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민.크리그림] 한 골의 마력

김형중 2021. 4. 12.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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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닷컴] 축구는 득점이 적은 종목이다. 0-0으로 끝날 때도 있다. 그래서 한 골의 의미가 크다. 이진법처럼, 방에 달린 등 스위치처럼, 온과 오프, 모 아니면 도 식으로 세상을 정의한다. 한 골이면 충분하다.

수원FC와 울산현대의 K리그 9라운드는 경기 전부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이날 전까지 수원FC는 개막 8경기에 걸렸던 24점 중 6점밖에 얻지 못했다. 1부로 올라오면서 수원시는 기존 선수단 운영비(알다시피 세금)를 ‘묻고 따블로’ 갔고, 그 경기를 보기 위해 또 돈을 낸 팬들 앞에서 수원FC는 순위표 맨 아래에 처져 있다. 여기에 판정 피해의식까지 부글부글 끓는 중이다. 박지수는 어느새 ‘오심열사’에 등극했다. 돈은 돈대로 쓰고 성적은 밑바닥인 데다 판정까지 우리를 억누른다고 생각하면 수원FC 식구 누구라도 울화통이 터질 것 같다.

경기 전, 김도균 감독의 입에서 ‘승점’, ‘박지수’, ‘정확한 판정’ 등 꽤 비장한 단어들이 나왔다. 그러는 동안 기자회견실 밖에서는 성인 나이트클럽을 떠올리는 ‘장터 비트’가 쩌렁쩌렁 울렸다. 김도균 감독이 비장함을 약간 빼거나 홈경기 운영자가 음악 볼륨을 좀 줄이거나 둘 중 하나를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김도균 감독은 “상대가 울산이지만 물러서지 않고 부딪혀볼 생각”이라며 가슴을 폈다. 이 말은 근사하게 들렸다. 객관적 전력 차이를 순순히 인정하지 않겠다는 각오야말로 장군이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일 것이다.

킥오프 순간부터 경기는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물러서지 않겠다”라는 각오가 무안하게 수원FC는 저만치 물러서서 진을 쳤다. 상대의 후방 빌드업을 압박하려는 라스의 뒤통수에 “라스! 빽!”이라는 울부짖음이 날아가 꽂혔다. 라스는 뒷걸음쳐 센터서클로 복귀했다. 강팀 울산이라도 템포를 올리자. 그런 일은 없었다. 홍명보 감독은 선발명단부터 힘을 쪽 빼고 경기에 임했다. 윤빛가람, 이동준, 원두재, 김태환, 김인성이 모두 벤치에 있었다. 경기 전, 홍명보 감독은 “지금 상황에서 제일 좋은 선택을 했다”라고 설명했다. 경기를 보니 그 말이 얼마나 영리한 말솜씨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김도균 감독은 킥오프 19분 만에 선발 출전했던 U22 선수 두 명을 모두 뺐다. 개막 당시만 해도 나는 U22 ‘꼼수’를 볼 때마다 ‘불법적 합법’이라는 생각에 화가 났는데 이제는 무감각해졌다. ‘꼼수’도 당당하면 당당할수록 ‘꼼수’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착시야말로 2021시즌 초반 내가 얻은 교훈이다. 전반전이 끝나갈 무렵 울산의 김태현이 VAR 판독으로 레드카드를 받았다. 박지수의 ‘This is Soccer’와 연결고리가 있을 리 만무하지만 시기적으로는 참 절묘했다. 이런 것도 소소한 재미일지 모른다.

경기는 막판으로 흐르면서 더 답답해졌다. 코로나19 탓에 관중석의 입이 막혔는데 양 팀의 플레이도 덩달아 막히니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한 명이 많은 수원FC가 홈 팬들 앞에서 이기려고 달려들지 않는 것도, 리그 우승을 다툰다는 울산이 최하위팀을 상대로 승점 3점에 간절해 보이지 않는 것도 상식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후반 추가시간 김인성이 골을 터트렸다. 울산 벤치의 함성이 수원종합운동장의 두툼한 적막을 찢고 터져 나왔다. 벤치 앞에서 저렇게 좋아하는 홍명보 감독의 모습은 2012년 런던올림픽 이후 처음인 것 같았다.


울산이 이겼다. 함성은커녕 한탄마저 낼 장면이 거의 없었던 90분이 김인성의 결승골로 어느새 ‘극장골이 나온 짜릿한 드라마’로 바뀌어 있었다. 주위에 있던 기자 동료들의 고개가 갑자기 노트북 화면을 향했고 자판 위에서 손가락을 미친 듯이 춤을 췄다. 경기 종료 휘슬에 맞춰 작성했던 ‘헛심 공방 0-0 무승부’라는 기사가 김인성의 골 때문에 ‘김인성 극장골, 울산 신승’으로 긴박하게 수정되고 있었다. 현장에서 상보를 막지 않는 신분이 한없이 고마울 때가 바로 이런 경기다. 그 한 골은 모든 것을 바꿨다.

한 골의 위력은 대단하다. 92분에 나온 골 덕분에 우리는 이날 한없이 따분했던 90분을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 ‘근사했던 90분’으로 복기할 수 있다. 홍명보 감독은 “그동안 부족한 팀 정신을 주문했는데 오늘 그 결과를 봤다”라면서 만족감을 표시했다. 김인성에게 ‘팀 정신’의 정체를 물으니 “팀이 하나로 똘똘 뭉쳐야 하는 부분을 늘 강조하신다”라고 대답했다. 울산의 1-0 승리는 그런 각성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수원FC의 0-1 패배는 강호의 높은 벽을 실감한 아쉬운 패배였다. 물러섰다가 수적 우위도 살리지 못한 채 패한 경기가 아니었다. 선발명단에서 힘을 뺐다가 막판 운 좋게(?) 터진 결승골로 이긴 경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품만 나왔던 90분의 기억은 삭제되었다. 김인성의 한 골이 이 모든 걸 해냈다.

글, 그림 = 홍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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