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정교회 聖地이자 강제노동수용소.. '순례'의미 되새김의 공간

2021. 4. 1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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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0년대 시작된 솔로베츠키 수도원
종교·문화·군사의 중심지로 성장
총대주교 개혁에 반대 무장투쟁도
볼셰비키혁명후 수용소군도로 전환
강제노동·구타·학살로 악명 높기도
수도원 재건후 세계문화유산 등재
인고의 세월 묻어나는 순례의 장소
이은경 한국외대 국제지역연구센터 HK+국가전략사업단

통일한반도를 향한 한 걸음…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③ 유라시아 역사문화 탐방 - 솔로베츠키 제도(3)

러시아인은 '고통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러시아 정교회에서 자주 등장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고통 속에서 자신을 낮추는 예수의 이미지이다. 러시아인은 자기 수양의 한 방법으로 저명한 수도사가 살고 있는 수도원 또는 아주 멀리에 위치한 수도원을 찾아가는 순례의 전통이 있다. 순례는 자기 수양을 위한 아주 검소한 형태의 여행이었다.

톨스토이의 단편 '두 노인'(1885)은 성지순례를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들은 중도에 서로 다른 선택을 하게 되고, 결국 진정한 의미의 신앙은 율법의 규율이 아닌 사랑과 선행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말년에 톨스토이는 모든 재산과 권리를 포기하고 민중 속으로 들어가고자 했지만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가출을 단행했다. 이것은 일종의 속죄의 순례였다.

공동기획 한국외국어대학교 HK+ 국가전략사업단 디지털타임스

오늘날 러시아인이 가장 선호하는 순례의 장소는 모스크바 남부 툴라 주에 있는 톨스토이의 영지 야스나야 폴랴나와 그곳에 있는 그의 묘지이다. 작품을 통해 영적 순례의 길을 안내한 톨스토이에 대한 경외와 그의 가르침을 본받으려는 마음이 사람들의 발길을 그곳으로 이끌고 있다.

도스토옙스키도 순례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세 살 난 아들 알료샤가 간질로 죽자 도스토옙스키는 철학자 블라디비르 솔로비요프와 함께 모스크바 서남부 칼루가 주 코젤스크 근처에 있는 옵티나 푸스틴 수도원을 방문한다.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 중 한 곳인 이곳에서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 전역에 성덕으로 알려진 암브로시 장로를 만나 깊은 감동과 위안을 받는다. 이로부터 1년 뒤 아들을 잃은 고통과 수도원에서의 회복이 자양분이 되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880)이 발표되었다.

옵티나 푸스틴 수도원은 소설의 배경이 되었으며, 죽은 아들 알료샤는 수도원에서 생활하는 셋째 아들 알료샤로 환생했고, 암브로시 장로는 도스토옙스키의 사상을 대변하는 조시마 장로로 탄생했다.

유서 깊은 수도원을 방문하는 것은 신의 위로와 회복을 기대하는 러시아인의 오랜 믿음에서 기인한다. 수도원에 대한 러시아인의 유별난 사랑은 동방 정교의 '성산(聖山)'이라고 불리는 아토스 산을 두고 벌인 주권 분쟁과 대대적인 지원에서도 잘 드러난다. 아토스 산을 방문하는 러시아 정교신자가 매년 1만명에 이를 정도라고 하니 순례에 대한 이들의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한다.

수도원을 향한 순례의 길은 저 멀리 북극으로까지 이어진다. 러시아 서북단 솔로베츠키 수도원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거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이곳은 세상과 떨어져 은둔하기 좋은 환경에 숲과 호수로 둘러싸인 천혜의 풍광까지 더해져 숨 막힐 듯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솔로베츠키 수도원은 러시아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잔혹한 역사를 가진 수도원이다. 이곳은 러시아 정교의 찬란했던 역사와 문화를 마주할 수 있는 곳이자 암울하고 어두웠던 소련 현실의 증언이다. 유서 깊은 정교회 성지이면서 동시에 강제노동수용소로 악명을 떨친 유형지였던 이곳은 순례 여행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만드는 공간이다.

