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삶의 모호한 경계를 넘을 때, 바로 예술..리암 길릭 '워크 라이프 이펙트'

배문규 기자 2021. 4. 12.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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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리암 길릭 ‘워크 라이프 이펙트’ 전시가 열리고 있는 광주시립미술관 로비 전경.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A MOBILE OBJECT-RELATION MAPPING IS NOW PREFERRED. EXPEDITE WEB-ENABLED PARTNERSHIPS. CONSUMPTION PER TUESDAY…”. 미술관 로비의 커다란 유리벽에 검은 글씨들이 붙어 있다. 예술적인 문구를 상상하며 눈으로 더듬어보는데, 이상하다. ‘이동식 개체-관계 맵핑 선호, 웹 기반 파트너쉽의 신속한 구축, 화요일 당 소비량…’. 작품 제목 ‘개체 관계 맵핑’. 영국 출신 유명 설치미술 작가 리암 길릭의 텍스트 작업이다.

광주시립미술관에선 리암 길릭의 아시아 첫 개인전 <워크 라이프 이펙트>가 열리고 있다. 제목에서 암시하듯 전시 주제는 ‘일과 삶 간의 복잡미묘한 긴장과 균형’이다. 유리벽의 텍스트는 우리 삶에서 사용되는 업무 용어들을 패러디한 것이다. 프린터가 오작동해 쏟아낸 듯한 단어들이 언뜻 현대적인 ‘시(詩)’처럼 보이기도 한다. 로비에 설치된 알록달록한 테이블과 스툴 역시 작품이다. 미술관의 부차적 요소라 할 수 있는 벤치를 작품으로 만든 것인데, 관람객들이 실제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S자형 구조로 되어 있어 막상 마주보고 앉을 수는 없다. 미술관 내외부를 연결하는 로비부터 안과 바깥, 일과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 스타일을 넌지시 보여주는 셈이다.

리암 길릭은 현대미술사에서 ‘관계 미학’의 이론적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사회 현상의 분석과 미학적 접근을 바탕으로 인간, 환경, 삶, 예술 사이 관계를 새롭게 규정하는 것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의외로 경쾌하다. 입구에선 카페에서 흔히 볼법한 램프가 위아래로 움직이며 그림자의 파도를 만들어내고, 벽면에는 형형색색 네온사인이 빛을 발한다. 전면에는 환하게 빛나는 쇼윈도처럼 보이는 전시 공간이 있다. 유리로 막혀있나 싶어 주춤하는데 작가가 성큼 넘어간다. 지난 1일 기자간담회에서 리암 길릭은 “거리를 걷다보면 만나는 가게나 건물의 외관을 전시 공간으로 옮겼다”며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쇼윈도를 넘을 수 있고, 넘어오는 것만으로 예술적 행위가 된다”고 했다.

‘워크 라이프 이펙트’ 전시장 전경.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미술관 안에 다시 공간을 만든 이 ‘워크 라이프 이펙트 스트럭처 A’를 작가는 ‘반자율적(semi-autonomous)’ 공간이라 부르는데 그의 작업이 가지는 역설적 측면을 보여준다. 환하게 밝혀진 건축적 공간의 입면은 유리로 된듯 하지만, 실제로는 쉽게 들어갈 수 있다. 상가 정면이나 거대한 진열장과도 닮았지만, 알맹이는 없다. 안쪽의 추상적인 직선들은 건축 자재로 쓰이는 색입힌 알루미늄 파이프일 뿐이다. 하지만 다채로운 색의 배열은 미적으로 느껴진다. 작품 제목은 ‘핀 & 호라이즌’. 삶과 일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직접적·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대신, 익숙한 것들을 새로운 모습으로 제시해 관람객이 계속 생각하도록 이끄는 작업들이다.

커다란 네온사인은 전시 공간을 잠식한다. 도시의 밤을 밝히는 네온이 보여주는 것은 엉뚱하게도 수학 공식이다. 작품명 ‘행복 방정식’. 2014년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에서 출판한 학술논문에서 제시한 ‘행복을 계산하는 공식’이다. 연구진은 실험 참가자에게 돈을 벌거나 잃게 하는 의사결정 테스트를 통해 행복의 크기를 예측하는 방정식을 만들었다고 한다. 수학 공식은 널리 통용되는 소통 방식이다. 하지만 이 공식을 푼다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음주가무를 즐긴다는 길릭은 “코로나19로 자신의 베스트3 술집이 모두 위태로워서 슬프다”고, “한국에서 자가격리 동안 소주를 매일 마실 수 있어 행복했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네온 사인이 떠올리게 하는 술집들 그리고 그곳에서의 인간적 만남이 실제적인 행복 아닐까. 관람객들에게 방정식을 푸는데 헛힘 쓰지 말고 ‘행복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보라고 말을 건네는 것 같다. 감정조차 계량화하려는 오만한 시도에 대한 풍자로도 읽힌다.

리암 길릭의 ‘행복 방정식’.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전시장에서 포즈를 취하는 리암 길릭. 배문규 기자


전시장 2층의 ‘워크 라이프 이펙트 스트럭처 B’에는 검은 눈이 떨어져 쌓이고, 피아노에선 어떤 멜로디가 반복적으로 연주된다. 1974년 포르투갈에서 군사정부에 대항하는 혁명을 알린 노래인데, 작가가 어렴풋한 기억을 되살려 녹음한 것이다. 정치적 은유다. 길릭은 “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 다른 사유를 하도록 유도하면 충분하다”며 “보는 사람의 몫이 있다”고 했다. 그의 메시지는 간명하다. “너무 투명한건 믿지 마라”. 6월27일까지.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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