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산의마음을여는시] 쓴다

남상훈 2021. 4. 13.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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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숙
먼지 위에 쓴다
손가락을 담근 물의 속살에 쓴다
진흙 위에 쓴다 성에 위에 쓴다
번쩍이는 청동거울 한가운데 쓴다
모래 폭풍에 휩쓸려가는 글자들
버스를 타고 소풍 갈 때
앞에 앉은 아이가 창밖으로 놓친 모자를
뒷자리의 아이가 잡아챘던 것처럼
클릭, 하지 않으면
꼬리를 보이며 사라지는 글자들
그래서 누군가는 지금도
꽁꽁 접은 종이쪽을 박아넣고 있다
웅얼웅얼 돌아서서 기도하는
오래된 돌벽 틈새로
시인은 먼지 위, 물의 속살,

진흙 위, 성에 위,

번쩍이는 청동거울 한가운데에도 글을 씁니다.

모두 사라질 글자들이지요.

시인은 꼬리를 보이며 사라지는 글자들을 찾아 나섭니다.

모래폭풍이 불더라도

비행기가 낙하 직전의 순간이더라도

홍수가 나서 물에 잠겨 목숨이 촌각을 다투더라도

시인들은 글자를 놓치지 않고 끈질기게 잡고 버티지만,

목숨을 걸면서 잡아챈 글자를 아무도 읽어주지 않습니다.

시인은 시를 꽁꽁 접어 오래된 돌벽 틈새로 박아 넣습니다.

언젠가 그 시가 발굴되어 눈 밝은 독자들에게 읽히기를 기도하면서,

박미산 시인, 그림=림지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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