수도원이 위치한 솔로베츠키 제도는 러시아 북부의 항구도시 아르한겔스크에서 290㎞ 떨어진 백해 서쪽 지역에 6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은 기원전 5000년 중반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역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곳이다. 중석기시대의 미로와 돌무덤, 종교적 제례와 장례 유적 등의 여러 고고학적 흔적은 고대인의 생활을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해안선에 있는 식물과 변종의 변화로 기후 변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솔로베츠키 수도원은 1430년대에 키릴로 벨로제르스크와 발람 수도원에서 온 세 명의 수도사가 나무로 지은 작은 예배당으로 시작했다. 이후 많은 수의 수도사들이 이곳에 와서 자리를 잡고 수도 생활에 힘썼다. 16세기 중엽에는 수도원장 필리프 콜리체프가 경제개혁을 주도하여 도로가 나고 낙농장과 관개시설이 만들어졌으며, 벽돌 제조와 도예 같은 새로운 산업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또한 정교와 관련된 기념비들을 세우도록 독려하여 성지(聖地)화하는 작업이 이뤄졌다.

1582년과 1594년 사이에 석조 요새가 건설되면서 솔로베츠키 제도는 그 지역의 경제, 종교, 군사 그리고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사람이 살기 힘든 환경에도 불구하고 솔로베츠키 수도원은 종교 공동체가 잘 정착된 곳이었다. 성상 그리기, 나무 조각공예, 판화, 석판인쇄 등의 공예 예술이 발달했고, 수도원에는 제염소와 대장간, 제분소가 딸려 있었다. 기도와 수행을 하는 수도사들은 학문연구에 힘쓰며, 제염, 철공, 도공, 어업, 목축, 도로와 수로 건설 등 다양한 일을 했다. 이들은 물고기를 잡고 기르기도 했으며 동물을 사냥하고 채소를 재배했다. 그리하여 솔로베츠키 제도의 주요 섬들뿐만 아니라 본토까지 영향력을 넓히면서 16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러시아 정교회의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하기에 이른다. 이리나르흐 수도원장(1613-1626) 시절에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솔로베츠키 수도원은 니콘 총대주교가 주도한 교회 전례(典禮) 개혁에 반대한 구교도(분리파 교도)의 근거지였다. 1668년에서 1676년에 이르는 동안 이곳의 수도사들은 니콘의 개혁에 반대하는 강력한 무장 투쟁을 벌였다. 1667년 러시아 정부는 솔로베츠키 수도원의 영지와 재산을 몰수하는 조치를 취하고 1년 뒤에는 차르의 군대가 수도원을 포위하며 압박했다. 다양한 무장 투쟁을 벌이던 솔로베츠키 수도원은 결국 정부군에 패하고 만다. 1714년 드비나 강 북쪽 입구에 요새가 건설되면서 수도원은 군사적 기능을 상실하였으나, 요새는 감옥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솔로베츠키 수도원은 스웨덴 등 북유럽에서 내려오는 가톨릭 세력을 방어하는 러시아 정교의 군사적 전초기지이기도 했다. 흑해에서 러시아군이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에게 대패하고 있던 크림 전쟁(1853-1856) 동안에도 수도원은 외적을 막아내는 군사 요새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1854년 7월 5일에는 무려 9시간에 걸쳐 1,800발의 포탄과 폭격 등 영국군함의 집중 포격을 받았다. 그러나 교회 외벽과 돔이 일부 손상을 입은 것 외에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나지 않았을 만큼 러시아의 자존심을 지킨 곳이었다.

솔로베츠키 수도원은 무역의 거점이 되어 여러 도시와 교역을 증대했다. 1822년 대수도원장이던 마카리가 마카리예프 푸스틴이라는 이름의 작은 수도원을 세웠고, 이곳이 후에 식물원으로 바뀌어 이곳 온실에서 재배한 채소와 과일이 여러 도시에 공급됐다. 솔로베츠키 수도원은 북위 65도 극한의 환경에서도 수도사들의 불굴의 의지와 끈기로 자리를 잡은 성공적인 사례였다. 그러나 볼셰비키 혁명이 몰아친 이후 솔로베츠키 제도는 소름끼치는 수용소군도로 바뀌게 된다,

러시아에서 수도원이 감금의 장소로 활용된 역사는 16세기 이반 4세 치세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요새화한 수도원은 한번 들어오면 빠져나갈 수 없는 감옥으로 적합했고, 수도사들이 기거하던 작은 방은 정치범을 수감하기에 제격이었다. 황실의 가족을 유폐시켰던 과거의 경험을 거울삼아 볼셰비키 정부는 20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인민의 적', '반혁명 분자'로 몰아 전국의 수용소로 보냈다.

