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부동산 반성문' 누구한테 쓴다는 건가 / 김회승
[편집국에서]
김회승 ㅣ 경제에디터
지난 30여년간 부동산 경기는 계단식 상승 추세를 보였다. 대략 10여년의 침체·안정기와 5년의 상승·과열기를 거쳤다. 경기 부침에 따라 정책도 춤을 췄다. 과열 땐 투기 억제와 공급 대책이, 침체일 땐 규제 완화와 부양책이 반복됐다. 가장 화끈한 부동산 대책은 노태우 정부 때다. 위헌 논란을 무릅쓰고 토지공개념을 도입하고 무려 200만호 1기 신도시를 건설했다. 놀고 있는 민간 땅을 강제로 팔게 하는,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일도 폈다.
김대중 정부 때까지 집값은 비교적 안정됐다. 외환위기를 맞은 김대중 정부는 강한 부양책을 폈고, 노무현 정부 들어 집값이 들썩였다. 담보인정비율(LTV) 같은 생소한 대출규제를 만들고 종부세를 도입했다. 판교·동탄 등에 2기 신도시 건설 계획도 내놨다. 부동산 시장이 금융위기와 맞물리며 냉각기에 접어들자 다시 부양 기조로 선회했다. 이명박 정부는 종부세를 무력화하고 뉴타운·4대강 등 건설 경기에 힘을 쏟았다. 박근혜 정부는 ‘빚내서 집 사라’고 했지만, 집값은 잠잠했다.
정권 성향에 따라 부동산 시장을 자극하거나 냉각시킨다는 건 결과론적 해석이다. 부동산 시장은 정책 변수보다는 수급과 유동성, 구매력 등이 더 중요하고 선행하는 변수다. 정부는 과열되면 안정책을, 부진하면 부양책으로 대응할 뿐이다. 보수든 진보든, 집값이 치솟는데 팔짱 끼고 있을 집권세력은 없다. 침체기 대응도 마찬가지다. 부동산 지표를 5년 집권 기간으로 잘라 성적표를 매기는 건 다분히 정치적인 분석법이다. 선제적인 부동산 정책을 편 유능한 정부를 우리는 가져본 적이 없다.
문재인 정부에서의 부동산 과열은 가히 역대급이다. 서울과 수도권 집값은 1년 새 거의 두 배가 됐다. 이쯤 되면 수급 불일치 때문인지 유동성 탓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10년 전 서울 명동의 최고 비싼 땅값이 평당 1억원이었다. 이젠 강남 아파트값이 평당 1억원이다. 다른 물가에 견준 상대가격이 짧은 기간에 과도하게 올랐다는 얘기다.
서울의 무주택자는 절반이 넘는다. 이들에게 미친 집값은 이젠 도달 불가능한 수준이 됐다. 내집 마련은커녕 평생 무주택으로 진로를 바꾸는 것도 힘들어졌다. 집값을 따라 오른 전월세 값을 도저히 당할 재간이 없다. 막대한 대출로 내집 마련 행렬에 올라탄 이들은 어떤가. 상투는 아닐까, 금리는 안 오를까 걱정이 태산이다. 다들 불안하다.
재보궐선거에서 참패한 여당에서 ‘부동산 반성문’이 쏟아진다. 개혁 구호에 매몰돼 민생을 돌보지 못했다는 성찰의 목소리다. 한데 번지수가 영 이상하다. 집값이 많이 올라 세금 부담이 커졌으니 보유세를 손볼 수 있단다. 이참에 공시가격 증가 속도를 조절할 거란 이야기도 나온다.
중요한 건, 누구의 눈높이에서 민심을 성찰하느냐다. 여당이 사죄해야 할 대상은 최대 피해자인 무주택 서민이다. 강남 집 한 채에 연금 소득이 전부라는 노부부가 아니다. 집값이 수억원 오르는 바람에 재산세 부담이 수십만원 늘었다는 이들도, 과도한 대출규제로 내집 마련이 힘들다는 연봉 1억원 맞벌이 부부도 우선순위는 아니다. 못된 짓은 자기 반 아이들한테 하고선, 옆 반 담임한테 반성문을 쓰는 격이다.
이른바 ‘87년 체제’의 가장 큰 변화는 중산층의 탄생이다. 민주주의의 진전과 동전의 양면이다. 경제성장의 낙수가 흐르던 때다. 경제활동의 기둥인 청장년층, 베이비부머들이 초기 자산을 축적했다. 일자리도 많았고, 집도 사고 주식도 샀다. 소득도 오르니 집값이 올라도 그럭저럭 올라탈 수 있었다. 이젠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됐다.
무주택 서민들이 처한 현실은 ‘벼락거지’로 희화화하기엔 너무 절박하다. 강남 집값의 고공 행진을 보는 지방 사람들은 유령과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됐다. 자산 불평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피케티의 실증 분석이 맞다면, 더 늦기 전에 자산 시장에 진입하려는 욕망은 더 커질 수밖에 없을 게다. 욕망을 손가락질할 게 아니라, 그 틈바구니에서 공동체의 삶이 짓밟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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