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사람 냄새 사라진 문재인 청와대 [최영해의 폴리코노미]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서 벌어진 한 장면은 아직도 선명하다. 2009년 5월 29일 서울 경복궁 홍례문 앞뜰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이명박 당시 대통령 앞에서 비례(非禮)를 사죄하며 고개를 숙인 모습이다. 그에게서 대인(大人)의 기개가 엿보였다. 주군(主君)을 떠나보내는 자리에서 정적(政敵)에게 한 없이 자신을 낮춘 모습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다.
문 전 실장의 사과는 백원우 민주당 의원의 돌출 행동 때문이었다. 노무현 청와대에 근무한 백원우는 장례식장에서 MB가 헌화하려 하자 “사죄하라. 정치적 살인이다”라고 고함치며 앞으로 뛰어나갔다. 노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逝去)는 검찰 수사를 집요하게 만든 MB가 배후라고 확신한 데 따른 것으로 짐작됐다. 그의 돌발 행동에 영결식장에선 “그냥 놔둬라” “사죄하라”는 고함이 터져 나오는 등 어수선했다. 문 전 실장이 정중하게 사과하고 이 대통령이 “괜찮다”고 말하면서 분위기는 다소 누그러졌다.
●文, 백원우 민정비서관 발탁 적폐청산 신호탄
그로부터 8년 후. 한동안 정치와는 담을 쌓아왔던 문재인은 ‘정치를 하지 말라’던 노무현의 권유를 뿌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돼 청와대에 들어왔다. 노무현 청와대에서 민정수석과 시민사회수석,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비선 실세’로 불린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건으로 민심을 잃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카드는 ‘적폐청산’이었다. 새로운 정치를 해보려는 각오도 단단했을 것이다.
그런데 청와대 첫 인사는 의외였다. 영결식 소동의 주인공인 백원우 전 의원을 대통령민정비서관으로 발탁한 것이다. 여의도 재선 의원 출신이 가기엔 부적절해 보이는 인사였다. 장례식장을 찾은 MB를 향해 분을 이기지 못하고 고함 쳐 문 전 실장이 고개 숙여 사과하게 만든 사람이 가기엔 균형 인사와 거리가 있었다.
민정비서관이 어떤 자리인지는 누구보다도 문 대통령이 잘 알고 있다. 2003년 노무현 정부 첫 조각 때는 부산 참모 출신 이호철이 민정비서관을 맡았다. 민정비서관은 권부(權府)의 핵심이다. 문 대통령이 그런 자리를 백원우에게 맡긴 것은 적지 않은 시그널을 주는 정치 행위였다. 일각에선 “문재인 전 비서실장의 당시 사과가 진심을 담은 게 아니었던 게 아니냐”는 얘기도 나왔다. 노 전 대통령의 장례식 후 8년 동안 칼을 가슴에 벼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백원우는 청와대에서 부처들의 적폐청산 태스크포스를 주도하면서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과거를 지우는 데 앞장섰다. 여의도 정가에선 가혹한 보복 정치의 서막(序幕)이라는 말도 나돌았다.
문 대통령이 균형감을 갖고 있었다면, 만약 제대로 적폐청산을 하려고 했다면 그 자리엔 균형감을 인정받는 관료 출신을 쓰는 게 나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MB가 노무현을 죽였다’고 비난하는 친노 인사들이 적지 않지만 ‘노무현 정신’에 부끄러운 뇌물 사건이 사건의 본질이요, 진실에 가까운 분석이었다.
●평창동계올림픽에서 홀대 당한 이명박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반년을 훌쩍 넘긴 2018년 2월. 평창동계올림픽 참석 여부를 놓고 MB 참모들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참석 여부를 놓고 갑론을박(甲論乙駁) 끝에 “가시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하필 문 대통령이 한병도 정무수석을 통해 MB에게 초청장을 보낸 날, 검찰은 MB가 퇴임 후 사무실로 쓰던 청계재단 빌딩을 압수수색했다. MB 측근들에 대한 압수 수색과 소환 조사가 이어졌다.