1923년 솔로베츠키 제도(솔롭키)에 '특별지정 북부수용소', 약어로 슬론(SLON, the Solovetsky Lager Osobogo Naznachenia)이 문을 열었다. 최초의 강제노동수용소 '굴라크(Gulag)'였다. 슬론이 러시아어로 코끼리를 뜻하다보니 이곳으로 끌려가는 죄수들 사이에서는 코끼리를 보러간다는 은어가 생겨났다. 솔롭키에 수감된 죄수는 1927년 1만 명에서 1932년 10만 여명으로 급격히 불어났다. 공업화 추진에 혈안이 되어 있던 스탈린은 굴라크의 노동력을 적극 활용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 스탈린 정권이 자랑하는 거대 토목 프로젝트가 야쿠츠크에서 시작해 오호츠크해에서 마가단에 이르는 콜리마 대로와 더불어, 발틱해, 라도가 호수, 오네가 호수, 백해를 잇는 운하였다.

1931년 솔롭키의 죄수들은 백해와 발트해를 연결하는 227km의 운하건설 사업에 투입되었다. 소련 제1차 5개년계획 핵심 사업으로 선정된 이 프로젝트에 솔롭키를 비롯하여 각지에서 죄수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은 도끼와 톱, 망치만으로 불과 2년 만에 운하를 건설했다. 열악한 환경 속에 첫해 겨울에만 2만5000명에 이르는 재소자들이 죽었을 정도로 그 대가는 참담했다.

솔롭키를 탈출한 죄수들의 증언으로 수용소 죄수에 대한 구타와 학살이 만천하에 알려졌다. 서방세계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자, 스탈린은 막심 고리키에게 이곳을 방문하라고 권유했다. 고리키는 1929년 7월 20일에 솔롭키에 도착해서 바로 그 다음 날 떠난다. 고리키의 방문은 솔롭키를 관리하고 있던 통합국가정치국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1929년 고리키는 '우리의 달성'이라는 잡지에 '소연방 기행' 시리즈의 일환으로 '솔롭키'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그는 수용소가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죄수들을 효과적으로 교화시키고 있다고 묘사했다. 소비에트 당국의 공식적 그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묘사는 고리키가 스탈린 정책의 지지자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증거였다.

솔롭키의 비인간적 실상은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솔롭키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제3부의 '박멸-노동수용소'라는 제목으로 이곳의 실상을 알린다. 솔롭키의 밝은 분위기 속에서 죄악조차 존재하지 않을 것 같고, 이러한 자연에서도 죄악도 살아남을 것 같지 않다는 작가 프리시빈 말로 시작하면서 솔제니친은 이곳이 잔혹해지고 종양을 전이시키는 주체가 되어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그려내었다.

솔롭키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해군 훈련소로 전환되었다가 1974년 국립역사·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1990년 구소련 사회의 급격한 해체 흐름 속에서 수도사들은 섬으로 돌아오고 수도원이 재건되기 시작했다. 1992년 솔로베츠키 수도원을 포함한 솔로베츠키 제도의 역사 문화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솔롭키는 어떤 주체가 관리하고 목표가 어떻게 달라지느냐에 따라 동일한 조건 하에서도 용도가 변경되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이다. 수도사들의 노력으로 일궈낸 아름답고 신비한 경관의 솔롭키가 권력에 의해 추악한 지옥이 될 수 있었다는 건 인간 안에 내재된 악성(惡性)에 대한 경계와 반성이 필요함을 일깨운다.

역사의 어두움을 뚫고 새롭게 일어선 솔로베츠키 수도원을 통해 오랜 인고의 세월이 헛되지 않음을 배워야 할 것이다. 종교공동체, 방어 요새, 상업 교역지, 해군기지, 수용소 등 다양한 역할을 했던 수도원은 러시아 역사의 중요한 순간을 모두 품고 있다. 그곳을 향하는 순례자들은 극심한 고통 속에 처했던 수용소 죄수들의 흔적을 따라가며 순례의 의미를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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