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귀은의멜랑콜리아] 농담·로맨스가 필요한 때

남상훈 2021. 4. 13.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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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유행, 이 또한 우리의 삶
나 아닌 타인 위해 '하지 않음' 실천
농담과 로맨스, 작은 연대 만들어
사람들이 현실 버티는 힘 되어줘

A: 부부 교사들은 방학이 되면 서로를 죽이고 싶어 한대요.
B: 하루 종일 같이 붙어 있어야 하니까.
C: 그런데, 굳이?
C: 굳이 죽이는 수고를 왜 해? 그냥 상대가 알아서 멀리멀리 사라져 주는 게 낫지 않나?

농담의 시간이다. 우리에겐 이런 농담이 필요했다. 농담은 이제 장르를 바꾼다.
한귀은 경상대 교수·국어교육학
A: 저도 남편도 둘 다 육아휴직 중이거든요. 하루 종일 같이 있어요.
A: 좋아요. 남편이 설거지하는 뒷모습을 거실에 누워서 바라볼 수도 있고.

우리는 서정적이고 섹시한 장면을 떠올린다. 이런 로맨스도 필요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직장인 대학원생 A에겐 어린아이가 둘이다. A와 그녀의 남편이 무급 휴직 중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녀의 농담과 로맨스는 더 애틋하다.

흔히 ‘이 또한 지나가리라’에서 희망을 찾는다. 코로나는 지나갈 것이고 우리는 일상을 회복할 것이라는 희망. 그러나 이 희망에는 진실이 빠져 있다. 이 시기 또한 그냥 지나가기만 해서는 안 되는 ‘삶’이라는 점이다. 지금 이 시기는 나중을 위한 모라토리엄이 아니다. 삶에서 그 어떤 시간도 유예의 영역일 수는 없다. 그 어떤 시기에도 가중치를 두거나 감산치를 매길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삶은 모든 순간, 모두 소중하다. 그리하여 희망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에 있지 않고, ‘이 또한 삶이다’에 있다.

농담과 로맨스는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함이 아니다.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기 위함이다. 농담과 로맨스는 작은 연대를 만든다. A와 B와 C는 나이 불문, 우정의 관계를 맺게 된다. 코로나는 작은 것들을 귀환시켰다. 작은 결혼, 작은 모임, 작은 세미나, 산책 같은 여행, 여행 같은 산책. 작은 것들 속에서는 권력관계가 사라진다. 작은 모임을 하는데, 회사의 상사를 부를 리 없다. 회사의 상사가 혹여 끼였다면, 그는 끼일 만한 사람이었을 테고, 작은 모임에서는 어느새 수평관계가 되어 버린다. 이 수평관계 속에서 농담과 로맨스가 발명된다. 고통의 현실이기에 농담과 로맨스는 더욱 절실하다.

팬데믹으로 인해 인류가 공통의 경험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인류 공통의 경험이라는 표현은 마치 고통의 공유라는 말처럼 들린다.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으니 인류가 연대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는 식의 담론이 나오기도 한다. 정말 그럴까.

자극은 같아도 경험은 다르다. 빈부나 계층에 따라, 가치관과 신념에 따라, 직업과 직종에 따라, 어떤 관계 속에 있느냐에 따라, 기타 무수한 변인에 의해 우리는 각자 서로 다른 경험을 하고 있다. 그 때문에 인류는 평등이 아니라 더 큰 양극화로 치닫고 있으며, 고통은 특정인과 특정 집단, 특정 국가가 더 심각하게 겪고 있다. 동일한 집단무의식이 생성되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70억분의 1의 고통을 겪는 것도, 70억분의 1의 책임을 나눠 갖는 것도 아니다. ‘1/n’이라는 관념은 책임을 져야 할 누군가에게 면죄부를 준다. 코로나는 인류 전체의 죄가 아니다. 제 키 반만 한 가방을 메고 졸랑졸랑 걸어가는 아이를 그 1/n에 포함할 수 있겠는가.

1/n인 것은 투표밖에 없다. 이번 재보궐 선거에서는 1/n의 의미가 각별했다. 한 표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과거와 현재를 평가할 수는 있다. 투표를 하지 않는 이유는 그걸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냉소 때문이다. 그러나 더 길게 보면, 이 투표로 정권을 심판할 수 있고, 심판의 결과는 위정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으며, 이것이 학습되면 정권과 위정자는 국민을 더 의식하게 된다. 투표를 하지 않으면 세상이 안 바뀌는 것이 아니라 더 나빠진다. 투표는 그 자체로 희망이 되지는 않더라도, 희망을 기대할 수 있는 터는 만들 수 있게 한다.

4·7 선거는 끝났다. 이제 다시 ‘하지 않음’으로 삶을 채워가야 하는 시기이다. 하지 않음을 하는 것, 이 또한 삶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지금 외출을 하지 않는다기보다는, 외출을 하지 않는 것을 하고 있는 중이다. 자기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타인을 위함이다. 자신이 바이러스의 숙주가 되지 않기 위해서 매일 매번 삼가는 것이다. 농담과 로맨틱한 대화는 ‘하지 않음’을 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어 준다.

또 하나, 내가 ‘하지 않음’을 실천하는 것이 있다. 대학원생에게 과제를 내지 않는 것. A와 B를 비롯해 내 수업을 듣는 대학원생들은 학업에서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놀라운 경험을 하고 있다. 과제가 없을 때 얼마나 학업과 토론에 몰입할 수 있는지를 생전 처음 느껴보고 있을 것이다. 이런 경험을 제공한 선생으로서 다소 뿌듯한 감이 없지 않다. 아니, 이때의 나는 ‘선생’을 내려놓는다. 교학의 수직관계가 아니라 도반의 수평관계, 역시 1/n의 경험이다. 물론, 다음 학기까지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무과제의 경험은 일생에 단 한 번만 해야지 의미가 있다.

한귀은 경상대 교수·국어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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