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용사들, 수탁은행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해결책 없는 금융위

박소정 기자 2021. 4. 12.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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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형 운용사 "수탁사 없어 펀드 설정 포기"
은행 "위험 부담은 큰데 수수료 수익도 미미"
은행 수탁 펀드 수, 2년 만에 7548→6252개
갈피 못 잡는 은성수 "과도기적 현상이라 생각"

최근 중·소형 운용사의 펀드나 설정액 규모가 작은 펀드에 대해 은행들이 수탁 업무를 꺼리고 있다. 은행들은 수탁 업무로 인한 수수료 수익도 크지 않을뿐더러, 사모펀드 사태 이후 수탁사 책임이 더욱 강조되고 있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금융당국은 연일 불만을 쏟아내는 운용사들과 은행 사이에 끼어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12일 금융권에 따르면, 최근 은행권에선 펀드 설정액이 100억원에 미치지 못하는 소규모 사모펀드에 대한 수탁 업무를 가급적 맡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선 이른바 ‘100억원 룰(rule)’이 공공연하게 존재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특히나 신생 중·소형 자산운용사들의 경우 수탁은행을 찾지 못해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서울의 한 시중은행 창구 모습. /연합뉴스

자산운용사는 펀드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자금을 맡아줄 수탁사를 찾는다. 수탁사는 판매사로부터 돈을 받아 이를 보관하고, 운용사 지시에 따라 자금을 굴린다. 수탁사는 운용사의 평판이나 펀드 설정액 등 다양한 요소를 심사하는 과정을 거친다.

국내 수탁사는 총 20개로 은행 13곳(NH농협·KB국민·신한·하나·우리·IBK기업·SC제일·부산·한국산업·HSBC·한국씨티·도이치), 증권사 6곳(삼성·미래에셋·NH투자·KB·한국투자·신한금융투자), 한국증권금융 1곳이다. 수탁사를 구하지 못하면 펀드를 출시할 수 없다.

그런데 지난해 옵티머스 펀드 사태를 계기로 은행들의 경계감이 커졌다. 옵티머스 펀드의 수탁은행이었던 KEB하나은행은 검찰로부터 압수수색을 받았다. 옵티머스의 펀드 금액 5300억원 대부분을 맡았던 하나은행이 제대로 관리·감독을 하지 않았다는 책임을 물은 것이다. 검찰은 옵티머스가 수탁사인 하나은행과 모의해 펀드 부실을 은폐하려 한 것이 아닌지 살펴보고 있다. 반면 하나은행은 수탁회사가 관리 책임을 지는 공모펀드와 달리 사모펀드는 감시할 의무와 권한이 없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수탁 업무를 맡을 수 있는 기준에 대해서 금융당국이 명문화해준 것은 없다"며 "과거부터 관행처럼 ‘이 정도 기준이면 맡을 수 있다’는 분위기가 형성돼 오는 식이었는데, 옵티머스 사태 등을 계기로 그런 조건들이 더 까다로워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수탁회사의 의무가 더 많이 지워진 상황에서 은행들은 보수적으로 심사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자산운용사 중에는 아예 펀드 설정을 포기하고 펀드 출시를 늦추는 사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 중·소형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운용사 설립 이후 자본금 규모를 키워가면서 이제 막 성장한다고 생각했는데 수탁은행 문턱 앞에서 가로막혔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2019년 6월 말 기준 은행권의 수탁 펀드 수는 7548개에서 지난 8일 6252개로 감소했다.

옵티머스 자산운용. /조선DB

향후 수탁은행의 법적 책임도 강화될 전망이어서 이런 현상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판매·수탁사에 사모펀드 운용에 대한 감시 책임을 부여하는 등 사모펀드 투자자에 대한 보호 장치를 마련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지난달 24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다. 이 개정안은 오는 10월 시행된다.

수탁 업무에 따른 위험 부담은 날로 커지는데 수익에도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수탁 수수료는 0.03~0.04% 수준이다. 최근 관행으로 자리 잡은 기준인 100억원이 설정된다고 해도, 은행이 벌어들일 수 있는 수수료 수익은 300~400만원에 불과하다. 또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수탁 운용사를 심사하는 관련 현업 부서 인원도 적은 편이라 소규모 운용사들에 대해 일일이 따져볼 여력이 안 되는 것도 사실"이라고 전했다.

은행과 자산운용사의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는 가운데, 금융위원회도 시장에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고 있다. 금융당국 관계자에 따르면 연초 금융투자업계에서 이런 애로사항이 흘러나오자, 은성수 위원장은 은행 관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수탁 업무를 적극적으로 맡아달라’고 권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최근에는 입장이 다소 바뀌었다. 은 위원장은 지난 5일 금투업계 최고경영자(CEO)들과 만난 자리에서 "운용사는 수탁사를 구하기 어렵고, 수탁사에선 책임 문제가 따르니 과거만큼 받을 수는 없는 등 (사모펀드 사태에 따른) 과도기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한다"이라며 "수탁사와 운용사 각자의 입장이 있으니, 서로가 이해를 해서 절차를 잘 밟고 책임을 분명히 하면 다시 정상화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한발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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