로마 시대 붉은색은 권위의 상징이었다. 황제가 입는 자주색 망토인 자포(紫袍)는 페니키아인들이 오늘날 레바논인 티레 지방의 소라고둥으로 염색을 했다. 20세기 초 독일의 화학자가 이 염색법을 재현했는데 소라고둥 1만2000개에서 염료 1.4g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귀하니 황제만 입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영국 엘리자베스 1세는 왕실의 시종과 궁녀에게 아메리카 대륙에서 나온 염료로 염색한 붉은 옷을 입도록 했다. 바로 선인장에 사는 연지벌레 암컷에서 추출한 카르민산 성분의 염료다. 카르민산은 오늘날에도 식용 색소로 딸기 우유, 사탕 같은 식품에 널리 활용된다.

하지만 연지벌레는 특정 지역에서만 키울 수 있고 색소 추출 과정이 복잡하다. 특히 벌레에서 나온 물질을 꺼리는 사람들이 많아 대체 색소를 쓰는 회사들도 있다. 이상엽 한국과학기술원(KAIST) 특훈교수는 지난 2일 국제 학술지 ‘미국화학회지’에 “연지벌레 대신 미생물에게 포도당을 주고 카르민산을 생산하도록 하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이 교수는 마치 최고 효율의 반도체를 설계하듯 각종 화학물질 생산에 적합하도록 미생물의 유전자를 최적화하는 이른바 ‘시스템 대사공학’을 창시했다. 그는 이번에 카르민산 합성에 관여하는 효소들을 찾아 대장균에서 가장 잘 작동하는 형태로 만들었다. 지금까지 곰팡이를 제외한 다른 미생물에서 카르민산이 나온다는 보고는 없었다.

파란색은 자연에서 붉은색보다 찾기 어렵다. 공작 깃털이나 나비 날개의 파란색은 색소가 아니라 결정 구조에서 나온다. 현재 식용 파란색 색소는 대부분 석유화학 제품이다. 이 색소들은 인체에는 해가 없지만 환경에는 좋지 않다.

소비자들은 사람은 물론 지구에도 해가 없는 천연 색소를 요구했다. 세계 최대의 미국 제과업체인 마스 리글리는 5년 전 2021년까지 합성 색소 사용을 완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마스 리글리는 엠앤엠즈, 스키틀즈 같은 초콜릿 과자로 유명한 마스가 쥬시후르츠, 스피어민트 껌으로 잘 알려진 리글리를 합병한 회사다.

마스 리글리 연구소의 레베카 로빈스 박사는 UC데이비스, 일본 나고야대와 공동으로 지난 7일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스’에 적양배추의 안토시아닌 성분으로 파란색을 내는 식용 색소를 개발했다고 밝혔다.

안토시아닌은 어린이 과학실험으로 잘 알려진 색소이다. 적양배추를 끓이면 물이 자주색으로 변한다. 여기에 식초를 넣어 산성이 되면 붉은색이 되고, 베이킹 소다를 넣으면 염기성을 띠면서 파란색이 된다.

연구진은 적양배추에서 파란색을 잘 내는 안토시아닌인 P2를 찾았다. 하지만 P2는 안토시아닌에서 불과 5%에 그쳤다. 연구진은 이상엽 교수처럼 미생물의 도움을 받았다. 미생물 효소를 이용해 전체 안토시아닌의 절반까지 P2로 바꾼 것이다. 이 색소는 아이스크림과 도넛, 콩과자를 파랗게 물들였으며 30일 이상 색이 유지됐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 장군을 총애했던 철인(哲人)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자포는 조개의 피에 담갔던 양털에 불과하다”는 글을 남겼다. 사물의 본질을 알면 욕망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 과학은 색소의 본질을 찾아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색을 찾았다. 현자의 철학이 과학에서 결실을 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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