MB는 “임기 중 올림픽을 유치한 대통령의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옳다. 그래도 내가 대통령 때 유치한 행사에 빠질 수 없다”며 참모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행사장에 갔다. 하지만 행사장에서 그는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개막 리셉션의 좌석은 문 대통령이 앉은 메인 테이블과 멀찌감치 떨어진 장소였다. 야외행사인 개막식 스타디움에서도 외국 원수(元帥)가 아니라는 이유로 일반인들이 입장하는 문으로 들어가야 했다. 좌석 또한 문 대통령과 한참 떨어진 곳에 배치했다. 평창올림픽을 유치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치고는 도리에 어긋난다며 MB 참모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그들은 여야를 떠나, 이념을 떠나 도리의 문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노무현재단 앞에서 시위한 한명숙
이명박 대통령 때 한명숙 전 총리는 검찰의 뇌물 수사를 받던 중에 ‘억울하다’며 노무현재단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노무현 정부의 총리를 지낸 인사를 MB정부에서 수사하는 것은 어찌됐든 정치 보복이 아니냐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한 전 총리가 ‘돈을 받지 않았다’고 검찰에서 밝히면 될 일이었지만, 그는 억울함을 노무현재단 앞에서 풀려고 했다. 여기에 많은 친노 인사들이 그의 억울함을 풀어줘야 한다고 동조했다. 당시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문재인 전 비서실장이었다. 문 이사장 또한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한 전 총리가 검찰청에 소환되는 날 검찰청사에 나가 응원을 했다.
대법원 판결까지 받고 2년의 실형을 산 이 사건을 놓고 문재인 정부는 진상을 다시 파헤쳐보겠다고 나섰다. 한명숙에게 무슨 빚을 졌기에 대법원 판결까지 난 사건을 뒤집으려하는 것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에서 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 국민대 명예교수는 한 전 총리가 노무현재단 앞에서 시위를 할 때 “뇌물이 노무현 정신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며 혀를 찼다.
●재보선 출마 막지 않은 문 대통령
오거돈 부산시장이 여비서 성추행으로 물러나고, 박원순 서울시장이 여비서를 성적으로 희롱했다가 수치심을 못 이기고 극단적 선택을 하는 바람에 재보궐 선거가 치러졌다. 사정이 이렇다면 문재인 대통령이 민주당 대표 때 만든 ‘중대한 비리 혐의로 보궐선거를 치르게 된 경우 공천하지 않는다’는 당규에 따라 후보를 내지 않는 게 대의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문 대통령이 전임 시장의 잘못된 처신을 질타하고, 고개 숙여 사과했다면 분노한 민심을 달래고 나아가 명분 있는 정치를 한다는 평가를 받을 수 도 있었다.
하지만 민주당은 당규를 뜯어고치면서까지 1년짜리 시장을 빼앗기기 않으려고 꼼수를 부렸다. 당규를 고치면서까지 반칙한 민주당 지도부를 대통령이 뜯어 말렸다면, 민주당이 후보를 내는 것에 대해선 ‘염치없는 일’이라며 대통령이 꾸짖었다면 어땠을까. 노 전 대통령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궁금해진다. 문 대통령은 여당의 거침없는 독주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부작위(不作爲)는 그 자체로 시그널이다.
●청와대에서 사라진 ‘노무현 정신’
노 전 대통령이 문재인 정부에서 새삼 거론되는 것은 노무현에게는 사람 냄새가 나는 그만의 향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과 문 대통령에게는 모두 열성 지지자들이 있다. 노란 풍선을 들고 행사장에 나타나는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은 이유는 자발적인 시민들의 풀뿌리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상식에 기초한 사람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노무현의 꿈이었다.
김대중 정부를 계승했지만 노 전 대통령은 국회의 대북 불법송금 특검을 받아들여 DJ 정부의 잘못을 심판대에 올렸다. DJ의 호남편중 인사에 대해 과한 것이라며 제동을 걸고 정책을 전문 관료에 맡겼다. 지지 세력의 반대에도 한미 FTA(자유무역협정)를 체결하고 제주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건설했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미국이 요구한 이라크 파병을 승인하고 현지로 날아가 장병들을 끌어안았다. 국익을 위해 자존심을 잠시 접어둔 결단이었다. 문재인 정부 4년 동안엔 이런 모습을 보지 못한 것에 사람들은 아쉬워하는 것 같다.
●‘YS 시계’ 보여준 노무현의 사람 향기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4월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후 바로 자신을 정치로 불러들인 김영삼 전 대통령을 찾아가 차고 있던 시계를 보여주며 YS가 준 것이라고 고개를 조아렸다. 극성 지지자들의 반발을 초래했지만, 한 표라도 절실했던 노무현은 자신을 낮춰가면서 국민통합을 주창했다. 그러기에 ‘바보 노무현’이라는 사람 냄새 물씬 나는 별명을 얻었다.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 대통령이 이끄는 지금 청와대에선 노무현의 그런 향기를 맡을 수 없다고 아쉬워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문 대통령이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노 전 대통령 곁을 지킨 2007년은 노무현 청와대가 레임덕이라는 중병에 걸렸을 때였다. 문 대통령이 정치를 한 이유인 ‘노무현 정신’을 남은 1년 동안 되새기면서 국정을 운영한다면 얼어붙은 민심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릴 수 있지 않을까.
최영해기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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